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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方慶 열전 11 (원종복위와 반역 저지③ : 58-5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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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1-17 07:16 조회1,83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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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월 27일 모임을 대비해서 충렬공 휘방경 할아버지의 행적을 고려사열전을 중심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근거자료는

1300년 이진 찬 [김방경 묘지명]

1350년 안진 발 [김방경 행장]

1392-1454년 김종서, 정인지 등 편수 [고려사 김방경열전]

안동김씨 대동보 (초보 : 1580 경진보)

김방경 연구 석사학위논문 3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 기타 자료를 참고로 하고 있습니다.









金方慶 열전 11 (원종복위와 반역 저지③ : 58-59세)





1269년 (원종10, 58세) 入元하여 원종폐위 표문 바침 (★2차 入元). 동지樞密院사, 御史臺부











⊙ 최탄(崔坦)



생몰년 미상. 고려시대의 역신(逆臣).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의 영리(營吏)로서, 1269년(원종 10)에 임연(林衍)이 왕을 폐하고 안경공 창(安慶公#창18)을 세우자, 한신(韓愼)·이연령(李延齡)·계문비(桂文庇)·현효철(玄孝哲) 등과 모의, 임연을 벤다는 명목으로 난을 일으켰다.



최탄은 용강(龍岡)·함종(咸從)·삼화(三和) 등 제현(諸縣)의 사람을 불러모아 현령 최원(崔元)을 죽이고 가도(#가15島)에 들어가 분사어사(分司御史) 심원준(沈元濬), 감창(監倉) 박수혁(朴守奕) 등을 살해하였다.



이에 강도(江都)에서는 이군백(李君伯)을 북계안무사(北界按撫使)로, 현문혁(玄文革)을 역적방호장군(逆賊防護將軍)에 임명하였으나, 그는 “임금이 없는 지금에 선유사(宜諭使)란 누가 보낸 것이냐.” 하고 항거를 계속하였다.



군사를 이끌고 서경유수 최년(崔年), 판관 유찬(柳粲), 사록(司錄) 조영불(曺英#불18) 등의 수신(守臣)을 죽이니 제성(諸城)의 원리(員吏)들도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에 몽고에 귀부(歸附)하고자 몽고로 향하여 출발하였다. 중도에서 몽사(蒙使) 탈타아(脫朶兒)를 만나 그의 목적이 이루어졌으므로 그의 몽고행은 중지된 듯하다. 그리하여 탈타아를 통하여 서경 이하 북계의 54성과 자비령 이북의 황해도 6성을 들어 몽고에 귀부할 것을 표명하였다.



뒤이어 세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의 일당인 이연령을 탈타아에게 보내어 고려의 경군(京軍)이 침노한다고 하여 2, 000군을 파송해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몽고의 세조는 요양에 주둔하고 있던 망가도(忙哥都)에게 2, 000병을 거느리고 동진할 것을 명하였다.



1270년 정월에 망가도는 고려안무사로서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에 주둔하기에 이르러 최탄의 위세를 일단 뒷받침하여주는 동시에 임연에게 압박을 가하게 되었다.



한편, 몽고에서 최탄의 요청에 의하여 군사를 파송하려 한다는 소식이 몽고에 가고 있던 원종에게 알려지자, 원종은 몽고군이 고려에 다시 들어와 민폐를 끼치게 됨을 먼저 원나라의 중서성에 항의하였으나 큰 실효는 거두지 못하였다.



원나라의 세조는 최탄·이연령에게 금패(金牌)를, 현효철·한신에게는 은패(銀牌)를 주고 자비령으로 경계를 삼아 이북의 지역을 몽고에 내속시켜 동녕부(東寧府)라 하고 최탄으로 하여금 동녕부총관을 삼았다.



그뒤 1275년(충렬왕 1) 원나라에서는 동녕부를 승격하여 동녕로총관부(東寧路總管府)라 하였거니와, 고려에서 자주 동녕부의 환부를 요청한 결과 1290년 세조는 동녕부를 우리에게 환부하였다.



