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군지 제출자료---화산군 연보3 (36-41세, 1547-155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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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11-09 09:16 조회1,807회 댓글1건본문
36세, 정미(丁未), 명종 2년(1547)
? 2월 25일, 이조정랑(吏曹正郞) 지제교(知製敎) 겸 춘추관편수관(兼春秋?編修官)에 배수되었다.
? 3월 17일, 상감께서 경회루(慶會樓) 아래에 납시어, 전경(專經: 특정한 경전에 전공을 지님) 문신을 강하게 하여 시험하였다. 공과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 송찬(宋贊)은 ?서전(書傳)?에 통(通)을, 수찬(修撰) 윤옥(尹玉)과 한지원(韓智源)은 ?춘추(春秋)?에 통(通)을, 이조좌랑 윤춘년(尹春年)과 홍문관 부수찬 임보신(任輔臣)은 ?시전(詩傳)?에 통을 받았다. 다만 상사(賞賜)를 받을 때 차등이 있었다.
? 7월 5일,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 지제교(知製敎)에 배수되었고, 겸직은 이전대로였다.
? 7월 10일, 삼공(三公)의 뜻으로 아뢰었다. “황해도의 산중 고을에는 작년에 흉년이 심하였으므로 본도(本道)의 감사가 계청(啓請)하여 경창(京倉)의 곡식으로 구황하고자 하여 두 차례나 청하였습니다. -----
? 8월 13일,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에 배수되고, 겸직은 이전대로였다.
? 8월 23일, 삼공(三公)의 뜻으로 아뢰었다. “풍수(風水)의 재변(災變)으로 곡식이 피해를 입었으므로 별시(別試)를 늦추어서 시행하십시오. 평안도는 수재가 매우 참혹하므로, 감사 이준경(李浚慶)을 그대로 유임(留任)시키소서.”라고 하였다. 윤허를 얻었다.
? 9월 9일, 삼공의 뜻으로 아뢰었다. “각도의 재상 어사(災傷御史)가 근간에 떠나려고 하는데, 이러한 흉년에 여러 고을을 추생(抽? : 찌를 뽑음)하면 어사가 오갈 적에 그 폐단이 반드시 많을 것이니, -----
? 10월 18일, 홍문관 부응교(弘文?副應敎)에 배수되었다.
? 11월 16일, 차자(箚子)를 다음과 같이 올렸다. “김승보(金承寶)와 이승호(李承豪)는 여우나 쥐새끼 같은 자질로 -----
? 12월 19일, 차자(箚子)를 올려, 윤원로(尹元老)의 전후 죄악을 바로잡을 것을 청하였다. 세 번째 차자에 이르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37세 무신(戊申), 명종 3년(1548)
? 2월 17일, 홍문관 응교(弘文?應敎)에 배수되었다.
? 3월 6일, 전경문신(專經文臣)의 친시(親試)에 응시하여, 상사(賞賜)를 받았다.
? 다시 홍문관 부응교(弘文?副應敎) 겸 경연시강관(兼經筵侍講官)에 배수되었다.
? 4월 15일, 경기도관찰황어사(京畿道觀察荒御史)에 배수되었다. 명을 받들어, 각 읍 수령이 구황(救荒)을 하는데 근면한지 태만한지를 조사하였다.
? 4월 19일, 차자(箚子)를 올려, 좌의정 이기(李?)를 파직시켜 그가 군주를 기망하고 협박한 죄를 바루도록 청하였다. 네 번의 차자를 올리기까지 하였으나, 모두 윤허받지 못하였다.
? 4월 21일, 글을 써서 다음과 같이 계청하였다. “각 읍의 가을보리는 어느 정도 되기는 하였으나 말라 죽은 것이 많아 부실하고, 봄보리는 전혀 이삭이 나오지 않아 지금 비록 비가 내린다 하더라도 가망이 없습니다. -----
? 4월 29일, 상감께서 조강에 나오시자, 공이 시강관(侍講官)으로서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지난번 대간과 시종이 이기의 공을 앞세워 방자하고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하며 사심(私心)을 채우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죄를 논박함으로써 -----
? 5월 6일,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지제교(知製敎) 겸 경연시강관(兼經筵侍講官)에 배수되었다.
