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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군지 제출자료 06---김주(金澍, 1512∼1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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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11-10 15:00 조회1,846회 댓글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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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金澍, 1512∼1563)

 

     조선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 응림(應霖). 호 우암(寓菴). 안렴사공 김사렴(金士廉)의 7대손이며, 안원군 김공량(金公亮)의 세 아들(김완, 김척, 김주) 중 막내아들로 1512년(중종7)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주와 성품이 총명하고 뛰어나며 행동거지가 장중하여 숙부 김공망(金公望)이 기특하게 보고 사랑하여 크게 될 그릇이라고 여겼다. 부친 김공량(金公亮)은 주계군 이심원(李深源)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는데 연산조에 세상사에 대한 뜻을 끊어버리고 은거하여 학문을 하면서 자제와 조카들을 가르쳤다.

     1531년(중종26)에 진사시에 급제하고 1532년 반궁(泮宮 :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기우(器宇 : 도량)가 아주 크고 희노(喜怒)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문장과 언의(言議)가 뛰어났다.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대곡(大谷) 성운(成運),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관물재(觀物齋) 민기(閔箕) 등과 특히 우정이 깊었다. 1533년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을 여주 이호촌(梨湖村)에서 배알하여 가르침과 칭찬을 들었다.

     1539년에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였고, 1541년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의 천거로 한강변(현재의 옥수동) 동호(東湖) 송월암(松月菴) 서쪽 기슭의 독서당(讀書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 관물재(觀物齋) 민기(閔箕), 죽애(竹崖) 임열(任說), 국간(菊磵) 윤현(尹鉉) 등과 함께 남루(南樓)의 왼쪽 구석에 작은 누를 세워서 이름을 문회당(文會堂)이라 하고 수계(修?)하고 강독(講讀)하였다.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1540년부터 수찬, 정언, 1541년 이조좌랑, 1543년 헌납, 부교리, 1544년, 교리, 시강원 문학, 좌문학, 1547년 이조정랑, 의정부 검상, 의정부 사인, 1548년 장령, 부교리, 사간, 1549년 부응교, 우부승지, 병조참지, 1550년 좌승지, 이조 예조 참의 등 육조(六曹)의 낭관(郎官)과 삼사(三司)와 승정원?의정부의 주요직인 청직(淸職)을 두루 거쳤다.

     1551년 도승지, 대사간, 1552년 부제학, 대사간, 한성부 우윤, 성균관 대사성, 1553년 대사헌, 대사성을 거쳐 1554년 이조?호조 참판, 1558년 동지중추부사, 장예원 판결사, 대사성, 1560년 동지중추부사, 1562 한성부 좌윤을 거쳐 1563년 예조 참판, 홍문관 제학에 이르렀다.

     외직으로는 1543년 경기도사와 관북어사, 1548년 경기어사, 1555년 전라도 관찰사, 1556년 개성부 유수, 1561년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는데, 재임시 관내 누정에 제영한 시가 많이 있다.

     1544년 시강관이 된 이후 ?주역(周易)?, ?강목(綱目)?,  ?서전(書傳)? 등을 진강(進講)하였는데, 특히 ?서전(書傳)?에 능통하였다. 후에 여러번 전경문신(專經: 특정한 경전에 전공을 지닌 문신)에 올랐고, 1560년에는 문장양망(文章養望)으로 선발되어 왕명을 받들어 배율(排律)을 지어 올렸으며, 정유길(鄭惟吉), 민기(閔箕), 심수경(沈守慶 ), 이량(李樑), 이이(李珥), 임수(林洙) 등 여러 사람들과 함께 문장양망으로 선발되어 팔문장(八文章)이라 불렸다. 또한 임당 정유길(鄭惟吉)과 함께 문형(文衡)에 천거되기도 하였다. 초서(草書)를 잘 썼으며, 저서로는 <우암유집(寓菴遺集)>이 있다.

