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군지 제출자료---모재 김안국(1478-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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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11-11 15:47 조회1,719회 댓글1건본문
<디지털한국학>
김안국(金安國)
1478(성종 9)∼1543(중종 38). 조선시대 문신·학자. 본관은 의성.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
참봉 연(連)의 아들이며, 정국(正國)의 형이다. 조광조(趙光祖)·기준(奇遵) 등과 함께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도학에 통달하여 지치주의(至治主義)사림파의 선도자가 되었다.
1501년(연산군 7) 생진과에 합격, 1503년에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으며, 이어 박사·부수찬·부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507년(중종 2)에는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 지평·장령·예조참의·대사간·공조판서 등을 지냈다.
1517년 경상도관찰사로 파견되어 각 향교에 《소학》을 권하고, 《농서언해 農書諺解》·《잠서언해 蠶書諺解》·《이륜행실도언해 二倫行實圖諺解》·《여씨향약언해 呂氏鄕約諺解》·《정속언해 正俗諺解》 등의 언해서와 《벽온방 #벽17瘟方》·《창진방 瘡疹方》 등을 간행하여 널리 보급하였으며 향약을 시행하도록 하여 교화사업에 힘썼다.
1519년 다시 서울로 올라와 참찬이 되었으나 같은해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서 조광조 일파의 소장파 명신들이 죽음을 당할 때, 겨우 화를 면하고 파직되어 경기도 이천에 내려가서 후진들을 가르치며 한가히 지냈다.
1532년에 다시 등용되어 예조판서·대사헌·병조판서·좌참찬·대제학·찬성·판중추부사·세자이사(世子貳師) 등을 역임하였으며, 1541년 병조판서 때에 천문·역법·병법 등에 관한 서적의 구입을 상소하고, 물이끼〔水苔〕와 닥〔楮〕을 화합시켜 태지(苔紙)를 만들어 왕에게 바치고 이를 권장하였다.
사대부출신 관료로서 성리학적 이념에 의한 통치의 강화에 힘썼으며, 중국문화를 수용, 이해하기 위한 노력에 평생 동안 심혈을 기울였다.
시문으로도 명성이 있었으며 대제학으로 죽은 뒤 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과 이천의 설봉서원(雪峰書院) 및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저서로는 《모재집》·《모재가훈 慕齋家訓》·《동몽선습 童蒙先習》 등이 있고, 편서(編書)로는 《이륜행실도언해》·《성리대전언해 性理大典諺解》·《농서언해》·《잠서언해》·《여씨향약언해》·《정속언해》·《벽온방》·《창진방》 등이 있다.
<이천시지, 2004>
김안국(金安國)
1519년(중종14) 기묘사화가 일어나서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 지도인물들이 대부분 죽음을 당했지만 때마침 전라도 관찰사로 외직에 나가 있었던 탓에 겨우 화를 면하고 파직당했다.
이듬해인 중종15년 이천 주촌(注村-지금의 부발읍 죽당리)에 내려가 작은 정자를 짓고 후진들을 가르쳤다.
역시 기묘사화로 인해 도립리로 낙향한 엄용순(嚴用順)이 지은 육괴정(六傀亭)에 모재를 비롯한 성담령(成聃齡) 강은(姜삼수변隱) 오경(吳慶) 임내신(任내臣) 등 여섯 선비들이 자주 모여 학문을 강론하며 시회(詩會)를 열었으니 사람들이 이들을 괴정육현(槐亭六賢)이라 불렀다.
1528년(중종23년) 여주 이포로 거주지를 옮기기까지 9년간 이천에 살면서 주고받은 많은 시와 문장이 모재집 속에 실려 있고, 이포에 있을 때도 이천을 자주 왕래하였다.
그는 또 유유자적한 생활만 즐기지 않고 향촌의 대소사에는 빠짐없이 참석을 했다고 한다. 직접 농장을 경영하면서 흩어진 이삭들을 손수 줍고, 수확한 곡식들을 저장했다가 보리고개에는 가난한 백성들에게 빌려주기도 했다.
1537년(중종32) 20년간의 은거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벼슬길에 나가 예조판서 대사헌 병조판서 좌참찬 대제학 판중추부사 세자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시문에도 뛰어났고 김인후(金麟厚) 유희춘(柳希春) 등 많은 후학들을 길러 조선시대 성리학 발전에 뚜렷한 공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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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안국은 42세 때인 1519년(중종14) 기묘사화로 조광조 일파가 숙청을 당함에 이르러 관직을 잃게 되자 이천으로 내려와 주질동(注叱洞-지금의 부발읍 줏골)에 은일정(隱逸亭)과 동고정(東皐亭)을 짓고 은거하였다.
