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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각 백불( 옥천암) -만보당 김수동 할아버님 전설 이 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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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작성일04-11-01 09:20 조회1,500회 댓글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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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종친회장을 역임하신 홍묵 종친께서 문의 하신 보도각 백불입니다.

영의정 만보당 김수동 할아버님 관련

전설이 아니라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밝혀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옥천암 전화:02-395-4031

           주소: 서울 서대문구 홍은 2동 산 1번지

◈문화유산 사적지 코스
(A 코스) 서대문구청 → 홍지문과 석성 → 옥천암 보도각백불 → 동연광(산골) → 백련사→ 양호거사비 → 화산군신도비 → 연희 104고지 → 대궐재 연희궁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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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각백불

1.<만보당 관련 전설 소개>(2003. 4. 22. 정중(도) 자료 제공)

         출전-서울500년 홈페이지(http://history.seoul.go.kr)


이 불상을 일명 부처바위(佛岩)라고도 칭한다. 『용재총화(팚齋叢話)』에 의하면 장의사 앞에 ‘냇물이 돌아 흘러 몇리 아래 부처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에 불상을 조각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한경지략(漢京識略)』에도 ‘옥천암의 불상은 언덕 바위를 깎아 만들어 해수관음불상(海水觀音佛像)이라고 한다.’는 기록도 있어 이것이 백불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백불이 새겨진 바위는 팔작지붕에 그 익공(翼工)이 정면 1칸, 측면 2칸의 보도각(普渡閣) 기와집 안에 들어가 있다. 불상의 조성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라시대에 있었던 장의사지(藏義寺址)에 있는 것으로 보아 장의사 경내에 있었던 불상으로 추측된다. 부처의 토실토실한 얼굴 모습이 신라말에서 고려 초의 불상과 비슷하며, 어깨가 넓고 장대한 것은 고려시대의 불상 조각수법과 유사하여 대체로 고려시대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장신구에는 금박을 칠했고 모발과 눈은 흑색으로 칠했으며, 불신 전체를 백색으로 칠해서 오히려 괴이해 보일 뿐이며, 원래의 조각수법을 세밀하게 관찰하는데 방해가 된다. 머리에는 금색의 높은 관을 썼는데 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좌우로 뿔이 뻗어 있고, 그 끝에 여러 개의 돌기가 있는 타원형의 큰 수식이 달려 있다. 관 밑으로는 흑발이 있고, 두 귀를 감으면서 뒤로 어깨를 거쳐 좌우에서 길게 앉힌 무릎까지 내려왔다. 끝이 갈라져서 오히려 무속상((巫俗像)을 보는 느낌이다. 상호(相好)는 원에 가깝고 도색으로 단정한 감을 주며, 귀에는 금색을 칠한 귀걸이가 달려 있다. 가슴에는 반원을 그리는 폭 넓은 금색의 목걸이가 있고 큰 팔찌에도 금색을 칠했다. 오른쪽 손은 어깨까지 들어서 외장(外掌)하고 왼쪽 손은 늘어뜨려서 왼쪽 무릎 위에 얹었다. 천의(天衣)는 두 어깨에 걸쳐서 불신 전체를 감쌌고 의문(衣紋)은 사실성 있게 묘사되었다.
조선을 개창한 태조 이성계가 서울에 도읍을 정할 때도 이 석불에 기원을 했고, 임진왜란 때는 도원수 권율(權慄)이 소수의 병력으로 이 골짜기에 매복하고 있었으나 일본군이 백불을 보고 많은 사람이 매복해 있다고 착각하여 전투를 벌이다가 참패를 당하였다고 한다. 또한 고종의 어머니도 여기에서 아들의 복을 빌었다고 하며,

 

이 백불과 관련된 여인의 전설도 있다.

즉 조선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수동(金壽童)이 나이가 들어 결혼을 하여 아들을 낳았으나 그의 부인이 너무나 박색(薄色)이라 시어머니가 이들을 쫓아냈다. 이들 모자는 결국 산 속의 동굴에서 굶어 죽었고, 죽기 직전에 남편에게 남겨 놓은 글에서 자기를 개울가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였다. 그러나 차마 개울가에 묻어줄 수 없었던 김수동은 시신을 양지 바른 언덕에 묻었다. 그 이후 밤마다 그녀의 혼이 나타나 소원대로 묻어줄 것을 간청하여 김수동이 왕의 허락을 받아 이곳으로 이장해서 묻고 바위에 아내의 상을 새기는 한편 바위 위에는 작은 절을 지었다 한다. 세월이 흘러 이 여인의 묘소는 성역화되고 사람들은 자신의 복을 빌기 위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한다. 이후 김수동의 부인에 대한 이야기는 잊혀지고 승려들이 바위에 새겨진 상을 부처님이라고 주장하여 오늘에 이르렀다는 전설이 그것이다.
이 백불을 관리하고 있는 옥천암에 관하여는 『한경지략』의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즉,

창의문 밖 한북문 옆에 옥천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는데 샘물이 언덕 위 바위 사이에서 흘러 내려 풍증이나 체증이 있는 사람이 마시면 신통하게 낫고, 눈병도 이 물에 씻으면 낫는다고 하였다. 이 약수를 마시러 옥천암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데 물을 많이 마시기 위하여 먼저 짠 것을 많이 먹은 뒤에 물을 종일토록 마셔 배가 불러야만 그 효험이 있다고 믿었다. 라고 소개하고 있어 옥천암의 옥천라는 이름이 이곳에서 나는 샘물과 관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절은 현재 조계종 조계사의 말사로 비구니 사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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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김주회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주회
작성일

  또 하나의 답사처 등장!!! 감사합니다.

김발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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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귀한 자료 제공 감사합니다.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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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김항용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항용
작성일

  이번 대구행사로 만보당 선조님이 계속 촛점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