金方慶 열전 07 (개경환도와 몽고강화② : 49-5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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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1-10 15:43 조회1,919회 댓글0건본문
2002년 1월 27일 모임을 대비해서 충렬공 휘방경 할아버지의 행적을 고려사열전을 중심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근거자료는
1300년 이진 찬 [김방경 묘지명]
1350년 안진 발 [김방경 행장]
1392-1454년 김종서, 정인지 등 편수 [고려사 김방경열전]
안동김씨 대동보 (초보 : 1580 경진보)
김방경 연구 석사학위논문 3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 기타 자료를 참고로 하고 있습니다.
金方慶 열전 07 (개경환도와 몽고강화② : 49-57세)
1260년 (원종1, 49세) 大將軍, 개경환도를 위해 太孫(뒤의 충렬왕)이 출배별감 삼음
1263년 (원종4, 52세) 御使中丞, 知御史臺事 겸 선군별감사
1265년 (원종6, 54세) 大將軍, 元에 進奉使 (★1차 入元) 上將軍
1268년 (원종9, 57세) 전분의 무고로 (★첫번째 무고) 남경으로 좌천, 3일만에 복직,
판례빈성사, 북계兵馬使, 서북면兵馬使, 형부尙書, 추밀원副使
▣ 김방경 연구 (이상철, 1986, 청주대)
이와같은 성실함과 충직하고 청렴함을 바탕으로 원종원년 (1260)에 49세로 大將軍이 되었으며 知刑部事가 되고 <고려사 세가 권25 원종원년 3월 戊辰조> 御史中丞에 올라 법을 지켜 아부하지 않았다.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원종4년 (1263) 知御史臺事를 거쳐 <고려사 세가 권25 원종4년 12월 丙寅조> 上將軍이 되었으나 남경으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남경에 간지 3일만에 다시 北界를 鎭撫하게 하여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判禮賓省事, 北界兵馬使가 되었다. <고려사 세가 권26 원종9년 2월 丙午조>
▣ 김방경연구 (윤애옥, 1992, 성신여대)
그러나 고종말년 무신정권의 전쟁지도 능력의 약화와 함께 참혹한 전란의 장기화로 인하여 이탈된 민심은 강압적인 입보책과 마찰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는 대몽항쟁이 한계에 다달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최씨정권의 몰락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이었다. <윤용혁, 고려 해도입보책과 몽고의 전략변화, 역사교육32, 1982>
이후 최씨정권이 붕괴되고 대몽책에 근본적 변화가 나타나 太子의 入朝를 통해 講和의 길이 열리지만 고려조정은 抗戰파와 主和파가 대립하게 되었다.
즉 당시의 집권자인 金俊은 몽고의 입조 요구를 거절하였고, 원종9년 (1268)에는 몽고의 사신을 죽이고, 더 깊은 海島로 천도하여 몽고와의 항쟁을 계속하자고 주장하는 등의 <고려사 권130 김준전> 항전론을 주장하였고
이장용을 중심으로 하는 문신 세력은 일단 강화의 길이 열린 만큼 화평책을 추구하여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에 고려 조정은 화친으로 기울어 국왕의 친조가 실현되었다. 그 결과 두 왕실의 유대관계는 긴밀하여 졌으며, 원종은 다시 舊都에 出排別監을 두어 出陸還都의 의사를 표시하는 등 몽고의 요구를 조금씩 실행하여 갔다.
▣ 고려후기 김방경의 정치활동과 그 성격 (류선영, 1993, 전남대)
최씨정권이 붕괴한 후 김방경은 開京 出排別監, 進奉使 入元 등으로 개경환도와 친몽정책의 추진에 참여하였다. 이러는 과정에서 그는 重房이나 최씨 이후의 실력자인 金俊과도 대립하여 갔다.
김방경은 무인 집권자와는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였다. 고려의 몽고와의 강화 성공은 최씨정권 아래 항몽하였던 김방경 같은 무인이 왕과 문신 등의 講和派에 속함으로써 가능하였던 것이다.