? 5월 11일, 상감께서 조강에 나오시자 공이 아뢰길, 한발의 재해가 너무 가혹하여 기도를 해도 무익하다고 하고, 근일의 효자와 열부는 대개 가짜가 많아 함부로 정려를 세우는 폐단이 있다고 말하였다.
? 6월 2일, 두 번째 아들 후남(厚男)이 태어났다.
? 6월 27일, 아뢰어 논하였다. “대사헌 구수담(具壽聃)은 법관의 장으로 추국에 동참하였는데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형벌을 제대로 부과하지 못했으니 -----
? 6월 29일,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사용(司勇) 임복(林復), 진사(進士) 이운손(李雲孫)은 모두 음흉한 소인들입니다. -----
? 7월 13일, 대사헌 진복창(陳復昌)의 논계(論啓) 때문에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좌천되었다. -----
? 7월 15일, 홍문관부교리(弘文?副校理) 지제교(知製敎) 겸 춘추관편수관( 兼春秋?編修官)에 배수되었다.
? 9월 26일,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 지제교(知製敎)에 배수되었다.
? 10월 6일, 아뢰었다. “내관(內官) 이승호(李承豪)는 죄가 국가에 관계되는데도 정률(正律)로 정죄(定罪)하지 아니하였으니 -----
? 10월 7일, 아뢰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명분(名分)과 과거(科擧)을 중하게 여기므로 서얼(庶孼)이 과거에 응시할 수 없음이 오래되었고 ------
? 11월 21일, 아뢰었다. “김순고는 허풍을 떨고 아는 것이 없어서 가는 곳마다 근신하지 아니하여 지난날 경상 병사로 있을 때에 탐오한 일이 많이 있었는데, ------
? 12월 11일, 공이 아뢰었다. “경흥 한 진(鎭)은 변흔이 이미 드러났는데 만약 문관을 보낸다면 모질고 사나운 무리들이 더욱 가볍게 여기고 멸시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니 -----
? 하서 김인후 공에게 답장한 편지가 있다.
38세, 기유(己酉), 명종 4년(1549)
? 정월 22일, 아뢰었다. “과거(科擧)는 나라의 대사이니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는 것은 가볍게 논의할 수 없습니다. -----
? 2월 4일, 유감(柳堪)과 이원록(李元祿)을 논계(論啓)한 것이 엄준하지 못하다고 하여, (뒤에) 체직되었다. -----
? 2월 28일, 집의 이무강(李無疆)이 아뢰었다. “대간이 된 자는 예사로이 논계할 일이라도 엄명하게 해야 하는 법인데 -----
? 3월 22일, 상감께서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전경 문신(專經文臣)에게 강경(講俓) 시험을 보였다. 좌상 황헌(黃憲)이 아뢰었다. “전경 문신은 출신(出身)한 처음에 가려 뽑아서 오경(五經)을 나누어 맡겨서 한 가지 경을 전공하게 하였던 것인데, 지금 강경에 나온 자가 모두 1∼2권 첫머리에도 생소하여 그 출처(出處)를 모르니, 이는 평상시에 전혀 공부하지 않은 탓입니다. 지금 정사룡(鄭士龍) 남응룡(南應龍) 김주(金澍) 민기(閔箕)는 다 문재(文才)가 있는 사람입니다. 신이 그들 문장(文章)의 높낮음은 잘 알지 못하나 이런 사람들은 쉽게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니 때때로 제술(製述)을 시켜 그것을 바치게 하고 읽은 책을 봄과 여름에 3개월마다 간혹 불러서 강론(講論)하게 하신다면 유익함이 있을 것입니다.”
? 3월 28일, 중훈대부(中訓大夫)에 올라, 행홍문관부응교(行弘文?副應敎) 지제교(知製敎) 겸 경연시강관 승문원교감 교서관교리 춘추관편수관(兼經筵侍講官 承文院校勘 校書?校理 春秋?編修官)에 배수되어, ?인종실록(仁宗實錄)?을 편수하고 아울러 이홍윤(李弘胤) 옥(獄)의 문사낭청(問事郎廳 : 심문관)이 되었다.