이후 1527년(중종22) 겨울 여주의 금사면으로 옮겨갈 때까지 8년 동안 이곳에 머물며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고, 성리학의 보급과 백성들의 교화에 노력하였다. 비록 기묘사화에 따른 어찌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이천에 머물게 되기는 하였지만, 이곳에서 김안국은 관직생활의 분주함 속에 소홀히 하였던 성리학적인 수양에 전념할 수 있었는데,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등과의 교류를 통하여 그 깊이를 더할 수 있었다. 따라서 김안국에게 이천은 그때까지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반성과 정리를 하고, 성리학적인 선비로서 앞으로 어떻게 삶을 영위할 것인가를 설계하면서 자신을 충실하게 채울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인생의 전환기를 보낸 곳이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의미를 갖는다.
또한 문집 11권에는 이천과 직접 관련된 글이 있는데, [애련루기(愛蓮樓記)]와 [이천중수향교기(梨川重修鄕校記)]가 그것이다. 1521년에 지은 [이천중수향교기]는 이천부사 양숙(梁淑)이 1520년에 짓기 시작하여 1521년에 중건한 이천 향교에 대하여 쓴 글이다. -----
1523년에 지은 [애련루기]는 이천부사 이순언(李純彦)이 지은 애련루에 대한 글이다.
● 백사면 육괴정 느티나무
이 느티나무가 위치한 도립리(道立里)의 옛 명칭은 우리말 '도니피'였는데 그 어원은 분명치 않으나 호법면 매곡리(梅谷里) '도니실'의 유래나 괴정육현(槐亭六賢)의 일화에서 보듯 어지러운 세상을 등진 선비들의 은거사실과 연관된 지명으로 추정된다.
조선11대 중종조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난을 피해 낙향한 남당(南塘) 엄용순(嚴用順)이 초가를 짓고 이 초당에 당시의 대학자인 김안국(金安國)을 비롯하여 강은 오경 임내신 성담령 등의 여섯 선비가 자주 모요 시를 읊고 학문을 논하였다. 이들은 우의를 기념하는 뜻에서 정자 주변에 느티나무 여섯 그루를 심었다. 그중 세 그루가 지금까지 살아 있어 고목이 되었고 나머지는 후손들이 다시 심은 것이다. 후세 사람들이 정자를 육괴정(六槐亭)이라 한 것과 여섯 선비를 괴정6현 이라 부르게 된 것이 이 느티나무에서 유래되었다.
● 모재집(慕齋集)
1)서지사항
모재 김안국의 詩文集으로서 15권 7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원래 문인 유희춘(1513-1577)이 간행할 뜻을 세웠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574년 문인 허충길(許忠吉)이 遺稿를 편집하고, 허엽(許曄, 1517-1580)의 교열을 거쳐 간행하였다. 그 뒤 1687년(숙종13) 박세채(朴世采, 1631-1695)의 重刊序를 더하여 김구(金構, 1649-1704)가 용강서원(龍岡書院)에서 重刊하였다. -----
2)문집의 구성
맨 앞에 유희춘의 서와 박세채의 중간서가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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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권에는 김안국의 행장과 제문이 부록으로 실려 있고, 맨 뒤에 허엽의 跋이 있다.
2,000여 수에 가까운 시들은 억지로 감정을 지어내거나, 기교를 부린 것이 아니라, 느낌을 그대로 드러내어 담담하면서도 깊은 맛이 있다. 공부하는 이들을 훈계하는 시가 70수 있는데, 이는 교육에 대한 김안국의 이념과 열성을 잘 보여준다. 또한 일본의 사신과 주고받은 시들이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올 때의 감회를 적은 시 등 외교적인 사안들과 관련된 것들도 많이 보인다. 특히 문장들 가운데에는 일본 및 대마도에 보낸 공식 문서들이 많이 들어 있어 이 분야의 연구에 매우 귀중한 참고자료가 되고 있다.
<디지털한국학>
김인후(金麟厚)
1510(중종 5)~1560(명종 15). 조선 중기의 유학자?문신. 본관은 울산.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 또는 담재(湛齋). 전라도 장성출신. 아버지는 참봉 영(齡)이며, 어머니는 옥천조씨(玉川趙氏)이다.
열살 때 ★김안국(金安國)에게서 《소학》을 배웠고, 1531년에 성균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 ★이황(李滉) 등과 교우가 두터웠다.
