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군지 제출자료---김주 시장(17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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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11-01 17:58 조회1,575회 댓글2건본문
우암집)<김주>
화산군 시장(諡狀)
※목차는 편집자 임의로 적은 것임
1563년 연경에 가서 종계변무
공의 휘(諱)는 주(澍), 자(字)는 응림(應霖)이고, 호는 우암(寓菴)이다.
가정(嘉靖) 42년(1563, 명종 18), 명종대왕께서 종계(宗系)의 무함(誣陷)을 미처 씻지 못한 것을 통탄하여서, 바야흐로 명나라에 진달하여 상주하고자 사신으로 갈 만한 인물을 고르셨는데, 공이 예조참판 홍문관 제학으로서 왕명을 받들었다.
명나라 세종(世宗) 황제는 상주문을 살펴보고 감동하여 칙서를 내렸으니, 그 내용은 대략 이러하였다.
“짐은 생각건대 신하의 실상을 깊이 이해하고 먼 외방의 사람을 달래는 것이 제왕으로서 세상을 다스리는 떳떳한 법도이고, 근본을 소급하여 종계를 밝히는 것은 자손으로서 앞 시대의 분들을 빛나게 하는 효성이리라. 아아, 그대는 대대로 독실하고 충성스러우면서 순실하여, 짐의 동쪽 번병(藩屛)을 이루고 있으면서, 누차 조상의 계보를 바로잡아 줄 것을 진달하여 청하였으니, 짐은 특별히 그대가 상주한 내용을 윤허하여, 사관(史?)에 선부(宣付 : 천자가 명령함)하여 하자를 씻어버리고 신뢰할만한 기록을 전하여 해와 별처럼 찬란하게 되었다. 그러니 너의 나라에 어찌 영화로운 베풂이 되지 않겠느냐. 아아, 선한 덕을 내리고 이름을 바르게 하였으니, 이미 그대의 효성을 실천하여 이루었고, 선대의 전통을 이어 근실하게 헤아리게 되었으니, 더욱 마땅히 너의 충성을 다하도록 하라.”
대개 공정(恭靖) 대왕 때에 처음으로 종계(宗系)의 잘못됨을 변설하여 달라는 청을 하였고, 그 전후로 사신들이 수십 번을 갔다 왔다가, 이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흔쾌하게 허락해서 밝게 분석하고 환하게 펴서 덕음(德音)을 반포하였다. 이는 실로 우리 명묘(明廟 : 명종)께서 성스러운 덕과 지극한 정성을 지니셔서 높고 멀리 신의를 드러내고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로되, 우리 군주의 성의를 제대로 진달하여 통하게 함으로써 명나라 천자의 은혜로운 명을 맞게 하여 종국(宗國 : 종사)에 은혜를 가져온 것은 공이 사신으로 가서 전권(專權)을 지니고 제대로 응대한 힘이 많은 효과를 본 때문이기도 하다.
1563년 연경의 빈관(賓館)에서 고복(皐復)
이미 일을 다 마친 뒤에 병환이 나서 연경의 빈관(賓館)에서 고복(皐復)하시니, 계해년(1563, 명종 18) 9월 17일이었다. 황상(천자)이 부음을 듣고 놀라고 슬퍼해 하여, 널과 장례용품을 특별히 하사하여 염습하게 하였다. 널에 실려 복명(復命)을 하매, 장례의 예전(禮典)을 하사하시니, 애도의 뜻과 영화로운 의식이 함께 지극하였다. 특별히 공에게 예조판서 양관대제학을 추증하였다.
1590년 광국훈(光國勳)의 공신첩에 이름을 올리고 화산군(花山君)에 책봉
선묘(先廟 : 선조) 경인년(1590, 선조 23)에 대명회전(大明會典)이 처음으로 반포되자, 광국훈(光國勳)의 공신첩에 이름을 올리고 화산군(花山君)에 봉하였다. 화산이란 안동(安東)이다. 안동 김(金)은 우리나라의 대성(大姓)이다.
1. 선계
공은 고려 시중(侍中) 충렬공(忠烈公) 방경(方慶)을 비조(鼻祖)로 하는데, 훈업(勳業)과 문장이 우리나라 역사에 번쩍번쩍 빛난다.
안렴사(按廉使) 휘 사렴(士廉)은 의리를 지켜 혁명의 때에 뜻을 굽히지 않고 청주(淸州)에 은거하였다. 태조가 좌사간(左司諫)의 벼슬로 누차 불렀으나 취임하지 않았으며, 무덤을 평평하게 하라고 유언하였다. 청주의 유림들이 지금도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 분이 공에게 7세조이다.
고조 휘 환(丸)은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를 하였다. 증조 휘 종손(宗孫)은 감찰(監察)을 지냈고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조(祖) 휘 성(城)은 충무위 중부장(忠武衛 中部將)을 지냈고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고(考) 휘 공량(公亮)은 일찍이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학문이 이루어진 뒤 과거에 합격하여 장차 큰일을 하리라 기대되었으나, 연산군 시절의 정치가 어지러운 때를 만나, 주계군이 화를 만나자, 마침내 벼슬길에 나아갈 뜻을 완전히 끊고, 백의(白衣)로 집에서 일생을 마쳤다. 자식인 공이 귀하게 되자, 보조공신(補祚功臣) 이조판서(吏曹判書) 안원군(安原君)에 추증되었다. 사적은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에 자세하다. 비(?)는 증 정부인(贈貞夫人) 전주이씨(全州李氏)인데, 현감(縣監) 팽수(彭穗)의 따님이시다.
