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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빈 김씨와 남양주 운길산 수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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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4-11-11 12:46 조회1,576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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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 :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에 있다. 다산 정약용 생가 앞에서 6번 국도로 나와 가평ㆍ양평 방면으로 2.8km 가면 진중삼거리가 나온다. 진중삼거리에서 왼쪽 45번 국도를 따라 가평 쪽으로 1.8km 가면 길 오른쪽에 수종사 표지판이 서 있고 왼쪽에는 송촌리로 가는 마을길이 나온다. 이 길을 따라 조금 들어가면 다시 두 갈래길로 나뉘고 갈림길에서 오른쪽 산길을 따라 운길산을 오르면 수종사에 닿는다. 수종사 표지판이 있는 송촌리 입구에서 수종사까지는 2.2km이다. 수종사 입구까지 길이 포장되어 있어 승요차로 갈 수 있다. 그러나 주말에는 등산객이 많아 차로 오르기에는 좀 미안하므로 주의해야 한다. 서울 청량리시장 앞에서 능내리와 진중삼거리를 거쳐 양수리로 가는 166번 좌석버스가 약 15분 간격으로 다닌다. 1999년 3월 14일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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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입구까지 차로 올라갈 수 있도록 신작로가 잘 닦여져 있다. 절에 올랐을 때 내려다 보는 전경이 일품이다. 힘들게 계단을 올라갔더니 보람있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2호--팔각오층석탑, 정의옹주 석조부도가 한켠에 새초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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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수리 수종사
    가을이 오매 경치가 구슬퍼지기 수운데
    묵은 밤비가 아침까지 계속되니 물이 언덕을 치네
    하계(下界)에서는 연기와 티끌을 피할 곳이 없건만
    상방(上方, 절) 누각은 하늘과 가지런하네
    흰구름은 자욱한데 뉘게 줄꺼나
    누런 잎이 휘날리니 길이 아득하네
    내 동원(東院)에 가서 참선이야기 하려 하니
    밝은 달밤에 괴이한 새 울게 하지 말아라

   거정이 수종사가 동방사찰 중 제일의 전망이라고 격찬해 마지 않으며 지은 시다. 서거정은 '구설퍼지기 쉬운' 가을비 정경 속 에서 이 시를 지었지만 수종사에서 바라보는 주변 경치는 사철 장관이다. 수종사는 일단 가는 길부터가 산수화같이 아름답고 서정이 물씬하다. 서울에선 불과 백리 길이지만 덕소와 팔당유원지를 거쳐 양수교에 이르는 동안의 시야는 줄곧 한강변의 수려한 경관과 자연의 풍광으로 풍성한 여정을 만끽할 수 있다.

   송촌리 동구 앞에서 북쪽으로 꺾어들어 굽이굽이 가파른 산길을 2km쯤 올라가면 운길산의 품에 안긴 아담하고 소박한 옛절 수종사가 반긴다. 저 아래서 종소리에 이끌린 세조 또한 이 길을 허위허위 올라왔을 것이다.

   광주산맥이 남서로 내려오다가 불쑥 한 번 파도를 치면서 빚어 놓은, 상서로운 기운이 듬뿍 서린 운길산 정상 가까이에 자리잡은 수종사 절마당에 들어서면 일단 전망이 빼어나다. 시선을 멀리 던져 보면 높고 낮은 산봉들이 봉긋봉긋 솟아 있고, 다시 그 앞으로 수굿이 눈길을 떨궈 보면 한강으로 합류하기 직전의 북한강이 장관이다. 드넓은 수면이 바람 따라 꿈틀대며 은빛으로 찬란하고 산그림자는 그대로 맑은 호수면에 잠겨 일렁거린다.

   자칫 해거름이나 새벽녘에 수종사에 올라서는 그 산수화같이 아름답고 절묘한 풍경을 놓치기 쉽상이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강에서 피어오르는 뽀얀 운무가 운길산까지 차올라 세상을 덮기 때문이다. 비로자나삼존불을 모신 대웅보전 꽃창살도 운무에 씻기고 씻겨 그만 하얗게 바랬다. 절 왼쪽으론 등산로가 열려 있으며 전나무, 참나무 등 우거진 밀림도 늠름하다.