     1547년 문정왕후의 오빠인 윤원로(尹元老)의 전후 죄악을 바로잡고자 탄핵하였고, 1548년에는 좌의정 이기(李?)와 그의 일당 대사헌 진복창(陳復昌), 집의 이무강(李無疆) 등과 대립하였다. 일찍부터 윤춘년(尹春年)과 대립하여 여러번 체직되었는데, 윤춘년문정왕후(文定王后)의 재종(再從)으로 당시의 권력자 윤원형(尹元衡)과는 한 몸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승려 무리와 환관을 힘껏 배척하다가 문정왕후의 노여움을 입었고 또 권귀(權貴)로서 세력 있는 무리를 거듭 탄핵하였으므로 여러번 체직되기도 하였다.

     1553년 사은사(謝恩使)로서 명나라 수도에 이르러 옥하관(玉河?)에 머물렀는데, 이때 한 방자(房子)에게 부채의 앞면에다 명(銘)을 써서 주었다. 1555년 을묘왜란이 일어나자 전라관찰사로서 이윤경을 영암 현장으로 파견하는 등 침입한 왜적을 물리쳤다.

     1561년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겸 병마수군절도사(兼兵馬水軍節度使)에 배수되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황해도 일대에 횡행하고 있는 큰 도적(임꺽정)의 무리를 붙잡고자 하였다. 이준경(李浚慶)이 경장(京將) 중에서 가려서 보낼 것을 청하고 남치근(南致勤)을 추천하여 토포사(討捕使)로 삼고 백유검(白惟儉)을 기복(起復)시켜 순검사(巡檢使)로 삼았다.

     1562년 박충원(朴忠元), 오상(吳祥), 심수경(沈守慶)과 함께 승정원에서 성천도(成川圖)ㆍ영흥도(永興圖)ㆍ의주도(義州圖)ㆍ영변도(寧邊圖)의 그림 네 벌에  한 그림씩 기(記)와 장편시를 지어 올렸는데, 김주는 성천도(成川圖)의 기와 시를 지도 위에 써서 올렸다.

     1563년 예조참판(禮曹參判) 겸 홍문관제학(兼弘文館提學)을 거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있을 때 종계변무(宗系辨誣) 겸 진하사(兼進賀使)가 되어 성절사(聖節使) 이우민(李友閔)과 함께 명나라 연경(燕京)에 들어갔다. 이때 이질을 얻었는데 병을 무릅쓰고 일을 완수하였으나, 향년 52세로 관사(館舍)인 옥하관(玉河?)에서 몰하였다. 특별히 자헌대부(資獻大夫) 예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전(田) 30결(結)과 외거 노비(外居奴婢) 5명이 하사되었으며, 1565년 정월에 예장(禮葬)을 내려주어 여주(驪州) 백양동(白壤洞) 선영에 장례를 지냈다.

     1590년(선조23)에 수충익모 광국공신(輸忠翼謨光國功臣) 화산군(花山君)에 책봉되고, 사당에서 신주를 옮기지 말고 늘 제사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선친 김공량(金公亮)에게는 순충적덕 보조공신(純忠積德補祚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안원군(安原君)을 추증하였다. 1790년 문단(文端)이란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우암집>(김주), <퇴계집>(이황)




댓글목록

김용주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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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 감사함니다.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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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여주 자료가 이제 끝나셨나요. 고생하셨습니다.

김태도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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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주회 아재 감사합니다.
많은 문헌자료 발굴,게재. 정말 노고가 많았습니다.

김주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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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여주군지 제출자료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안렴사공파 △김구(김공석 자), 김수남(김공석 손자), △김정남(김주 자), 김희(김주 손자), 김태기(김주 증손), .....
문온공 김구용 (여주 천녕 육우당터, 신륵사)
안정공 김구덕 (묘 : 여주 남면 원승리)
군사공파 김전(묘 : 여주 흥천면 귀백리 백양동, 실전)
기타
 

김발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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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감사합니다. 샘솟는 지식의 원천이 어디인지.... 감탄 또 감탄!!!!!!!
14일 만나서 노하우를 전수 받아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