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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의 일생과 시대적 배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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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02-01-17 21:10 조회1,65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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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할아버님의 일생은 여러 자료에 의하여 확인 할 수 있으나



그때 당시의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배경과 함께 이해하여야 할 부분이



많은데 이를 잘 알기 어려워서 혼란스러웠습니다.



제가 읽어본 글 중에서 비교적 사회상과 정치상을 잘 표현한 글이



있어서 5회 로 나누어서 옮겨 적습니다.



이글은 [재미있게 간추린 한국인물 탐사기 -2- 고려의 인물 ,고병익, 김상기,



이현희 외 지음]에서 작가 민기 가 쓴 것을 옮긴 것입니다.





국난을 극복한 안사(安社))공신 김 방경(金方慶)

閔幾(原作)

김영환 옮김

[1]무단(武斷)의 압제와 몽고의 말발굽



김 방경(金方慶)은 신라 경순왕의 먼 후손이며, 김 효인(金孝仁)의 아들이다.



김 효인은 성격이 엄하고 강직했으며, 벼슬이 병부상서(兵部尙書)를 거쳐 한림학사



(翰林學士)에 이른 사람이다. 어머니가 그를 잉태했을 때 가끔 안개구름 속에 싸이는



꿈을 꾸어 사람들에게,



"운기(雲氣)가 항상 코와 입에 닿으니, 아들이 반드시 신선 가운데에서 점지해



나오려는 듯하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 방경은 나면서부터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으며 풍절이 늠름하였다.



자랄 때는 할아버지(金敏成)가 주로 보살폈는데 혹 자기 의사를 거슬리는 일이라도



있으면 으레 땅바닥에 뒹굴면서 몸부림쳐 울기 때문에 소나 말이 도리어 무서워하여



김 방경을 피해서 지나갔다 하니 그 성품을 짐작할 만하다.



김 방경이 살았던 시대는 안과 밖으로 몹시 험난하던 때였다. 즉, 그가 태어난 지 일년 후인



1213년 8월에 고종이 즉위하였고, 한편 대륙에는 새로 몽고가 일어나 거란과 대치하였다.



거란족은 그 동안 고려를 무수히 짓밟아왔던 숙적이었다.



이에 따라 고려의 외교노선은 몽고와 거란 사이에서 방황하였으나, 1219년 몽고군이



거란의 모든 거성(據城)을 쳐부수고 마지막으로 강동성으로 이르고자 할 때 고려의



서북면 원수 조 충(趙沖)에게 병량을 요구하였다. 조정에서는 논란을 거듭했지만 조 충은



몽고의 요구에 응하여 정병 1천 명과 쌀 1천 석을 보낸 뒤 강동성으로 몽고군과 합세하여



공격하였다. 적은 성문을 나와 항복하였고, 이로써 고려와 몽고는 협약은 맺었다. 그러나



몽고는 거란 토평(討平)이 고려에게 은혜라도 베푼 것처럼 과중한 공물은 요구하고



사신들 또한 거만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그 후 1225년 몽고의 사신 찰고여(著古與)가 고려로 왔다가 귀국하던 도중에 압록강



근처에서 산적들에게 암살 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몽고의 칭기즈칸(成吉思汗)은



고려 정부에 그 책임을 물었다. 고려에서는 사신의 암살이 강외(江外)의 금나라 사람의



소행이니 책임질 일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고려와 몽고는 국교를 끊기에 이르렀다.



김 방경의 어린 시절에 해당되는 14세기 초엽의 국제정세는 야수와도 같은 몽고인들이



혁명아 칭기즈칸의 말발굽 아래 뭉쳐 세계를 온통 주름잡던 험난한 풍운의 시대였다.



고려의 국내는 또한 무신들의 장기집권이 그 절정에 달하여 있었다. 최충헌의 아들



최 우(崔瑀 ; 나중에 崔怡로 고침)는 자기 집에 정방(政房)을 차려 국정을 자의로 다스리고,



관의 임명출척(任命黜陟)을 제 멋대로 자행하고 있었다. 전 세계에 파급되어 가는 몽고병의



난무질타가 고려라고 보아줄 까닭도 없었다. 그러나 고려의 국내는 무인들의 장기 독재정치로



인하여 피폐할 대로 피폐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향리에서는 농민들이 굶주리다 못해



민란을 일으키고, 문인들은 해좌칠현(海左七賢)과도 같이 세상에 뜻을 잃고 허탈상태에



잠겨 들어갔다.