   수종사의 창건연대는 확실치 않다. 1939년 경내의 석조부도를 중수하면서 조선 초기 유물이 대거 발견됨에 따라 유물이 조성된 같은 시기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세종21년(1439)에 조성된 듯한, 정의옹주의 부도로 추정되는 석조부도가 그것이지만 절의 내력은 알 길이 없다. 그 뒤 세조 4년(1458)에 왕명으로 크게 중창하면서 비로서 연혁이 새로 성립하게 된다. 세조가 중창불사를 하여 법등을 잇게 된 내력이 재밌다.

   금강산을 순례하고 돌아오던 세조가 마침 양수리쯤에 도착하자 날이 저물어 이 부근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단다. 당시의 사정으론 양수리에서 서울은 꼭 하루가 걸리는 백리 길이었다. 그 저녁 한밤중에 세조는 귀를 의심했다. 지금의 수종사 부근에서 은은한 종소리가 들리는게 아닌가. 기이하게 생각한 세조는 날이 밝자 종소리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종소리가 들리는 곳은 뜻밖에도 바위굴이었고, 굴 속엔 16나한이 앉아 있었다. 종소리로 들렸던 것은 그 굴속으로 물방울이 떨어지면서 암벽을 울려 일어나는 공명(共鳴)이었는데 그리도 청량하고 명징하게 들렸던 것이다.

   세조는 왕명을 내려 그 곳에 절을 짓고 절 이름을 수종사(水鍾寺)라 했다. 현재 약사전 앞에는 아무리 큰 장마와 가뭄에도 물줄기가 마르지 않는 약수가 있어 병자들이 자주 찾곤 하는데, 이곳이 수종사를 중창하게 된 연원의 암굴이었다. 하나 당시의 굴이었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약사전 오른쪽 위에 나한을 모신 나한전만 보전돼 있다. 세조가 돌계단을 쌓아 터를 닦고 굴 속의 16나한을 꺼내 모셨다는 전각이다. 이 때 대웅보전 옆에 8각오층석탑을 세워 절의 품격을 갖춘다.

   1890년(고종27) 풍계 혜일 스님이 고종에게서 8천 냥을 하사받아 폐허가 된 절을 중건하고, 이듬해 4천냥과 금백홍사를 시주받아 사존불을 개금했는데 이 때 방광(放光)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1939년 태욱스님이 중수했으나 한국전쟁 때 전소되는 참화를 겪는다. 지금의 수종사는 1974년부터 중건한 것으로 대웅보전과 나한전 약사전 산신각 경학원과 요사가 있으며, 석조부도와 삼층석탑, 세조의 명으로 중창할 때 세운 팔각오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2호)이 아름다운 자태를 간직하고 있다.

   문화재로는 부도에서 한 조가 되어 나온 청자개부호(청자 사리함), 금동제 구층탑, 은제도금 육각감 등이 보물 제259호로 지정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1957년에 해체한 팔각오층석탑에서 나온 금동불 18구와 금동불감 역시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하고 있으며, 그 밖에 탑의 건립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1493년(성종24)에 쓴 발원문이 있다.

   대웅보전 앞에서 동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소박하고 허름한 불이문이 있는데, 지금은 절 뒤편으로 찻길이 나 있지만 이곳이 본래 수종사에 오르는 길이었다. 불이문 옆에는 키 40여m, 둘레가 7m 이상 되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버티고 서 있어 수종사와 역사를 함께 하고 있는데, 중창을 마친 세조가 기념으로 심었다는 얘기가 전해 온다. 그 전설대로라면 은행나무의 수령은 500년이 훨씬 넘었다는 얘기가 된다.

 팔각오층석탑

   일명 수종사탑, 수종사다보탑으로 유명한 이 탑은 세조가 중창불사를 하면서 조성했다고 전한다. 팔각원당형으로 조성된 아담한 조선시대 탑이다. 지표면을 받친 지대석만 4각이고 그 위로 중대석, 상대석, 몸돌, 지붕돌이 모두 8각을 갖추고 있다. 8각 기단부 면면마다 2구씩의 안상이 새겨져 있고, 기단의 하대석과 상대석에는 단판의 복련과 앙련이 피어 있으며, 그 아래위로 역시 안상을 조각했다.

