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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서공의 시-삼일포 단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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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4-11-02 08:21 조회1,505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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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三日浦丹書石>


  刻碑碣古猶多    비석에 글 새기는 일은 예전에도 많았지만
  蘇食塵侵字轉訛     이끼 끼고 먼지 앉아 글자마저 틀려졌네
  爭似指頭千載血     손가락 서로 짚어 천년 자취 다투건만
  一淪山石不銷磨     한 번 산석 떨어지니 새기고 갈지 못하는도다.

 

금강산 관광 홈페이지 (http://www.ilovecruise.com/) 의 <삼일포> 자료 일부입니다.


외금강 온정리에서 동남쪽으로 12km 떨어진 지점에 자리한 삼일포는 예로부터 관동8경의 하나로 이름났고, 호수 풍경으로는 전국에서 으뜸으로 알려져 왔다.


신라의 화랑들이 이곳에 삼일간 체류했다고 하여 삼일포라고 한다. 북한은 이 호수를 천연기념물 지리부문 제218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호수 면적은 0.79㎢, 수심4m내외, 둘레4.5km이다.


신라때의 4선인 영랑, 술랑, 남석랑, 안상랑이 이곳에 하루쯤 다니러 왔다가 호수 경치에 취해 사흘동안 놀았다고 한다. "삼일포"라는 이름도 이들이 사흘동안 놀고 갔다고 하여 생겨났다.


호수 가운데는 소나무 우거진 와우도와 사선정이 있는 단서암, 무선대 등 몇 개의 큰 바위로 이루어진 작은 섬들이 놓여 있다.


예전에 신라의 사선이 놀았다는 사선정은 현재 복원되어 있으며, 단서암은 신라 사선의 한 사람인 술랑이 세 자씩 두 줄로 써놓은 "述郞徒 南石行(술랑도 남석행)"이라는 글자가 붉은 색을 낸다고 하는 바위인데, 호수의 물이 적을 때에 "남석" 두 글자만 간신히 보인다.


15세기까지만 해도 글자가 모두 뚜렷했는데 금강산에 찾아온 관리들이 으레 단서암을 보려 하였고 탁본하여 하였기에 그 시중을 들기 뒤찮고 힘들었던 이 고을 사람들이 단서암을 돌로 짓이겨 물 속에 처넣어서 훼손하였다고 전해온다.


단서암 정상에는 매향비를 세웠던 비석 자리가 있다. 이 매향비는 고려 충선왕 1년 (1309)에 강릉존무사 김천호라는 이가 삼일포에 향목을 묻은 것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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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서암은 여려 개의 길죽한 큰 바위로 이루어진 섬이다. 옛날에 신선들이 여기에 와 놀다가 <술랑도 남석행>이라는 6자의 글을 석자씩 두줄로 세겨놓았는데 글자들이 붉은 색을 낸다고 하여 <단서(붉은글)암> (또는<6자 단서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5세기까지는 모든 글자들이 다 뚜렷하였는데 20세기 초에는 <남>자와 <석>자 두자만이 보였다고 한다. 옛날에 금강산에 찾아온 양반관리들은 의례히 단서암을 보려고 하였기 때문에 그 시중을 들기 귀찮고 접대비에 시달리던 이 지방 백성들 (또는 고성태수라고도 한다)이 단서암을 돌로 짓조겨 물속에 처박아 넣었다고 한다. 지금은 가을철 물이 적은 때에만 그 글자들을 어렴풋이 볼 수 있다.


단서암 꼭대기에 비석을 세운 흔적이 있는데 이것이 <매향비>터이다.


 


 



댓글목록

솔내님의 댓글

profile_image 솔내
작성일

  언젠가 이 시를 읊조리면서 삼일포 관광을 룰룰랄라....

김발용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발용
작성일

  이러한 번역도 있습니다.
김달진 [金達鎭, 1907.2.4~1989.6.5] 역해(譯解)
 
 刻碑金雋碣古猶多    비에 새기는 일은 옛날에도 많았지만
  蘇食塵侵字轉訛    이끼와 먼지의 침노를 당해 글자 더욱 변하였다.
  爭似指頭千載血    그것들이 어찌 손가락 끝의 천년의 피가
  一淪山石不銷磨    돌에 한 번 배어 다시는 닳아 없어지지 않음만이야 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