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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군지 제출자료 08---김희(金熹, 1567~1635), 김태기, 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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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11-14 23:57 조회1,497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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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金熹, 1567~1635)

     1567(선조원년)~1635(인조13). 자 여구(汝懼). 안렴사공 김사렴(金士廉)의 10세손으로 화산군 김주의 손자이다. 1588년(선조21) 생원?진사 양과에 급제하였다. 인의(引儀)를 역임하고 1610년(광해2) 식년시(式年試) 을과4(乙科4)로 문과급제하였다. 형조?이조 좌랑을 거쳐 장흥부사를 역임하여 장흥에 거사비가 세워졌다. 광해주 폐모정론에 불참하여 외직에 출보되었다가 인조 특명으로 승차되어 통훈대부(通訓大夫)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이르렀다. 묘는 여주 흥천면 귀백리 백양동에 있는데, 묘갈은 영상 조현명이 짓고, 제학 조명구가 써서 세운 것이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김태기(金泰基, 1602~1646)

     1602(선조35)~1646(인조2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형숙(亨叔), 호는 무위당(無爲堂). 화산군 김주(金澍)의 증손자이고 장흥부사 김희(金憙)의 아들이다.

     1624년(인조2) 진사(進士)시에 급제하고, 1627년 식년시(式年試) 병과2(丙科2)로 급제하였다. 1638, 1642, 1643년 정언이 되고, 그뒤 양사(兩司)를 거쳐 1645년에 장령을 역임하고 통훈대부(通訓大夫) 종부시정(宗簿寺正)에 이르렀다. 태인현감을 지냈으며, 영광군수로 재직중 죽었다. 청백하였다는 평을 받았다.

묘는 여주 흥천면 귀백리 백양동에 있다. 묘표는 여서 조종저가 짓고, 조상우가 써서 세운 것이다. 손자 김성환이 지은 묘지가 있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仁祖實錄, 英祖實錄>, <國朝榜目>, <南岳集>(趙宗著)

 

<조선왕조실록>

 인조 21년 (1643)

인조 044 21/03/28(신유) / 정언 ★김태기가 병조 참의 민응형을 추고함은 불가하다고 아뢰다

정언 ★김태기(金泰基)가 아뢰기를,

??병조 참의 민응형이 의기롭게 청대하여 숨없이 다 말하였으니 그 충직함을 높이 살 만합니다. 의당 포상하는 은전이 있어야 할 것인데 추고하라는 명이 내리기까지 하였으니, 마음을 비워 받아들이는 성명의 도량에 누가 됨이 과연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홍무적(洪茂績)은 강직으로 자부하는 사람이니 실로 품은 생각이 있으면 마땅히 직접 진달해야 할 것인데 이미 응형과 청대하기로 약속을 해 놓고서 곧바로 어기어 바르지 못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때문에 논핵하여 파직시키자는 뜻으로 동료에게 간통(簡通)하였는데, 두세 번 왕복하여도 동료의 논의가 서로 틀리니, 신의 직을 체차하소서.??

하였는데, 대사간 이후원(李厚源)이 아뢰기를,

??정언 ★김태기가 민응형과 홍무적 등의 일로 쪽지를 보냈으나 신은 응형의 추고가 이미 대사면을 받았고 무적의 일은 자세히 알 수 없으니 더 두고보자는 뜻으로 답해 보냈습니다. 이는 일을 신중히 논의하자는 뜻에 지나지 않는데 ★김태기가 인피하기까지 하였으니 신은 그대로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신의 직을 체차하소서.??

하고, 박서(朴)가 아뢰기를,

??어제 동료가 간통하여 홍무적을 논핵하려고 하는 것을 보고 신은 ??무적에게 참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면 오직 공론에 일임하면 그만이다.??고 말하였습니다. 또 간통을 보고서는 사실 여부가 분명치 않고 동료의 논의가 귀일되지 않았다는 생각에서 더 두고보자는 뜻으로 답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동료가 서로 계속 인피하였으니, 신이 어찌 감히 그들을 처치하겠습니까. 신의 직을 체차하소서.??

하니, 모두에게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헌부가 처치하기를,

??대체로 사람을 논하는 도는 애써 공론을 따라야 합니다. 잘못된 일을 듣고 서로 경계함은 비록 일을 논의하는 모양새라고 하지만 깊이 헤아려보는 것도 또한 신중히 처리하는 뜻이니, 모두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김태기는 체차하라.??

하였다.


인조 23년 (1645)

인조 046 23/03/12(을미) / 장령 ★김태기가 심희세의 추고에 대한 일로 인피하다

장령 ★김태기(金泰基)가, 심희세(沈熙世)가 추고에 대한 함사(緘辭)를 올리지 않은 일로 인피하고, 또 아뢰기를,

??홍호가 대사간에서 체직되자마자 곧 피폐한 고을의 수령직에 제수한 것은 인사 행정의 체통이 전도된 것이므로 논박한 것인데, 정언 홍석기가 ??참으로 또한 이상한 일이다.??는 등의 말로 꾸짖어 배척하였으니,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양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김당(金  , 1645~  )

   통훈대부(通訓大夫) 종부시정(宗簿寺正) 김태기(金泰基)의 아들이다. 1645년생으로 자 성중(聲仲)이며, 1675년(숙종1) 식년(式年) 진사(進士)에 급제하였다. 함양군수(咸陽郡守) 진주진관(晋州鎭管)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를 지내고, 양근군수(楊根郡守) 광주진관(廣州鎭管)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를 역임하였으며,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이르렀다. 묘는 여주 흥천면 귀백리 백양동에 있다.

아들 김성항(金聖沆)은 1674년생으로 자 자진(子眞)이며, 1699(숙종25) 증광(增廣) 진사(進士)에 급제하였고, 아들 김성환(金聖渙)은 1683년생으로 자 자문(子文)이며, 1721년(경종1) 식년(式年) 진사(進士)에 급제하였다.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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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꺼질뻔한 홈에 불을 지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피곤하여 깜빡 잠들었었는데---

김용주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용주
작성일

  대부 자세한 내용 감사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