   탱주 외에 돌아가며 문이 새겨져 있는 8각 몸돌은 위로 올라갈수록 체감률이 심하지만 아담하면서 안정감이 있다. 지붕돌은 낙수면과 전각이 부드럽고 경쾌하게 반전되고 있으며, 지붕돌 안쪽은 수평을 이룬다. 지봉돌의 8각 모서리마다 풍경이 서너 개씩 달려 있었던 듯한데, 지금은 아래층으로 내려오면서 점점 그 수가 줄어들고 있다. 그래도 위로 올라갈수록 풍경이 비교적 풍성하게 매달려 있어서 바람이 불면 청아한 범음(梵音)을 낸다. 상륜부는 훼손 없이 온전하다. 높이 3.3m,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2호이다.

   이 석탑은 그동안 위치를 변경해 모시며 탑을 중수 조사하느라 1957년과 1970년에 걸쳐 두 번 해체 복원했다. 1957년에는 이 탑의 1층 몸돌과 중대석 안에서 3구의 작은 금동불이 모셔진 동제불감과 목제불감, 금동불 보살상 14구(軀)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조사자들을 놀라게 했다. 이 불상들은 한 번에 모셔진 것이 아니라 조선 전기와 후기에 나뉘어 모셔진 것으로 판명되어 그 시대의 불상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귀한 자료가 되고 있다.

   1층 몸돌에서는 조선 초기에 조성된, 본존에 해당하는 금동불좌상과 좌우에 반가사유형의 미륵보살상, 손에 보주를 들고 머리에 두건을 쓴 지장보살상으로 삼존불을 이루고, 바깥에서 여닫는 양쪽 문 안에서 사천왕상이 지키고 있는 동제불감과 3구의 목불상이 안치된 목제불감이 나왔고, 1층 지붕돌과 기단 중대석에서 14구의 금동불 보살상이 한꺼번에 발견된 것이다. 이들 금동불 보살상은 각각 크기도 다르려니와 비로자나불 석가모니불을 비롯해 미륵보살 지장보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자태의 불상과 보살상이다.

   불상을 조성한 솜씨는 섬세하고 뛰어난데, 대체적으로 무릎폭이 좁고 작아진 머리에 상체가 각이 졌으며, 양 어깨를 감싼 옷주름과 팔주름, 몇 번 감은 허리의 매듭 등이 고려시대 불상양식에서 발전된 조선 초기 불상양식의 근거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한편 뾰족한 육계와 머리 정상에 표현된 계주의 모습은 중국 명나라 양식이 반영된 새로운 형식이어서 주목된다. 또한 이 본존불의 복장(腹藏)에 발원문과 함께 "성종 24년(1493) 명빈 김씨가 시주한다"는 뚜렷한 내용의 명문이 새겨져 있었고, 금동비로자나불좌상에는 "인조 6년(1628) 정의대왕대비가 시주한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조선시대의 억불정책 속에서도 왕실의 비빈들에 의해 불사가 성행하고 있었음을 짐작케 했다.

   명문이 새겨진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은 머리와 상체의 크기가 비슷한데다 상체를 뒤로 젖히고 목을 앞으로 내밀어 다소 불안정한 상태의 기묘한 불상이지만,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표정은 친근하고 명랑한 느낌마자 주어 또다른 특색을 이룬다. 이밖에도 1970년 2차 조사 때 발견된 12구의 불상과 함께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에서 출토된 금동불 보살상들은 모두 각기 다른 모습과 특징들을 보여주고 있어 전체적으로 조선시대 불상양식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이때 발견된 금동불감 외벽에 그려진 불화는 아마타여래가 설법할 때의 장면(아미타극락회상도)을 형상화한 것으로 그 솜씨가 매우 뛰어나다. 동판에 붉은 밑바탕칠을 하고 화면 중앙에 삼존좌상과 4보살, 4비구를 묵선으로 그린 다음 채색하였다. 불감 양 옆면에도 마멸은 심하지만 보살도 1구씩이 그려져 있는데, 아직도 적색과 녹색의 채색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비록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고려불화에 유행하던 귀족풍의 장식이 남아 있고, 또한 무엇보다 1493년의 복장에서 발견되었으므로 조성연대가 분명한 왕실발원의 설법도라는 점에서 조선 초기 불교회화사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들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석조부도

