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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군지 제출자료---화산군 연보1 (1-2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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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11-03 09:05 조회1,343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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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집>(김주)

화산군 연보


1세, 임신(壬申) 조선 중종대왕 7년, 명나라 무종(武宗) 정덕(正德) 7년(1512).

? 9월 7일, 서울 집에서 태어나다.



6세, 정축(丁丑), 중종 12년(1517)

? 재주와 성품이 총명하고 뛰어나며 행동거지가 장중하여, 숙부이신 목사공(牧使公 : 公望)이 기특하게 보시고 사랑하여, 크게 될 그릇이라고 여겼다.



8세, 기묘(己卯), 중종 14년(1519)

? 부친 판서공(判書公 : 公亮)주계군(朱溪君) 성광(醒狂) 이심원(李深源) 공의 문인으로서, 장차 사문(師門)에 앙화가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고, 일찍이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하였으나 전시(殿試)를 보지 않았다. 내구(內舅)인 충정공(忠貞公) 허종(許琮) 상공(相公)께서 벼슬에 나아도록 권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남곤(南袞)과 심정(沈貞) 등이 권력을 휘둘러 여러 현인들을 무고하여 죽였다. 매서(妹?)이신 문강공(文剛公) 박세희(朴世熹)도 역시 화를 입었다. 이에 마침내 세상사에 대한 뜻을 끊어버리고 문을 닫아걸고 궤안(?案)을 청소하고 학문을 하였다. 자제나 조카 및 학자 가운데 배움을 청하여 오는 자들이 있으면, 자질에 따라서 가르침을 베풀어서, 종일토록 강독하고 풀이하여, 추위나 더위라고 해서 그만두지를 않았다. 공의 학문과 행실은 대개 이러한 가정(家庭)의 전통에서 얻은 것이다.



10세, 신사(辛巳), 중종 16년(1521)

? 8월, 할머니 정부인(貞夫人) 임씨(任氏)의 상을 당하였다. 이 때 숙부 병사공(兵使公 : 公奭)이 외직으로 나가 보성군(寶城郡)의 군수가 되었는데, 병사공이 정부인을 모시고 그리로 갔었다. 그런데 이 해에 이르러 관아의 집에서 임종을 하신 것이다. 9월에 널을 받들어 여주(驪州) 사동(蛇洞)의 선영(先塋)에 임시로 빈소를 마련하였다가, 다음 해 3월에 할아버지 참판공(參判公 : 城)의 묘 곁에 부장(?葬)을 하였다.


<이암집>(송인), <국조인물고>

김공망 묘갈명(墓碣銘)

처음에 공이 살 집을 지을 때 어머니를 위하여 별도로 북당(北堂)을 지어 봉양(奉養)하는 곳으로 만들려 하였었는데, 공의 형 김공석(金公奭)이 보성 군수(寶城郡守)로 체직(遞職)되어 봉양하다가 떠났으므로, 공이 즉시 청원하여 나주 목사(羅州牧使)가 되어 그 가까움을 기뻐하며 정성을 거의 다하려다가, 수레에서 내리기도 전에 어머니가 병이 들었다는 말을 듣고 지름길로 달려가 모시며 보살피다가 상사(喪事)를 당하였는데, 바로 정덕 신사년(辛巳年 1521년 중종 16년)이었다. 공이 집상(執喪)하면서 예절을 극진히 하였다.



17세, 무자(戊子), 중종 23년(1528)

? 7월, 숙부 목사공(牧使公 : 公望)의 상을 당하였다.



19세, 경인(庚寅), 중종 25년(1530)

? 몸이 장대하고 기력이 보통 사람 이상이었다. 언젠가 손님과 유희를 하면서, 가만히 손님의 옷 뒷 폭을 기둥 아래에 펼쳐 넣었으니, 대개 기둥을 쳐들고서 그 밑에 넣은 것이었다. 손님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이별을 고하고 일어나려 하는데, 뒤쪽에서 잡아당겨 만류하는 것이 있기에 괴이하여 돌아보고는 놀라서 경탄하였다. 공이 웃으면서 다시 기둥을 들어서 옷 뒷 폭을 꺼내었다.