이와같은 최탄의 반민족적 행위 이면에는 자신의 실권을 확고히 하여 서북면일대의 독립정권을 세우려는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高麗時代史(金庠基, 東國文化社, 1961). 〈秦星圭〉









⊙ 한신(韓愼)



?∼1307(충렬왕 33). 고려 원종·충렬왕 때의 부원(附元) 반역자.



서북면병마사영(西北面兵馬使營)의 기관(記官) 출신으로 1269년(원종 10) 집정자 임연(林衍)이 원종을 폐하고 동생 안경공창(安慶公#창18)을 왕으로 세우자 최탄(崔坦) 등과 함께 임연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삼화현(三和縣)의 교위(校尉) 이연령(李延齡), 정원도호부(定遠都護府)의 낭장 계문비(桂文庇), 연주인(延州人) 현효철(玄孝哲) 등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



이들은 용강·함종·삼화 등지의 백성을 모아 먼저 함종현령을 죽이고 밤에 가도(#가15島)에 있는 병마사영을 기습한 다음 북계(北界)지역을 석권하였다.



이듬해 서경을 비롯한 북계 54성과 자비령(慈悲嶺) 이북의 6성을 들어 몽고에 투항하니 몽고가 이곳에 동녕부(東寧府)를 설치하고 천호(千戶)에 임명하였다.



그뒤 동녕부의 총관(摠管)을 지내고 1290년(충렬왕 16) 동녕부가 폐지되면서 몽고의 비호를 받아 대장군이 되고, 같은해 원나라의 반적 합단(哈丹)이 동북변(東北邊)에 침입하자 서경의 군사를 거느리고 방어전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1305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임명되어 왕을 따라 몽고에 들어갔는데 왕유소(王維紹)와 함께 충선왕을 참소하다가 1307년 세자(충선왕)에게 주살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尹龍爀〉









⊙ 임연(林衍)



시대 고려

생몰년 ?-1270(원종11)

본관 진주(鎭州)





시호 장렬(莊烈)

활동분야 권신

다른 이름 임승주(林承柱)





?∼1270(원종 11). 고려의 권신. 본관은 진주(鎭州). 초명은 승주(承柱). 어머니는 진주 주리(州吏)의 딸이다.



일찍이 대장군 송언상(宋彦祥)의 종이 되었다가 뒤에 고향에 돌아가 있었는데, 마침 몽고병이 침입해오자 고향사람들과 힘을 합쳐 이를 물리쳐 그 공으로 대정(隊正)에 임명되었다.



그뒤 김준(金俊)의 신임을 받아 권세를 부리다가 1258년(고종 45)에 유경(柳璥)·김준 등과 공모하여 권신 최의(崔#의26)를 죽이고 정권을 왕실에 복귀시킨 공으로 위사공신(衛社功臣)의 호를 받고 추밀원부사가 되었다.



1268년(원종 9)에 정권을 장악한 김준과 왕의 사이가 벌어진 것을 알고 환자(宦者) 강윤소(康允紹)와 최은(崔$은05)·김경(金鏡)과 함께 김준을 죽이고 그의 여러 아들과 그 무리들을 죽이거나 유배보내었다.



그뒤 김경·최은의 세력이 커지게 되자 이들을 제거하고 어사대부(御史大夫) 장계열(張季烈)과 대장군 기온(奇蘊)을 섬에 유배보내었다.



이때 원나라와 화의가 진전되어 자신의 위치가 불안해지고 또 왕과의 사이도 벌어지자 삼별초와 육번도방(六番都房)을 거느리고 재추(宰樞)와 더불어 왕의 폐립을 논한 뒤 원종 대신 동생 안경공 창(安慶公#창18)을 옹립하고, 자신은 교정별감(敎定別監)이 되었다.