   팔각오층석탑과 나란히 서 있는 이 부도는 태종의 다섯번째 딸 정의옹주 부도로 알려져 있다. 높이 238cm에 팔각원당형을 기본구조로 삼은 이 부도는 단조로움을 피하려는 듯 지대석을 4각으로, 몸돌을 원형으로 구성했다. 지대석과 하층기단 옆면에 연꽃무늬를 놓은 것도 각별하고, 상층기단 8각 모서리마다 두꺼비처럼 생긴 동물을 배치한 것도 재미있다. 8각 중대석은 아래위 2단으로 사각형을 구성하고 빈틈없이 조각을 했으며, 둥그런 몸돌에는 구름무늬를 넘치게 새겨넣었다. 두툼한 지붕돌답지 않게 곡선과 반전이 부드럽고, 연꽃과 복발 보주로 장식한 상륜부가 훼손없이 보존돼 있다.

   전통적으로 스님의 유골을 모시기 위해 부도를 조성하거니와 스님의 부도가 아닌 것을 경내에 안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 부도의 지붕돌 옆면에 남아 있는 한 줄의 명문 "태종태후정의옹주사리탑시주○○유씨금성대군정통사년기미십월일"(太宗太后貞懿翁主舍利塔施主○○柳氏錦城大君正統四年己未十月入)으로 1439년(세종21) ○○유씨와 금성대군이 시주해 이 부도를 세웠음을 밝히는 동시에 정의옹주 부도임이 밝혀졌다.

  이 부도는 본래 경내 왼쪽 산비탈에 있던 것을 1939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오면서 해체 중수하게 되었다. 이 때 복장에서 발견된 유물로, 1493년에 조성해 모신 높이 32.2cm, 입지름 26cm의 청자항아리로 된 사리장치가 발견된 것이다. 주름무늬로 우아하게 만들어진 청자사리병은 이른바 오륜탑 형식이라는 보병모양을 하고 있어 주목되었으며, 큼직하게 수놓아진 뚜껑의 당초무늬도 빼어나다. 그 청자사리병 안에서 높이 12.9cm의 금동구층탑과 높이 17.3cm 되는 은제도금육각감이 나왓다.

  은제육각감은 받침에 연꽃무늬를 볼록하게 새기고 몸체는 칠보와 연당초무늬를 뚫어 새겨 매우 화려하고, 3단 6각지붕에 기왓골을 세심하게 나타내고 정상에는 연꽃받침에 보주를 올려놓아 빈틈없이 정교하고 화려하다. 그 은제육각감 안에서 다시 몸체와 뚜껑, 상륜부와 둥근 보주를 장식한 투명한 수정사리함이 나왔고, 수정사리함 안에는 청 백색사리 14알이 들어 있었다. 금동구층탑은 책상다리 모양의 기단부와 금직한 난간을 두른 1층 몸돌 받침, 빗살문으로 조각된 1층 몸돌, 그 위로 지붕의 네 모서리마다 풍경이 달려 있으며, 봉오리를 반쯤 터트린 연꽃이 상륜부를 장식하고 있어 매우 화려하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이들 사리구는 보물 제259호로 지정돼 있다.*

<답사여행의 길잡이 9권, "경기북부와 북한강"편에서 옮김>

<수종사 대웅전>
<수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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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층석탑 및 부도>

 



댓글목록

김상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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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드라마의 배경이 되어 이름을 듣고 두어번 오가다 들려보려 하였으나 운이 없었고,마초와(馬 草아님;우연히) 불상의 시주자를 거슬러 인연을 글로 대하니 그날의 감회가 남다를 수 밖에 없군요.두물머리(남,북한강의 만남) 근처는 언제 지나가던간에 황홀합니다.

김주회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주회
작성일

  또 하나의 답사처 등장!!! 남양주시 조안면 운길산 수종사
정약용 생가, 양평 양서면 목왕리 익원공 묘역과 구정승골과 더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