백부 창이 타계하고 최씨정권이 무너진 뒤인 1260년 (원종1) 그는 49세의 나이로 개경 환도를 위해 太孫에 의해 출배별감에 임명되었다. 1263년 (원종4) 52세때 그는 어사중승, 지어사대사 겸 선군별감사를 지냈고. 이어 1265년 54세로 원나라에 진봉사로서 처음 입원하였다. 이어 그는 무반 최고위인 上將軍으로 승진하였다.
1268년 57세때 그는 응양상장군 전분의 무고 (★첫번째 무고)로 남경으로 폄출되었다. 그러나 3일 만에 다시 복직하여 판례빈성사, 북계병마사, 서북면병마사, 형부상서, 추밀원부사로 승진하였다.
2. 몽고 강화 및 원종복위 활동
1258년 (고종45) 김준 등에 의해 최의가 제거됨으로써 최씨정권은 붕괴되었다. <고려사 세가 권24 고종45년12월조>
항몽을 주도하던 최씨정권이 몰락함으로써 대몽책에도 변화가 생겼다. 이듬해 고려는 몽고와 강화를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김준을 집정으로 하는 무인정권이 다시 대두되면서 무신들과 삼별초 같은 군대를 중심으로 항몽책이 다시금 대두되었다. 반면 이장용으로 대표되는 문신들과 몽고와의 외교교섭에 참여했던 관리들의 대부분은 화평책을 추진하였다. <민현구, 몽고군·김방경·삼별초, P95-97>
이와 같이 몽고와의 강화에는 왕과 문신 등 강화파의 주장이 작용한 것으로 그간 알려졌다. 그렇다면 무신으로서 김방경은 어떠한 태도를 취하였을까? 이와 관련하여 다음 사료를 보자
太孫이 옛 서울로 돌아가 도읍하기 위해 大將軍 김방경과 將軍 김승준 등을 출배별감으로 삼아 창고의 쌀 6천 4백 20곡을 내어 여러 왕씨와 백관에게 나누어 주고 집을 건축하는 비용을 돕게 하였다. <고려사절요 원종원년3월>
을축6년 (1265, 원종6) 봄 정월에 광평공 순과 大將軍 김방경, 중서사인 장일을 몽고에 보내어 은혜에 사례하고 방물을 바쳤다. <고려사절요 원종6년1월>
개경으로 천도를 추진하는 왕실의 太孫(심, 뒤의 충렬왕) 에 의해 김방경은 출배별감으로 임명되어 환도 준비를 담당하였고, 또 원나라의 은혜에 감사를 표하는 봉물을 바치기 위해 進奉使로서 元에 파견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김방경이 몽고와의 강화의 뜻을 가지고 왕실의 편에 서 있었던 데 기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것은 최의를 살해하고 강화파의 선두에 섰던 신의군 영도낭장 박희실이 원에 사신으로 갔던 것과 성격을 같이 한 것으로 생각된다.>
몽고와의 강화에는 김방경 같은 무신도 찬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김방경은 개경환도 정책을 수행함으로써 무인정권과는 어떠한 관계가 되었을까?
상장군(上將軍)으로 임명되자 어떤 일이 있어서 중방(重房)의 장교 한 명을 곤장으로 치게 하였더니 이때에 반주(班主)로 있었던 전분이 김방경의 처사를 미워하여 권신에게 고소하여 김방경을 강직시켜 남경(南京-지금의 서울) 유수로 보내게 하였다.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김방경이 上將軍이 된 것은 元나라에서 돌아온 1265년 (원종6) 후반이었다. 그는 이때 공무를 집행하는 과정에서 重房 반주인 전분의 미움을 사서 권신에게 폄출당하였다. 이때 김방경을 폄출한 권신의 당시의 실력자 金俊이었다.
김방경은 김준, 전분 등의 무인 실권자들에게 미움을 사고 있었던 것이다. 김방경은 이미 그들과는 정치적 입장을 달리 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것은 그가 왕, 문신들과 더불어 개경환도 정책을 추진하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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