이때 마침 원나라에 갔던 세자가 돌아오다가 압록강에 이르러 이 소식을 듣고 연경으로 돌아가니, 이를 두려워하여 이장용(李藏用)을 절일사(節日使)로 원나라에 보내어 세자를 돌아오게 하였다. 장용이 연경에 이르러 왕의 폐립 전모를 상세히 진술하니, 원나라에서는 병부시랑 흑적(黑的) 등을 보내와 왕을 폐한 사실을 힐문하자 다시 원종을 복위시켰다.



다음해에 왕이 연경에 들어가니 왕의 폐립사실을 누설할까 두려워 아들 유간(惟幹)으로 하여금 호종하게 하였으나, 원제(元帝)가 직접 연경에 들어와서 진상을 해명하라 하였으므로 이를 근심하다가 죽었다.

아들 유무(惟茂)가 청하여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추증하였다. 시호는 장렬(莊烈)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李相瑄〉









<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안경공추대사건 (安慶公推戴事件 )





1269년(원종 10) 임연(林衍)이 원종을 폐하고 원종의 동생 안경공 창(安慶公 銖 )을 옹립한 사건.



임연은 1268년에 무신집정(武臣執政) 김준(金俊)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다음 해 6월에 환관 김경(金鏡)과 최은(崔 字 )을 죽이고 어사대부 장계열(張季烈)과 대장군 기온(奇蘊)을 유배한 뒤 원종을 폐하려 하였다.



이 때 참지정사(參知政事) 유천우(兪千愚)는 몽고에 있는 세자(뒤의 충렬왕)가 귀국할 때까지 거사를 연기할 것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문하시중 이장용(李藏用)이 사태를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원종을 폐위하는 대신 양위(讓位)의 형식을 취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에 따라 임연은 삼별초(三別抄)와 도방(都房)의 군사를 이끌고 백관을 위협하면서 안경공 창을 옹립하였다. 그런 다음 진암궁(辰 茅 宮)에 있던 원종을 핍박해 별궁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뒤 이어 임연이 교정별감(敎定別監)에 올라 무신집정이 되었다.



한편 중서사인(中書舍人) 곽여필(郭如弼)을 몽고에 보내 양위의 사실을 알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몽고에 갔던 세자가 귀국하는 길에 파사부(婆裟府)에서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몽고에 되돌아가 양위의 부당함을 호소하였다. 결국 몽고에서는 양위의 실제를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임연은 그 해 9월에 추밀원부사 김방경(金方慶)과 대장군 최동수(崔東秀)를 몽고에 보내 양위의 사유를 재차 밝혔다.



하지만 몽고에서는 이를 믿지 않고 11월에 병부시랑(兵部侍郎) 흑적(黑的)을 보내 원종과 안경공 창, 임연의 입조(入朝)를 명하였다.



이러한 몽고의 압력에 의해 임연은 원종을 복위시키게 되었고, 안경공 창을 추대하려던 임연의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원종은 몽고에 친조(親朝)해 자신의 폐위가 임연에 의한 것임을 밝히고, 강화도에서 개경 환도를 조건으로 임연을 물리치기 위해 몽고에 군대를 요청하였다.



결국 몽고의 군대를 이끌고 귀국해 출륙령(出陸令)을 반포한 뒤 강화도에 있던 어사중승(御史中丞) 홍문계(洪文系)와 직문하(直門下) 송송례(宋松禮)의 도움을 받아 무신정권을 종식시켰다.





이 사건은 임연의 무신정권과 몽고의 직접적인 대립을 유발시킨 것으로, 무신정권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원종이 복위하는 과정에서 고려 왕실이 몽고에 밀착되면서 무신정권 종식 이후 몽고의 영향력이 절대적으로 커지게 된 사건이었다.



한편 이 사건이 일어난 뒤 서북면(西北面)에서 기관(記官) 최탄(崔坦)과 한신(韓愼) 등이 임연을 제거하자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들도 결국 몽고에 투항했다. 서경(西京 : 평양)에는 동녕부(東寧府)가 설치되고, 자비령(慈悲嶺) 이북이 몽고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 참고문헌 ≫ 高麗史, 高麗史節要, 高麗元宗朝 の 廢立事件 と 蒙古 の 高麗西北面占領(池內宏, 白鳥博士還曆記念東洋史論叢, 1925).