한편 몽고는 칭기즈칸의 뒤를 이은 오고타이가 1230년 금나라를 친정(親征)하는 것과



아울러 다음해인 1231년 살리타이( 禮塔)에 의하여 드디어 제1차 침공을 감행하였다.



왕은 재상들을 최 우의 집에 모아 삼군을 내어 몽고병을 방어할 대책을 의논했다.



그리하여 대장군 채 송년(蔡松年)을 북계병마사(北界兵馬使)로 삼는 한편 여러 도병을



징집하였는데, 몽고군은 이미 함신진(咸新津;지금의 의주)을 포위하고 철주



(鐵州;지금의 철산)를 함락시켜 물밀 듯이 남으로 내려왔다. 고려군은 구주



(龜州;지금의 龜城)와 서경(西京;지금의 평양) 같은 곳에서 완강히 저항도 해보았지만,



인주(麟州;지금의 의주 부근)의 홍 복원(洪福源)처럼 자진 투항해서 적의 졸개 노릇을



한 자도 있었다.(홍 복원은 그의 아들 홍 다구(洪茶丘)에 이르기까지 조국을 배반하고



몽고에 빌붙어 고려를 계속 괴롭힌 민족의 반역자였다.).



이미 추운 겨울에 겹겹으로 둘려싸인 고려의 수도 개경의 운명은 풍전등화와도 같았다.



김 방경은 이때 스무 살이었다. 그는 몽고 침구 당시에 서북면 병마판관(兵馬判官)에



임명되었다. 김 방경은 그 4년 전 그의 나이 열여섯살 때에 이미 산원 겸 식목록사



(式目錄事)의 일을 도맡아 충과 의로써 바른 말을 잘 하여 시중(侍中) 최 종준



(崔宗峻)까지도 그를 인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몽고의 살리타이는 고려 대장군 채 송년이 거느리는 삼군을 안북부(安北府;지금의



안주)에서 깨뜨려버렸다. 비록 구주성 전투에서 박 서등의 끈질긴 항전이 있었으나,



이미 살리타이 휘하의 세 부대가 개성 선의문(宣義門)밖까지 육박해 와서 고려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마침내 고종은 살리타이가 보낸 권항사(勸降使)를



인견하고, 그들에게 예폐(禮幣)를 후히 주는 한편 왕족 회안공(淮安公) 정(廷)을 보내어



강화케 했다.



이듬해(1232년)고종 19년 봄에야 살리타이는 개경과 여러 주현(州縣)에



다루가치(達魚花赤;점령지역의 민정을 감시라는 두목)72명을



분치(分置)하기로 하고 회군하였다.



곧 이어 몽고는 수달피 1천 벌과 왕자, 왕손, 공주, 큰 벼슬아치의 동남, 동녀 각 500명과



그밖에 공장(工匠)의 송증(送贈)을 촉구해 왔다. 고종은 수달피 97벌을 만들어 바쳤으나



들려오니 고려의 군신은 마침내 몽고에의 배반을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무신집권자 최 이는 몽고의 방어책을 의논한 결과 강화도로 천도할 의견을 내세웠다.



이 제의에 대하여 모두 두려워 발언하는 사람이 없었다. 유독 참지정사(參知政事)



유 승단(兪升旦)만이

"

"강화도로 천도하면 육지의 장정들은 모두 전쟁터에서 희생을 당할 것이고,



노약자는 모두 포로가 되고 말 것이다."



하여 강화천도가 국가의 장계(長計)가 될 수 없음을 말하였다. 또한 야별초 지휘관



김 세충(金世沖)이 회석에 들어와 천도불가론을 주장하였으나, 최 이는 김 세충을



중의(衆議)의 방해자라 하여 참형에 처하고 이어 천도를 결의하여 6월 16일 임시수도를



강도로 옮기고 말았다. 당시 약 10만에 이르던 개경의 민호(民戶)는 강제로 강화도로



옮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강화의 천도가 몽고에 대한 적의의 표시인 만큼 이해 가을 살리타이는 대군을



이끌고 제2차 침공을 감행했다. 수전에 미숙한 몽고군으로서는 천형의 요새지인 강도에



쳐들어가지를 못하였다. 그러나 내륙지방은 적도의 말발굽 아래 짓밟힐 대로 짓밟힘을



당하였다. 강도의 피난 정부는 내륙의 참상에는 아랑 곳 없이 강기슭에 제안(堤岸)을



축조하고, 혹은 중성, 외성을 쌓아 자기네들만의 안정책을 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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