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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열전(김방경) 2 -박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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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4-11-02 20:48 조회1,513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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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삼별초와 일본 침략


몽고와 강화는 맺었지만 곧바로 개경 환도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쿠빌라이가 개경 환도 시기를 고려의 편의대로 알아서 할 수 있도록 허락한 데다 김준이 최우의 천도를 높이 평가하면서 권력을 강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씨 정권 몰락 뒤부터 왕권도 점차 회복되기 시작했다. 당시 원종은 태자 시절에 외교 능력을 발휘해 몽고와 강화를 맺었고, 즉위 직후에는 쿠빌라이에게서 고려의 의관과 풍속을 유지할 수 있도록 인정받았다. 그러면서 몽고와의 외교가 왕권의 안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현실을 인식한 원종은 1264년(원종 5) 쿠빌라이의 요구를 받아 친조(親朝)를 행했다. 이러한 원종의 행보는 강화를 추진해왔던 강화파 에게서도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 결과 원종의 왕권은 상당히 신장 되었다.

이 시기에 김방경은 지형부사, 지어사대사를 거치면서 꾸준히 성장해갔다. 1265년 (원종 6) 김방경이 대장군으로서 광평공(廣平公) 순(恂)과 함께 몽고에 사신으로 다녀온 것은 눈여겨 볼만하다. 이 사행(使行)은 원종이 친조했을 때 받은 몽고의 배려에 감사하는 뜻으로 보낸 것으로, 이는 김방경이 강화론을 계속 견지하고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김방경이 항전을 표방한 김준 정권과 일정한 거리를 두었음은 당연했다. 이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상장군에 임명된 김방경이 중방에서 업무 관계로 장교를 매질한 일이 있는데 이것이 반주(班主)인 전빈(田?)의 미움을 샀다. 이에 전빈이 권신, 곧 김준에게 말해 김방경을 남경 수령으로 폄출(貶黜)시켰는데 이는 김방경과 김준 정권의 관계를 잘 말해준다.

하지만 김방경은 남경에 부임한 지 사흘 만에 다시 돌아와 1268년(원종 9) 판예빈성사 북계병마사에 임명되었다. 왜냐하면 당시 서북면은 오랫동안 몽고와 격전한 지역인 관계로 피해가 심각했고 그 결과 고려의 지배력이 취약해 반란이 일어나기 직전이어서 40여 개의 성에서 글을 올려 위도를 개척한 뒤로 서북면에서 인심을 얻고 있던 김방경을 보내 정세를 안정시켜주기를 청했기 때문이었다.

김방경이 서북면에 부임한 직후에 쿠빌라이는 김준과 이장용(李藏用)의 조회를 명령했다. 위기를 느낀 김준은 몽고 사신을 죽이고 깊은 바다로 도망하자고 건의했으나 원종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김준은 원종을 폐위할 생각까지 했다. 이에 원종은 김준과 갈등 관계에 있던 야별초의 지휘관 임연(林衍)의 도움을 받아 환관 강윤소, 최은, 김경 등을 동원하여 김준을 제거했다.

김준을 제거한 뒤 상황은 임연에게 상당히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임연은 야별초를 동원해 김준을 제거하는 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최은, 김경등이 권력을 장악하고 영향력을 확대하자 위기감을 느끼고 이들도 제거했다. 나아가 임연은 그들이 권력을 장악한 것을 원종의 계책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원종을 폐립(廢立)하고 안경공(安慶公)창(?)을 세웠다.

하지만 당시 몽고에 갔던 세자, 곧 충렬왕이 고려로 돌아오다 원종의 폐립 소식을 듣고 다시 몽고로 들어가 몽고군을 파견해줄 것을 요청했다. 임연을 제거하고 원종을 복위시키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몽고는 먼저 사신을 보내 국왕과 세자를 해치는 자가 있으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며 원종을 후원했다. 임연 정권은 위기에 몰렸다.

이러한 임연 정권에 커다란 타격을 입힌 것은 최탄(崔坦), 한신(韓愼) 등이 임연 제거를 명분으로 일으킨 반란이었다. 더구나 최탄 등이 몽고에 투항했으므로 임연의 타격은 더욱 컸다. 이때 몽고는 흑적(黑的)을 보내 원종과 안경공 창, 임연이 함께 조회해 폐립 사건에 대해 밝히라고 명했다, 임연은 원종을 복위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원종은 복위하자 즉시 사신을 보내 조회하겠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1270년(원종 11) 세자가 요청한 몽가독(蒙哥篤)의 몽고군이 서경에 도착했다. 1260년(원종 1)에 철수했던 몽고군이 고려 왕실의 요청으로 10년 만에 다시 고려의 영토로 들어온 것이다. 이는 사병과 삼별초를 장악하고 있던 임연 정권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한 고려 왕실의 어쩔 수 없는 자구책이었다.

그런데 군량미가 문제였다. 원종을 폐립시킨 임연이 고려에 주둔한 몽고군에게 군량미를 제공할 가능성은 없었다. 군량미를 안정적으로 보급하기 위해 임연과 연결되지 않은 믿을 만한 인물이 필요했는데 이는 몽고군이 출발하기 전에 이미 논의되었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서 이장용은 김방경을 추천했다. 김방경은 몽가독의 군대와 대동하면서 그들의 영향력을 가능한 한 줄이기 위해 그들이 대동강을 넘지 못하도록 요청하고 몽고의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서경에 그들의 발을 묶어 두었다. 이를 계기로 김방경은 정치적으로 크게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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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님의 댓글

profile_image 솔내
작성일

  고맙게 읽고 있습니다.
워드치기 고생 많으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