2. 관직
공은 정덕(正德) 임신년(1512, 중종 7)에 태어나, 신묘년(1531, 중종 26)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기해년(1539, 중종 34) 별시(別試)에서 장원을 하고, 내직으로 들어가 옥당(玉堂: 홍문관)과 한원(翰院: 예문관)의 동벽(東西) 서벽(西壁)을 맡았고, 의정부의 검상(檢詳)과 사인(舍人), 이조좌랑(吏曹佐郞)과 정랑(正郞),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 대사간(大司諫), 홍문관 부제학(副提學), 이조참의(吏曹參議), 예조참의(禮曹參議), 성균관 대사성(大司成), 이조참판, 호조참판, 병조참판, 호조참판을 하였으며, 호당(湖堂)에 선발되어 문형(文衡 : 홍문관 대제학)에 천거되었다.
외직으로는 경기어사(京畿御使), 관북어사(關北御使)를 지냈고, 황경(皇京: 명나라 수도)에 하지부사(賀至副使)로 갔다 왔으며, 개성유수(開城留守), 전라관찰사, 황해관찰사를 지냈다. 이것이 공이 거친 경력의 대강이다.
3. 성품과 교유
공은 어려서 가정의 가르침에 푹 젖었으며, 덕기(德器)가 노성(老成)하였으며, 사예(詞藝)는 동년배를 압도하였다. 성장하여 조정에 서서는, 퇴계(退溪) 하서(河西) 금호(錦湖) 등 여러분과 수계(修?)하고 강독(講讀)하여, 문장과 언의(言議)가 진신 사대부(縉紳士大夫) 들 사이에서 으뜸이었다. 명묘(明廟: 명종)가 친정(親政)함에 이르러서, 어진 선비의 무리들이 모두 징소(徵召)되었는데, 공이 으뜸으로 발탁되어, 반차(班次: 반열)가 경월(卿月)에 오르고 관각(館閣) 관각(館閣) : 중국의 한림원(翰林院), 우리나라의 홍문관과 예문관을 가리킨다. 에서 명망이 쌓여, 늠름하게 공보(公輔: 재상)가 되리라 기대되고 세상의 도리를 바로잡는 책무를 다하리라 여겨졌다. 그렇거늘 하늘이 그 연령(수명)을 인색하게 내려, 지위가 대기(大器)에 차지 않은데다가, 또 가승(家乘)이 흩어져서, 보고 듣는 것이 차츰 멀어지매 벼슬살이의 이력과 언행의 본말이 백에 하나도 전하지 않게 되었다.
국가의 계책을 도모하고 간쟁을 행한 문장과 격양하고 징청(澄淸)하였던 풍채가 반드시 찬연하여 볼만 하였을 것이거늘, 옛 기록과 전문이 컴컴하여 아무 진술하여 일컬을 것이 없으니, 필경 우뚝하여 기록할 만한 것은 오로지 나라를 빛낸 한 가지 일뿐일 것이다. 그리고 기아(箕雅)나 읍지(邑誌)에 흩어져 보이는 약간의 시문들은 역시 솥 전체에서 고기 한 점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애석하도다.
하지만 평소에 친하였던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됨을 옳게 평가할 수 있는 법이다. 가만히 보건대, 일시의 여러 공들 가운데 공을 향모(嚮慕: 흠모)하고 공을 추대하였던 분들을 보면 대개 사림의 영수(領袖)요 사원(詞垣: 문단)의 종장(宗匠: 대가)이니, 공의 중망과 실질을 여기에서 가히 헤아려 볼 수 있으며, 그 분들이 칭송한 말을 보면 공의 풍도와 기상을 가히 방불하듯 상상해 볼 수가 있다.
퇴계 선생은 일찍이 시를 지어 공에게 부쳐, “지난해 등잔불 켜고 책상머리에서 벗하였더니, 책을 읽으려다가 그대가 도리어 곁에 있는 듯 생각이 드는구려. 미륵의 모습과 하해 같은 도량, 성안의 가까운 거리에서도 모습을 보기 어렵다니(去年燈火伴書床, 欲讀思君却置傍. 彌勒形貌河海量, 城中咫尺阻音光)”라고 하였다.
우암은 1544년(중종 39년) 5월 27일에 부친 판서공의 상을 당하여, 성중에서 복상하였다. 이 때 퇴계가 이 시를 지어 보냈다. 이 시의 세 번째 구절은 공의 참 모습을 그대로 베껴낸 것이니, 하찮은 끄트머리의 일에 불과한 문사(文詞)를 구하여 그것으로 엉성하게 그려낼 것이 무어 있겠는가.
안으로는 시(詩)예(禮) 등 유교의 가르침을 깊이 지키고 밖으로는 도의(道義)로 보탬을 주는 벗의 지도를 바탕으로 삼아, 문채도 있고 바탕도 있어서 밝은 시절의 조정에 위엄을 갖추어 출사하여 청화(淸華)의 빛을 두루 드날려서 명예와 중망에 아무런 흠이 없어, 마침내 왕사(王事)에 부지런히 힘써 상국(上國: 여기서는 명나라)에서 왕명을 완수하매, 공적은 종팽(宗? : 즉 종묘) 종팽(宗?) : 종묘의 제사. 여기서는 즉 종묘.에 보존되고 이름은 맹부(盟府 : 즉 공신의 반열)에 있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시호를 내리는 법에 맞으므로, 적을 만한 시호들을 삼가 다음과 같이 채집하여 태상시(太常寺)가 고찰할 수 있도록 마련하였습니다.
기유년(1789, 정조13) 맹춘, 대광보국숭록대부 행판중추부사(大匡輔國崇祿大夫 行判中樞府事) 이복원(李福源) 찬(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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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주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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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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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 감사함니다.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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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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