? 5월 23일, 가자(加資)하고 상으로 말을 하사하신다는 은명(恩命)을 입었다. 이날 상감께서 정원(政院)에 전교하였다. “-----문사낭청(問事郞廳) 직제학 민기(閔箕), 부응교 김주(金澍)에게는 각각 한 품계씩 가자하고 아마(兒馬) 1필을, -----”
? 전 좌의정 황헌(黃憲)은 탐악하고 비루하며 음험하고 사악한 죄를 저질렀으므로 즉시 찬출(竄黜)하라고 계청하였다. 누차 아뢰었으나, 모두 윤허받지 못하였다.
? 6월 11일,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품하여, 승정원 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 지제교(知製敎)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兼經筵參贊官 春秋?修撰)에 배수되었다.
? 6월 13일, 공이 아뢰었다. “충주(忠州)를 유신(維新)으로 이름 고쳤으므로 발병부(發兵符)도 개조하소서.”
? 8월 25일, 상감께서 정원(政院)에 전교하셨다. “지금 함경도 감사의 장계를 보니 그곳의 풍재와 수재가 팔도(八道)에서 가장 극심함을 알겠다. -----
? 9월 8일, 자전(慈殿)이 정원에 전교하셨다. “선왕(先王)의 능침(陵寢)에 대한 일은, 잡인들이 출입할 염려가 있기에 대내(大內)에서 적간하게 하였는데, -----
? 9월 10일, 어정(御幀)의 일로 어명을 받들어 종부시(宗簿寺)에 전하였다. -----
? 9월 12일, 병조참지(兵曹參知)에 배수되었다.
? 11월 9일, 병사(兵事)에 대해 의논하여 아뢰었다. “돌골(都叱骨)이마거(尼麻車) 등 사성(四姓) 우지개(亐知介)가 병졸을 모아 온성(穩城)의 성저야인들에게 노략질을 자행하였는데, -----
39세, 경술(庚戌), 명종 5년(1550)
? 정월, 예조참의(禮曹參議)에 배수되었다.
? 4월, 이조참의(吏曹參議)에 배수되었다.
? 5월 11일, 좌승지(左承旨) 지제교(知製敎) 겸 경연참찬관(兼經筵參贊官)에 배수되었다.
? 박자열 승간(朴子悅 承侃)이 호남으로 감군(監軍)하러 가는 것을 전송하여 쓴 시가 있다.
? 8월 10일, 위관(委官)의 의견으로 아뢰었다. “이해(李瀣) 등이 끝내 승복하지 않으니 가형(加刑)하게 하소서.”
? 8월 16일, 위관(委官)인 우의정 상진(尙震)의 의견으로 아뢰었다. “죄인들이 승복하지 않으니 형문하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
? 9월 2일, 병으로 출사하지 못하였다. 이때에 형방승지(刑房承旨) 박충원(朴忠元)이 이치(李致)와 동서간이었기 때문에 공이 대신 국문을 행하였으나, 이때에 이르러 병이 났다. 상이 좌부승지 정유길(鄭惟吉)에게 명하여 대신 국문하게 하였다. -----
? 9월 5일, 위관(委官)의 뜻으로 아뢰었다. “이봉춘(李逢春) 등을 각각 1차 형문(刑問)했으나 모두 승복하지 않습니다. 가형(加刑)하게 하소서.” -----
? 9월 26일, 위관(委官) 심연원(沈連源)의 뜻으로 아뢰었다. “정경조(鄭景祚)를 형신(刑訊)하게 하소서. 김석지(金石知)는 미욱한 자인데 -----
? 9월 27일, 위관(심연원)의 뜻으로 아뢰었다. “정경조는 단지 의심만을 가지고 억측하여 고변을 했으니 진실로 우매하고 용렬한 사람입니다. -----
40세, 신해(辛亥), 명종 6년(1551)
? 정월 27일, 어명을 받들어 성균관에 가서 유생(儒生)을 효유(曉諭)하여 성균관에 돌아가 들어가도록 하였다. 유생들이 따르지 않았다. -----
? 2월 12일, 공이 아뢰었다. “신이 명을 받고 성균관에 가서 당장(堂長)과 색장(色掌)을 불러놓고 타일렀더니 ------
? 3월 21일, 상감께서 주강(晝講)에 나가자, 공이 참찬관(參贊官)으로서 입시하였다가,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지금 문묘(文廟)가 오랫동안 비어 있었으니 위안제(慰安祭)를 거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 4월에 남양부사(南陽府使)에 배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다시 좌승지(左承旨)에 배수되고, 겸직은 이전과 같았다.
