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여주군지 제출자료---화산군 연보6 (46-51세, 1557-1562년)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4-11-18 10:13 조회1,813회 댓글0건

본문

 46세 정사, 명종 12년(1557)

? 천마산(天磨山)에 들어가 지족암(知足菴)에 오르고, 이어서 박연(朴淵) 등 여러 승경지를 구경하였다. 박연(朴淵) 및 승려 영수에게 주다(贈僧靈秀) 시가 있다.


47세, 무오, 명종 13년(1558)

? 봄에 (개성부 승제문 밖) 남면(南面) 수우리(修隅里) 다대동(多大洞)으로 진외선조(眞外先祖)이신 전리판서(典理判書) 허금(許錦)의 묘를 성묘하러 갔다. 그 본손이신 백천군수(白川郡守) 초당(草堂) 허엽(許曄)과 그 외손이신 개성부 경력(開城府經歷) 한여철(韓汝哲) 등과 비석을 세우고 묘전(墓田)을 두는 문제를 의논하였다.

? 8월 18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배수되었다.

? 9월,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에 배수되었다.

? 11월 8일, 장예원 판결사(掌隸院判決事)에 배수되었다.

? 11월 21일,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배수되었다.


49세, 경신, 명종 15년(1560)

? 7월 16일, 문장양망(文章養望)으로 선발되어 왕명을 받들어 배율(排律)을 지어 올려 상을 받았다. 문장양망에 선발된 사람은 윤춘년(尹春年) 등 13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오상(吳祥)의 문집인 ?부훤당집(負暄堂集)?에서는 말하길, “문장양망으로서 김 아무개, 정유길(鄭惟吉), 민기(閔箕), 심수경(沈守慶 ), 이량(李樑), 이이(李珥), 임수(林洙) 등 여러 사람들과 함께 선발되어, 팔문장(八文章)이라 불렸다.”라고 하였다.

? 문형(文衡)에 천거되었다. 함께 천거된 사람은 임당 정유길(鄭惟吉)이다. 권점(圈點)은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 인재(忍齋) 홍섬(洪暹) 등 여러분이 하였다.

? 7월 21일, 왕명을 받들어 사정전(思政殿)에 입시하였다. -----

? 9월 19일, 서총대(瑞?臺)에서 곡연(曲宴)을 행할 때 입참하였다. 상이 서총대에서 곡연(曲宴)을 행하여, 어제(御題)로 좌우에게 명하여 율시(律詩)를 지어 올리게 하고,  -----

? 12월 9일, 호조참판(戶曹參判)에 배수되었다.

? 12월 21일, 형조참판(刑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兼同知義禁府事)에  배수되었다.

? 12월 22일, 왕명을 받들어 감옥의 죄수들을 결단하여 놓아주었다. -----


50세, 신유, 명종 16년(1561)

? 4월 19일, 선정전(宣政殿)에 입시하였다. 상감께서 재이(災異)의 일로, 공과 정사룡(鄭士龍), 이명(李蓂), 채세영(蔡世英), 송기수(宋麒壽), 오겸(吳謙), 원계검(元繼儉), 정유길(鄭惟吉), 안위(安瑋), 원혼(元混), 박영준(朴永俊), 임열(任說), 신희복(愼希復), 이우민(李友閔), 기대항(奇大恒), 이중경(李重慶)에게 각각 진언을 하라고 하였다. 

? 7월 13일, 열무정(閱武亭)의 사연(賜宴)에 나아가 참여하였다. 상이 열무정에 나아가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또 유생들에게 제술 시험을 보였다. -----


임꺽정

? 7월 21일,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겸 병마수군절도사(兼兵馬水軍節度使)에 배수되었다.

? 8월 19일, 대궐에 나아가 배사(拜辭)하였다. 상감께서 친히 전교하여, “맡은 바 모든 일은 마음을 다해 처리하라. 또 큰 도적이 법망을 피하여 형벌을 주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 내가 항상 분하게 여기니 특별히 조치하여 기필코 붙잡도록 하라.”라고 하셨다.

? 10월 6일, 공이 치계(馳啓)하였다. “적들이 해주(海州)에서 평산(平山) 지방으로 들어가 대낮에 민가 30여 곳을 불태우고 많은 사람을 살해하였습니다.

승정원이 공의 계본(啓本)으로 입계(入啓)하자, 상감께서 삼공·영부사·병조와 형조의 당상관·포도대장 등을 불러 의논하게 하였다. 이준경(李浚慶)이 경장(京將) 중에서 가려서 보낼 것을 청하고, 남치근(南致勤)을 추천하여 토포사(討捕使)로 삼고, 백유검(白惟儉)을 기복(起復)시켜 순검사(巡檢使)로 삼았다.