⊙ 충렬왕(忠烈王)



시대 고려

생몰년 1236-1308(고종23-충렬왕34)

본관 개성(開城)





시호 충렬(忠烈)

활동분야 왕

다른 이름 욍거(王#거11)/왕심(王諶)/왕춘(王#춘08)





1236(고종 23)∼1308(충렬왕 34). 고려 제25대왕. 재위 1274∼1308. 본관은 개성(開城). 이름은 거(#거11), 초명은 심(諶)·춘(#춘08).





1. 가계



원종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추밀부사(樞密副使) 김약선(金若先)의 딸 순경태후(順敬太后) 김씨이다. 비는 원세조(元世祖)의 딸 장목왕후(莊穆王后, 齊國大長公主, 몽고명 忽都魯揭里迷失公主), 구비(舊妃)는 시안공 인(始安公絪)의 딸 정화궁주(貞和宮主)와 숙창원비(淑昌院妃) 김씨이다.



1260년(원종 1) 태자에 책봉되고, 1271년 원나라에 가서 세조에게 혼인 허락을 받고, 이듬해 귀국시에 몽고풍속인 변발(辯髮)과 호복(胡服)을 하여 고려인들은 탄식, 우는 자까지 있었다고 한다.







2. 몽고풍의 유행



1274년 5월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하였고, 원종이 죽자 원나라에서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대륙국가와의 왕실혼인은 이번이 처음으로 이로써 고려는 역사의 한 전환기를 맞게 되어, 양국의 우호관계를 공고히 할 수 있었고 역대 권신들의 발호에 억눌려오던 왕실의 지위도 회복, 강화할 수 있었으나 자주성을 잃은 종속국으로 전락하여 이후 원나라의 많은 간섭을 받게 되었다. 결혼한 제국대장공주가 고려에 와서 몽고양식의 생활을 하고 사사로이 부리는 사람도 원나라에서 데려옴으로써 고려왕실에는 몽고의 풍속·언어 등이 퍼지게 되었다.







3. 원나라의 간섭과 왜구의 침입



즉위년 10월 일본정벌이 원세조의 강요로 실행되어 1차로 여원연합군이 합포(合浦)에서 출정, 대마도(對馬島)는 김방경(金方慶)이 이끄는 고려군의 힘으로 무찔렀으나 뜻하지 않은 폭풍을 만나 본토정벌은 실패하였다.



1281년에 감행된 2차정벌도 폭풍을 만나 실패로 끝났다. 원나라는 이후에도 두번 더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정벌준비를 강요하여 피해가 극심하였다.



1293년 왕은 공주와 함께 동정(東征)의 불가함을 직접 호소하고자 원나라로 갔는데 이듬해 원세조의 죽음으로 동정은 그쳤다.



1290년 원나라를 괴롭히던 내안(乃顔)의 여당인 합단(合丹)이 두만강을 건너 쳐들어와 왕은 원나라에 원군파병과 천도할 것을 요청하고 강화로 피란하였다.



이 싸움은 1년반 만에 원병의 협력으로 끝났는데 합단은 교주도(交州道)로 들어와 양근(楊根)·원주를 함락하고 충주를 거쳐 연기에까지 침입하였으며, 이때 원충갑(元沖甲)·한희유(韓希愈) 등의 활약이 컸다.



이밖에도 야인(野人)과 왜구의 잦은 침입이 있었으나 김방경의 활약으로 물리쳐 국운을 보존하였다.



원나라의 압력 밑에서도 국토 보존에 힘을 기울여 최탄(崔坦)이 몽고에 반부함으로써 생긴 동녕로(東寧路)를 원세조에게 직접 환부요청을 하여 1290년 돌려받아 여기에 서경유수관(西京留守官)을 설치하였고, 삼별초(三別抄)의 최후근거지로 몽고에 함락되어 다루가치총관부(達魯花赤總管府)가 설치되었던 탐라를 1294년에 원나라 성종(成宗)에게서 돌려받아 제주라 고치고 목사를 두었다.