? 5월 7일, 상감께서 조강(朝講)에 나셨는데, 공이 참찬관으로 입시하였다가 아뢰었다. “지난번에 임권(任權)과 윤개(尹漑)가 경연 석상에서 진달한 바가 있었는데, -----
? 6월 4일, 승정원에 내린 자전(慈殿)의 선온(宣?)을 받들었다. 자전이 하교하기를, “아침에 상품을 내려주고 이제 또 술을 내려주는 것은, 경사가 비상하기 때문에 나의 기뻐하는 뜻을 표시하는 것일 뿐이다.”라고 하셨다. 이때 세자가 병이 났다가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 겸 예문관직제학 상서원정(兼藝文?直提學 尙瑞院正)에 배수되었다.
? 7월 17일, 공이 아뢰었다. “양종의 판사승(判事僧) 보우(普雨)와 수진(守眞)이 사은 숙배를 하기 위하여 궐문(闕門) 밖에 와 있는데 -----
? 7월 21일, 승정원에 내린 선온(宣?)을 받들었다. 어제(御題)의 영칠월편(?七月篇) 배율(排律)과 녹괴문선(綠槐聞蟬 : 푸른 느티나무 아래서 매미 소리를 들으며) 율시(律詩)를 만들어서 올렸다.
? 9월 10일, 공이 아뢰었다. “지난밤에 천둥 번개가 사납게 울려서 소리가 다 그친 뒤에도 신들은 지극히 놀랍고 두려워하였습니다. ------
? 9월 12일, 장예원 판결사(掌隸院判決事)에 배수되었다.
? 9월 15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배수되었다.
? 9월 19일, 상감께서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조정(朝政)을 보았다. 대왕대비(大王大妃)도 수렴(垂簾)하고 함께 정무를 보았다. 공이 진언하였다. “정승 자리가 중요함은 다른 신료들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
? 10월 25일, 대사헌 이명규(李名珪)와 합계(合啓)하였다. “영중추부사 이기(李?)의 죄악이 공론에 뚜렷하게 제기된 지 오래입니다. ------
? 10월 28일, 또 차자(箚子)를 올려 이기(李?)의 일을 논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 11월 2일, 이기(李?)를 찬출(竄黜)할 것을 계청(啓請)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11월 4일, 공이 다시 아뢰었다. “이기(李?)의 죄악은 전하께서 이미 그 실상을 환히 아시거늘, -----
? 11월 7일, 영의정 심연원(沈連源), 좌의정 상진(尙震), 우의정 윤개(尹漑)가 아뢰기를, “이기(李?)의 일은 공론이 이와 같은데 미처 아뢰지 못했으므로 대죄(待罪)합니다.” 하니, -----
? 11월 9일, 아뢰었다. “이무강은 음험하고 악독한 자로 사류(士類)에게 용납되지 못한 지 오래였습니다. 진복창(陳復昌)을 상전같이 섬겨서 발신(發身)하고, 또 이기에게 붙어 그의 주구(走狗)가 되어 -----
? 11월 12일, 공이 유생 조응규(趙應奎)의 일로 아뢰었다. 조응규는 강서사(江西寺) 주지가 무례한 데 격분하여 그를 묶고 조금 때렸을 뿐인데, ------
? 12월 9일, 상께서 양사(兩司)를 명소(命召)하자, 부득이하여 명령에 따라 직에 나아갔다. 또 상차(上箚)하여 말하였다. “우리 유생이 중을 구타한 것은 일시적인 분노에 의한 것인데 ------
? 12월 22일, 아뢰었다. “북도병사(北道兵使) 김순고(金舜皐)와 경흥부사(慶興府使) 김수문(金秀文)이 함부로 축성을 하였습니다. 청컨대 둘 다 추고(推考)하소서.”
