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금사면 이포, 梨湖, 梨湖村, 樓岩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4-11-20 09:30 조회1,430회 댓글1건본문
<디지털한국학>
김안국(金安國)
1478(성종 9)∼1543(중종 38). 조선시대 문신·학자. 본관은 의성.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
참봉 연(連)의 아들이며, 정국(正國)의 형이다. 조광조(趙光祖)·기준(奇遵) 등과 함께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도학에 통달하여 지치주의(至治主義)사림파의 선도자가 되었다. -----
<이천시지, 2004>
김안국(金安國)
1519년(중종14) 기묘사화가 일어나서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 지도인물들이 대부분 죽음을 당했지만 때마침 전라도 관찰사로 외직에 나가 있었던 탓에 겨우 화를 면하고 파직당했다.
-----
1528년(중종23년) 여주 이포로 거주지를 옮기기까지 9년간 이천에 살면서 주고받은 많은 시와 문장이 모재집 속에 실려 있고, 이포에 있을 때도 이천을 자주 왕래하였다.
-----
이후 1527년(중종22) 겨울 여주의 금사면으로 옮겨갈 때까지 8년 동안 이곳(이천 부발면)에 머물며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고, 성리학의 보급과 백성들의 교화에 노력하였다.
<디지털한국학>
퇴계 이황(1501-1571)
28세(1528)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33세에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하고 《심경부주 心經附註》를 입수하여 크게 심취하였다. 이해 귀향도중 ★김안국(金安國)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퇴계학연구 (퇴계정전) 제10집> (1990, 국제퇴계학회 경상북도지부)
-----그 뒤로 16년이 흐른 뒤에 퇴계는 33세의 청년 학자가 되어 고향의 대선배인 충재 권발과 함께 여주의 梨湖村에 은거하고 있던 모재를 다시 찾았다. 이때 충재는 밀양부사로 도임하는 길이고 퇴계는 귀성길이었다.
모재는 이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樓岩이라는 곳까지 마중을 나왔으며 麗江에서 뱃놀이를 하였다.
<우암집>
○ 22세 1533년 계사
---가을에 여주로 가서 선영에 성분하였다. 이어서 모재 김안국을 梨湖村에서 배알하니, 모재는 깊이 공경하고 중하게 여겨서 이별에 즈음하여 눈으로 전송하면서, "이 사람의 문장은 마땅히 乖崖(괴애) 김수온과 人占畢(점필) 김종직의 사이에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 육우당구기기(六友堂舊基記) 고조고(高祖考) 추술(追述) ▣
-- 선지(先志)를 기술하여 기록하다 --
-----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지금 종형(從兄) 시경(始慶, 1659-1735)씨가 황려(黃驪)에 가서 살면서 우연히 마을 사람과 시사(時事)를 말하게 되었고, 이호(梨湖)에서 한 유지(遺址)를 얻게 되었는데 곧 선조(先祖)께서 선정하여 집을 지었던 곳이다. 지금은 달관(達官) 김모(金某)의 점유가 되었으니 추심(推尋)하여 얻을 수 가 없다. 비록 그러하나 지금 선조께서 노닐던 곳을 분명히 알았으니 그 땅은 마음에서 떠니지 않고 가슴에 차 있을 것이다. 더구나 종형(從兄)이 거주하는 곳과 선조의 고기(古基)가 불과 하루 아침에 다다를 가까운 곳이니, 그 우러르고 탄식하고 또 기뻐하고 느끼는 것이 다른 고을에 견줄 바가 아니다. 아, 지난날 나의 소유(所有)였던 것이 지금은 타인의 소유가 되었으니 오늘 타인의 소유가 후세에 우리집 물건이 되지 않을지 어찌 알겠는가. 무릇 우리 동종(同宗)은 나의 말을 잊지말고 후일을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
댓글목록
김용주님의 댓글
![]() |
김용주 |
---|---|
작성일 |
지금막 여주군 향토사료관 구본영 팀장과 통화 하여습니다.
이천시지 금사면 이포리 와 강촌면 이호리 중 모재 선생님 거쳐지을 물었는데 확인 하여 답주겠다고 하고.
분재기. 김영후 선조님의 가게도을 알려 달라고 부탁 하였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