4. 원나라의 내정간섭



원나라의 간섭은 직접 행정에도 미쳐 관제(官制)가 참월(僭越)하다고 고치기를 강요하여 1275년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과 상서성(尙書省)을 합쳐 첨의부(僉議府)로, 추밀원(樞密院)은 밀직사(密直司)로, 어사대(御史臺)는 감찰사(監察司)로 고치고 육부(六部)도 폐합, 변경하여 전리사(典理司)·군부사(軍簿司)·판도사(版圖司)·전법사(典法司)로 하였다.



그리고 조(祖)·종(宗) 대신에 왕(王)을 칭하고 충성을 뜻하는 ‘忠’자를 붙이게 되었으며, 선지(宣旨)도 왕지(王旨)로, 짐(朕)은 고(孤)로, 사(赦)는 유(宥)로, 폐하(陛下)는 전하(殿下)로, 태자(太子)는 세자(世子)로 하였다.



또한, 일본정벌을 위하여 일시적으로 설치하였던 정동행성을 그대로 두어 내정을 간섭하는 일까지 있었다. 이밖에 몽고직제의 영향으로 생겨난 관직도 있으니 몽고식 기병이 야간순찰을 돌게 하는 순마소(巡馬所), 매 잡는 것을 임무로 하는 응방(鷹坊), 귀족의 자제로 일찍이 왕을 좇아 원나라에 질자(質子, 禿魯花)가 되었다가 순번제로 숙위(宿衛)의 임무를 맡은 홀지(忽赤, 忽只), 몽고어를 습득하게 하는 통문관(通文官) 등이 있고, 관직은 아니지만 공주를 따라온 겁령구(怯怜口:私屬人) 등이 있었다.



이곳 소속 관원들은 사전(賜田)의 특권을 누리고, 원나라의 세력을 믿고 당대 세력가들로 부상하여 부역에 시달려 도망하는 양민을 모아 농장(農莊)을 경영하고 조세를 가로채고 주현(州縣)의 부세(賦稅)를 좀먹어 양민을 괴롭혔다.



또 특수임무를 띤 별감(別監)이 자주 주현에 파견됨으로써 지방민의 피해가 극심하였다.



특히, 왕 자신이 세자나 공주가 말릴 정도로 사냥을 좋아하여 국고를 고갈시켰고 이로써 매를 관리하는 응방의 적폐는 특히 심하였다.







5. 몰락과정



1298년 왕의 총애를 믿고 세력을 부리던 궁인 무비(無比)가 그 당류와 함께 세자(뒤의 충선왕)에게 주살되자 정치에 염증을 느껴 세자에게 왕위를 넘기고 태상왕(太上王)이 되었고, 원나라에서 부마 상주국 일수왕(駙馬上柱國逸壽王)의 호를 받았다.



이해 8월 충선왕이 왕비 계국대장공주(#계39國大長公主)의 무고로 국인(國印)을 빼앗기고 원나라로 가자 다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후부터는 정사는 돌보지 않고 사냥과 음주가무에만 몰두하였고, 부자간의 이간을 일삼는 왕유소(王惟紹)·송린(宋璘)의 무리에 귀기울여 왕위를 서흥후 전(瑞興侯琠)에게 계승시키고 계국대장공주를 개가시키려는 음모에 동조하여 1305년 이를 성사시키려고 원나라로 직접 가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충선왕이 원나라 무종(武宗)의 옹립에 공이 커 원조정에서 위치가 강대해짐으로써 왕유소 일당은 처형되었고 왕도 귀국하게 되었다. 이후 실권은 세자에게 빼앗기고 1308년에 죽으니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며, 능은 경릉(慶陵:開城 소재)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東國李相國集, 元史. 〈李起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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