? 12월 26일, 아뢰었다. “내관(승전색) 최한형(崔漢亨)이 왕명을 방치한 채 전달하지 않았고, 김연손(金連孫)은 내종친(內宗親)을 모욕하였으므로 그 죄를 다스리소서.”
41세, 임자(壬子), 명종 7년(1552)
? 정월에 연달아 이기(李?)의 일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정월 26일, 아뢰었다. “좌부승지 윤옥(尹玉)이 장단부사(長湍府使) 조안국(趙安國)이 아뢴 말을 비밀에 붙여 발론하지 않았으니 파직하소서. ------
? 2월 5일, 차자(箚子)를 올려, 이기(李?)를 파직시킨 지 한 달도 안 되어 다시 숭반(崇班)에 서용한 것이 불가함과, 승도의 수가 급속이 늘어나는 것을 금지하고 제한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아뢰었다. -----
? 3월 21일, 홍문관 부제학(弘文?副提學) 지제교(知製敎)에 배수되었다.
? 4월 18일, 차자(箚子)를 올려, 이교(異敎)를 금지억제하고 대간(臺諫)을 너그럽게 포용할 것을 청하였다. ------
? 5월 27일, 다시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배수되었다. 공은 일찍이 윤춘년(尹春年)의 방자하고 횡사(橫肆)한 뜻이 누차 언사에 나타나는 것을 미워하였다. 윤춘년은 즉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재종(再從)으로, 윤원형(尹元衡)과는 한 몸이나 다름없는 인물이다. 공은 전에 대사간이었을 때 윤춘년의 뜻을 거스른 일이 있어서 체직되고, 윤춘년이 곧 대사간이 되었다. 이번에는 역시 윤춘년이 대신 부제학이 되었다. 뒤에 대사헌이 되었을 때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러하게 된다.
? 6월 2일, 공이 아뢰었다.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태평하여 변방에 일이 없었으므로 기계(器械)가 갖추어지지 못하여 방비가 허술합니다. -----
? 7월 11일, 차자(箚子)를 올려, 양종(兩宗)을 다시 설치하고 승도에게 도첩을 많이 주는 것이 불가함을 진술하였다. 윤허하지 않았다.
? 8월 8일, 도승(度僧)에 대하여 논계(論啓)하는 일로 대사헌 원계검(元繼儉), 집의(執義) 정준(鄭浚), 장령(掌令) 한옥(韓沃)과 이지신(李之信), 지평(持平) 이언충(李彦忠), 헌납(獻納) 김규(金?), 정언(正言) 이관(李瓘)과 김홍도(金弘度)와 대간청(臺諫廳)에 모였다. 대간청은 정원의 서쪽에 있는데, 나라 풍속에 석전제(釋奠祭)를 지낸 다음날에는 간원(諫院)을 맞아다가 음복(飮福)을 하는 것이 오랜 관례였다. 이 날이 바로 석전제를 지낸 다음날이었는데, 계청할 일 때문에 음복하는 곳에 가지 않고서, 성균관으로 하여금 주찬(酒饌)을 준비해서 보내게 하여 대간청에다 술자리를 벌였다. 당시 대사성은 퇴계 이황이었다. 대간청에서 술자리를 벌여, 여러 신료들이 모두 엉망으로 취해 쓰러져 예의가 없이 난잡하였다. 승지(承旨)가 교명(敎命)을 전할 때에도, 대부분 언어가 제대로 되지 않다. 그런데 공만이 홀로 꿋꿋하여 조금도 문란하지 않았다.
? 8월 10일, 상감께서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자 입시하였다. 대왕대비도 수렴(垂簾)하여 정무를 보았다. 공은 도승(度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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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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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 감사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