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원공(사형)의 제1차 대마도 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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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4-11-06 11:31 조회1,793회 댓글1건본문
조선 초의 제1차 대마도 정벌
-왜구들의 끊임없는 노략질과 조선의 대마도 정벌 -
조선이 건국 초기부터 유지한 대왜구 유화책은 시간이 갈수록 왜구들의 준동으로 무색해 졌다. 조선이 건국된 이듬해인 1393년의 3월, 고만량(지금의 충남 보령 서쪽 22리 지역)에 일단의 왜구들이 침입하여 대담하게도 조선의 군선 3척을 빼앗아 달아나는 사태가 벌어졌으며 1394년에 다시 경상도와 전라도에 각각 쳐들어 왔다. 조선 조정은 늘어나는 왜구의 침입에 골치를 썩이며, 왜구 격퇴에 애를 쓰고 있었으나 해안지방에 예기치 않게 출몰하는 왜구를 막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1396년(태조 5년) 8월 9일에는 1백 20척의 왜구선단이 경상도의 동래, 기장, 동평성을 함락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뿐만아니라 대담하게도 조선수군의 군선 16척마저 빼앗아 달아나는 등 그 약탈의 수준이 가히 정규전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왜구들은 같은해 8월 18일에 경상도에 다시 쳐들어와 통진포의 군선 9척을 또 빼앗아 갔다. 아마도 왜구들은 아예 조선수군의 군선을 빼앗는 쪽으로 침탈목적을 바꾼 모양이었다.
왜구들은 같은 해 8월 23일에는 영해성을 들이쳤고, 11월에는 모두 5회에 걸친 약탈을 자행했다. 실로 왜구들이 쌀 창고에 드나드는 쥐**들처럼 설쳐 댓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조선 조정은 보다 근본적인 대책을 펼쳐야 한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게 되었다.
조선 조정은 교린정책의 외교노선을 거두어 들이고 마침내 고려 말에 했던 것처럼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치기로 작정한다. 아울러 조선 조정은 다음과 같은 지휘체계로써 마침내 대마도 정벌계획의 수립에 이르렀다.
오도병마도통처치사 문하 우정승 : 김사형
도병마사예문춘추관대학사 : 남제
병마사중추원부사 : 신극공
도체찰사전도관찰사 : 이무
당시 정벌군의 지휘체계와는 별도로 정벌선단의 규모가 어땟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5도의 병선을 모아서" 추진했다는 내용이 눈길을 끌 뿐이다. 고려 말의 박위가 대마도를 칠 때 동원한 선단의 규모가 아니었나 싶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조선의 대마도 정벌계획이 막 추진되던 무렵, 영해의 축산도(丑山島)에 정박중이던 왜구의 배 60여 척이 투항하는 사태가 발생했으며 조선의 강경한 대마도 정벌계획을 감지한 왜구들은 급작스레 그 침략의 발톱을 감추기 시작했다. 조선 조정은 그 같은 왜구들의 투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조선 태조대에 정말 대마도를 정벌했을까?
조선의 남변이 거듭된 왜구의 약탈로 황폐화되자, 마침내 대마도 정벌선단을 구성하고 그 작전에 돌입했다. 그리하여 1396년(태조 5년)의 12월 3일 엄동설한의 날씨 속에서 태조 이성계는 문하 우정승 김사형을 비롯한 정벌선단의 지휘관들을 소집하였다. 이성계의 손에는 군율을 대행케 한다는 의미의 부원(도끼)이 있었고, 부월은 김사형에게 건네졌다. 이어 이성계는 교서를 통해 대마도 정벌의 정당성을 다음과 같이 선포했다.
"내가 즉위한 이래 용병(用兵)하는 도는 한결같이 옛것을 따라서 일찍이 가벼이 처리하지 않음은 백성들이 요동할까 우려했음이었다. 그런데 이제 하찮은 섬오랑캐들이 감히 날뛰어 우리 변방을 침입한 지 서너 차례나 되어 이미 장수와 군사들을 보내 나가서 막도록 했다. 그러나 크게 군사를 일으켜 물길과 뭍으로 함께 공격하여 일거에 섬멸치 않으면 변경이 편안할 때가 없을 것이다.
<중략>
부월을 주어 한가지로 도열시켜 돕게하고 널리 막료를 두어 그 위업을 무겁게 하도록 하노라. 그러므로 제장들은 부복하여 명령을 받들것이요. 도적은 소문만 듣고도 간담이 떨어질 것이로다."
<태조실록 권 18, 태조 4년 윤 9월 초 8일 기사(己巳)>
<후략>
일찍이 왜구토벌의 위업을 남긴 이성계는 분명한 왜구토벌 의지를 만천하에 뚜렷이 밝힌 셈이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정벌선단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혹시 중간에 정벌선단이 뱃머리를 돌리기라도 한 것일까.
여기서 다시 검토해 볼 점은 왜구들의 투항 사례다. 조선의 강력한 토벌책이 현실화되면서 일부의 왜구들이 줄줄이 항복한 점은 아무래도 정벌선단의 토벌실시를 의문 속에 휘말리게 하기에 넉넉하다.
김사형이 이끌었던 정벌선단이 귀환할 때, 태조가 친히 흥인문 밖까지 출영하여 그들의 노고를 위로했다는 점은 우리를 아리송하게 만든다.
<전해종, "15세기 동아정세" "한국사~9집", 국사편찬위원회, 1973, 279쪽>
<이해철, "세종시대의 국토방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4, 재인용>
정벌과정의 노고를 위로했던 것일까.
또한 같은 해 2월 8일에는 의안백화, 좌정승 조준, 봉화백 정도전 등으로 하여금 김사형과 명에 다녀온 사은사 일행에 대해 잔치를 벌이게 조치한 점으로 볼 때 아무래도 태조조에 어떻게든 대마도 정벌이 펼쳐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출전 : 한민족의 대외 정벌기/박선식/청년정신/2004. 6. 2>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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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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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홈에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