? 봄에 부인(夫人) 이씨(李氏)를 맞았다. 부인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진양군수(鎭陽郡守) 이영(李渶)의 따님이자, 파평부원군 헌의공(獻懿公) 윤금손(尹金孫, 중종반정 정국공신)의 외손이시다. 병자년(1516) 7월 5일에 태어났으니, 방년 15세였다.

      


20세, 신묘(辛卯), 중종 26년(1531)

? 9월에 식년(式年) 진사시(進士試)의 회시(會試)에서 3등으로 합격하였다. 시제(詩題)는 사련(辭輦)이고, 부제(賦題)는 하거읍고(下車泣辜)였다. 예조(禮曹)가 일소(一所)였는데, 상시관(上試官)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한효원(韓效元)이었다. 장악원(掌樂院)은 이소(二所)였는데, 상상시관은 좌찬성(左贊成) 김극성(金克成)이었다. 그런데 종조숙부(從祖叔父) 승지공(承旨公 : 公藝)이 보덕(輔德)으로서 이소(二所)의 참시관(參試官)이었으므로, 일소(一所)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21세, 임진(壬辰), 중종 27년(1532)

? 반궁(泮宮 :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하였다. 기우(器宇 : 도량)가 아주 크고, 희노(喜怒)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문장과 언의(言議)가 사림에서 단연 뛰어났다.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대곡(大谷) 성운(成運),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관물(觀物齋) 민기(閔箕) 등 여러분과 특히 우정이 깊었다. 연방계회축(蓮榜契會軸)이 있다.



22세, 계사(癸巳), 중종 28년(1533)

? 가을에 여주(驪州)로 가서 선영에 성분(成墳)하였다. 이어서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이호촌(梨湖村)에서 배알하니, 모재는 깊이 공경하고 중하게 여겨서, 이별에 즈음하여 눈으로 전송하면서, “이 사람의 문장은 마땅히 괴애(乖崖) 김수온(金守溫)과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사이에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23세, 갑오(甲午). 중종 29년(1534)

? 9월에 종조조부 현령공(縣令公 ; 土遲)의 상(喪)을 만났다.


<모재집>(김안국)

김지 묘갈명

---공(=김지)은 나(=김안국)의 선인(先人, =참봉 金連))과 연배로서 우의(友義)도 두터웠으니 응당히 세의(世誼)가 돈독(敦篤)해야만 할 것이나 나는 조고(早孤)하여 가세(家勢)도 영락(零丁)해졌고 벼슬길로 나가서도 또한 어긋나서 마침내 공의 문(門)에 진배(進拜)하여 통가자제(通家子弟)의 예의도 닦지 못한 것이 항상 한이었는데 지금 승지군(承旨君, =김공예)이 청하는데 졸문(拙文)이라고 해서 사양할 수가 없으므로 행장(來狀)에 의해서 대강 비문을 지었으니 이것으로써 태만한 죄를 사(辭)할까 하나이다.



26세, 정유(丁酉), 중종 32년(1537)

? 5월 28일, 딸(尹氏婦 : 훗날 尹儼의 아내)이 태어났다.

? 12월, 관유(館儒: 성균관 유생) 윤희성(尹希聖)과 이충남(李?南)이 상소하여 기묘 사림의 원한을 풀고자 하여, 공에게 청하여 재중(齋中 : 성균관 기숙사)에서 함께 고하자고 약속하였다. 공은 그 말이 무익하다는 것을 헤아려 알고서, 완곡한 말로 사양하기를, “박세희(朴世熹)와 기준(奇遵) 두 분이 모두 나와 절친한 사람들이니, 말이 내게서 나간다면 누가 다시 믿겠는가? 다만 무익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해가 되기 쉽소.”라고 하였다. 윤희성 공은 그렇지 않다고 여겼다. 상소는 끝내 아무 효과가 없었다. 그 때 문학과 행의(行誼) 때문에 공은 윤희성, 조희윤(趙希尹)과 나란히 이름이 높았다. 사람들이 그 세분을 낙하 삼옥(洛下三玉)이라 일컬었다. 



27세, 무술(戊戌), 중종 33년(1538)

? 숙모 정부인(貞夫人) 이씨(李氏 : 숙부 公奭의 부인 安岳 李氏)의 상을 당하였다.



댓글목록

김용주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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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 감사 함니다.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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