? 10월 7일, 도적을 전부 체포하라는 일로 하유(下諭)를 받들어, 마침내 토포사(討捕使) 등과 방략(方略)을 설치하여 도적을 있는 대로 모두 잡아 죽이고 도적의 소굴을 깨끗이 없앨 일을 논하였다.

? 12월 8일, 도내의 전세(田稅)와 요역(?役)을 전부 면제하라는 명령을 받들었다.

? 12월 15일, 전교하시기를, “황해도는 백성들이 매우 곤궁하니 5∼6년 동안 내지 못한 세금을 감면해 주어 소생, 회복하게 하라.”라고 하셨다.

? 순행하다가 연안(延安) 평원당(平遠堂)에 이르러 벽에 송강(松岡) 조사수(趙士秀), 낙촌(駱村) 박충원(朴忠元) 두 공의 시가 있는 것을 보고 감동하여 차운하였다.

? 평산(平山) 화촌(花村)김우순(金遇舜) 집에 이르러 시를 지었는데, 김우순이 그 시를 사랑하여 현판으로 만들었다.



51세, 임술, 명종 17년(1562)

? 정월 17일, 안유(安諭)하고 진정(鎭定)시키라는 왕명을 받았다.

? 3월 초순, 허희(許曦)의 모정(茅亭)으로 가서 목사(牧使) 유승선(柳承善), 도사(都事) 박인원(朴仁元)과 함께 술을 마시면서 꽃을 구경하고 시를 지어 그 놀이를 기념하였다.

? 4월, 송화현(松禾縣)의 조경헌(照鏡軒)에 이르렀다. 그 누헌은 곧 윤철(尹轍)이 고을 수령일 때 축조한 것으로, 판서 김개(金鎧)가 관찰사였을 때 이름 지은 것이다. 시를 지어 그 승경을 서술하였다.

? 5월, 토산(兎山)의 삼성대(三聖臺)에 올랐다.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늙은 용이 머리 쳐들어 강물을 들이마시어

오월에 누에 오르매 삽상함이 가을과 같네.

날개가 어깨 죽지에 나려는 듯, 자주 어깨를 들썩이고

구름 낀 하늘이 닿을까 염려되어 머리를 낮춘다.

긴 하늘은 담담하고 석양은 뉘엿뉘엿 다하였는데

먼데 강물은 넘실대어 외론 섬이 떠 있네.

휘파람 한 소리를 뽑으매 수풀의 나무가 흔들리나니

지팡이 짚고 흥을 타서 창주(滄洲)로 내려가노라.

老龍擡首飮江流 五月登臨爽猶秋(노룡대수음강류 오월등림상유추)

羽翰欲生頻擧腋 雲??觸爲低頭(우한욕생빈거액 운소파촉위저두)

長空淡淡夕陽盡 遠水溶溶孤島浮(장공담담석양진 원수용용고도부)

舒嘯一聲林木動 杖藜乘興下滄洲(서소일성임목동 장려승흥하창주)

? 8월 7일, 체직되었다. 공은 일찍이 해주(海州)의 한 기생을 어여삐 여겼는데, 그 기생은 시를 짓고 노래와 춤을 잘 하였다. 체직되어 돌아올 때 공이 손으로 칠언절구 8수를 채색 병풍에 적어 주었다. 그 기생은 아침저녁으로 그 병풍을 마주하여 마침내 수절하였다. 그 뒤 몇 년 뒤에 공의 외손 이화(李●)가 이 황해도에 관찰사로 왔다가 먼저 그 기생을 방문하였더니, 기생은 과연 흰 머리인 채로 살아 있었다. 그래서 그 외손이 공이 적은 시 병풍을 찾았더니, 기생이 오랫동안 애호하여 자획이 뭉그러진 것이 없었다. 이공이 목판에 모사해 새겨서 영구히 보존할 수 있게 하여, 판목을 공의 본가에 보내어 집에서 보관하였다.

? 10월 20일,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겸 동지춘추관사(兼同知春秋館事)에 배수되었다.

? 11월 10일, 상이 우암공과 우윤 박충원(朴忠元), 동지중추부사 오상(吳祥), 상호군 심수경(沈守慶)을 승정원에 불러, 성천도(成川圖)ㆍ영흥도(永興圖)ㆍ의주도(義州圖)ㆍ영변도(寧邊圖)의 그림 네 벌을 보여주며 각각 한 그림씩 기(記)와 장편시를 지어 올리라고 하였다. 공에게는 성천도를 받도록 하였다. 공은 왕명대로 제작하여 올렸다. 전교하시기를, “이 지은 글을 각각 지도 위에 써서 들이라.”라고 하셨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