<디지털한국학>
퇴계 이황(1501-1571)
28세(1528)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33세에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하고 《심경부주 心經附註》를 입수하여 크게 심취하였다. 이해 귀향도중 ★김안국(金安國)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퇴계학연구 (퇴계정전) 제10집> (1990, 국제퇴계학회 경상북도지부)
-----그 뒤로 16년이 흐른 뒤에 퇴계는 33세의 청년 학자가 되어 고향의 대선배인 충재 권발과 함께 여주의 ♠梨湖村에 은거하고 있던 모재를 다시 찾았다. 이때 충재는 밀양부사로 도임하는 길이고 퇴계는 귀성길이었다.
모재는 이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樓岩이라는 곳까지 마중을 나왔으며 ♠삼수변麗江에서 뱃놀이를 하였다.
<우암집>
○ 22세 1533년 계사
---가을에 여주로 가서 선영에 성분하였다. 이어서 모재 김안국을 梨湖村에서 배알하니, 모재는 깊이 공경하고 중하게 여겨서 이별에 즈음하여 눈으로 전송하면서, "이 사람의 문장은 마땅히 乖崖(괴애)와 人占畢(점필)의 사이에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23세, 갑오(甲午). 중종 29년(1534)
? 9월에 종조조부 현령공(縣令公)의 상(喪)을 만났다. ***김지 묘갈명을 둘째아들 김공예의 부탁으로 김안국이 찬하여 그의 문집 <모재집>에 남기고 있다.
○ 30세 1541년
모재 김안국의 천거로 독서당에 들어갔다. 이황, 김인후, 정유길 등과 교육하였다.
<모재집>(김안국)
김지 묘갈명
---공(=김지)은 나(=김안국)의 선인(先人, =참봉 金連))과 연배로서 우의(友義)도 두터웠으니 응당히 세의(世誼)가 돈독(敦篤)해야만 할 것이나 나는 조고(早孤)하여 가세(家勢)도 영락(零丁)해졌고 벼슬길로 나가서도 또한 어긋나서 마침내 공의 문(門)에 진배(進拜)하여 통가자제(通家子弟)의 예의도 닦지 못한 것이 항상 한이었는데 지금 승지군(承旨君, =김공예)이 청하는데 졸문(拙文)이라고 해서 사양할 수가 없으므로 행장(來狀)에 의해서 대강 비문을 지었으니 이것으로써 태만한 죄를 사(辭)할까 하나이다.
<문중자료>
현령공 김지(1455-1534)
자 차헌(次軒)이며 공은 군수 성의 아우인데, 사헌부감찰 증호조참의 종손의 아들로서 1474(성종5) 갑오에 사마시를 거쳐 그후 루전하여 문의현령을 지냈으며 또한 치적이 높았다. 연로하여 관직을 사퇴하니 특히 통정대부 당상관의 승차의 성은을 받았으며 1534(중종29) 갑오 9월 초9일 향년 80세에 졸하였다.
묘는 오근 양지리 산소동에 있는데 모재 ★김안국은 묘갈을 찬하여 이르기를 "너그럽고 후덕하고 청백하고 검소하여 고을을 다스림에 백성을 잘 보살폈으며 집안에 거처함에 화목을 돈독히 하였고 장수와 강녕을 누렸다." 하였다. <오창지>
<문중자료>
김공예(1485-1537)
일찍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과 양사(사헌부와 사간원), 춘방(세자시강원), 전한, 직제학, 지제교를 역임하고 승정원의 동부승지와 예조참의에 이르렀는데, 청백함으로 스스로 지켰다.
묘갈은 조선 중종34년(1539)에 청원군 오창면 양지리 산소동에 우참찬 成世昌(성세창)이 지은 비문을 홍문관 부수찬 金魯(김로)가 써서 세웠는데 1915에 다시 세웠다.
<문중자료>
김충남(金忠男, 1530∼1618)
김주의 백형 김완(金浣)의 아들인 충남(忠男, 1530∼1618)은 자를 서경(恕卿)이라 하였고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1564년(명종19) 생원시에 합격하여 학행으로 천거를 받아 교관에 올라 토산현감을 역임하였다. 89세로 장수하여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에 올랐으며 호조참판을 증직받았다. 퇴계 이황의 문인록인 [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에 실려 있다. 忠男은 아들이 없어 종조부 공석(公奭)의 손자 수남(壽男)의 아들인 엽(曄)을 양자로 받아들였는데 군위현감과 수직(壽職)으로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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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주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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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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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 감사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