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의 병법---손자병법(孫子兵法), 사기(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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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11-20 23:15 조회1,739회 댓글0건본문
충렬공께서는
16세 1227년 출사한 이래 30세 1231년 몽고군의 침입이래 평안도 정주 위도에서의 간척 수리사업 전개, 1232년부터 (1259년)1270년까지 강화도에서의 대몽항쟁 수행, 1270-1273년 4년간의 전라도 전주 나주, 진도, 제주도에서의 삼별초 진압, 63세 1274년과 70세 1281년의 두차례 거의 10년에 걸친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을 수행하셨습니다. 그야말로 사직과 백성의 기둥이셨으며, 난세의 영웅이셨고, 강직하신 무인 중의 무인이었습니다.
▶▶▶충렬공께서는 병법(兵法)에도 뛰어나셨을 텐데, 병법 책은 어느 책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 고려사104 열전17 (김방경 열전)
(1274년 일본원정시)
김방경이 홀돈(忽敦)·홍다구(洪茶丘)에게 말하기를, “병법(兵法)에 1,000리(里)에 현군(縣軍) 하면 그 칼날을 가히 당치 못한다 하였는데 우리 군사가 비록 적으나 이미 적경(敵境)에 들어와서 사람마다 스스로 싸우고자 하니 즉 맹명(盟明)이 배를 태우고 회음(淮陰)이 물을 등짐이라 다시 싸우기를 청한다.” 하매
홀돈이 말하기를, “병법(兵法)에 ‘소적(小敵)이 견수(堅守)하면 대적(大敵)에게 사로잡힌다.’고 하였으니 피핍(疲乏)한 군사를 채찍질하여 날로 불어나는 무리를 당적함은 완전한 계책이 아니니 회군(回軍)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였다.
■ 고려사절요
방경이 홀돈ㆍ다구에게 말하기를, “우리 군사가 비록 적기는 하지만 이미 적의 땅에 들어와 사람들 스스로 힘을 다하여 싸우니, 이것이 곧 맹명(孟明)이 배를 불태우고 (주D-001) 회음후(淮陰侯)가 배수진을 친 격 (주D-02) 이다.” 하며 다시 결전하기를 청하였는데,
홀돈이 말하기를, “수가 적은 편이 힘을 헤아리지 않고 나가 싸우면 수가 많은 편에게 사로잡힌다 하였는데, 피로한 군사를 몰아 많은 적과 싸우는 것은 완전한 계책이 아니다.”고 하였다.
유복형이 날아온 화살에 맞아 먼저 배로 올라갔기 때문에 드디어 군사를 이끌고 배로 돌아왔다. 마침 그날 밤에 크게 바람불고 비가 와 바위와 벼랑에 전함이 부딪쳐 많이 부서지고 김신은 물에 빠져 죽었다.
[주 D-001] 맹명(孟明)이 배를 불태우고 : 진(秦) 나라 장수 맹명(孟明) 이 진(晉) 을 치러 갈 때에, 황하를 건너고 나서 타고 간 배를 불에 태웠는데, 이것은 싸움에 이기지 못하면 돌아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주 D-02] 회음후(淮陰侯)가 배수진을 친 격 : 회음후(淮陰侯) 는 한(漢) 나라 장수 한신(韓信) 인데, 조(趙) 나라와 싸울 때에 강물을 뒤에 두고 진을 쳐서 이겼다. 부하 장수들이 묻기를, "병법(兵法) 에 산과 언덕을 뒤로 하고 앞에는 물을 두고 진을 친다고 하는데, 이번에 물을 등지고 진을 쳐서 이긴 것은 무슨 까 닭입니까?" 하니, 한신이 답하기를, "너희들은 본래부터 나의 심복이 아니니, 장꾼을 불러모아 싸움을 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물을 앞에 두고 진을 치면 너희들이 모두 뒤로 도망갈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 월간조선 2004년 1월호
몽골군이 돌연 하카타灣으로부터 사라진 까닭
10월20일 밤, 연합군은 勝勢에도 불구하고 陸上 교두보에서 野營하지 않고 상륙정 拔都魯輕疾舟를 타고 하카타灣에 떠 있던 군함 千料舟로 물러났다. 육지에서 宿營하지 않았던 것은 일본군이 장기로 삼는 夜襲(야습)을 두려워한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귀함 후 연합군 수뇌부는 전투를 계속할 것인가의 여부를 논의하기 위한 作戰會議(작전회의)를 열었다. 「東國通鑑(동국통감)」과 「高麗史節要(고려사절요)」는 이 논의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忽敦(홀돈=흔도)가 말하기를 『우리 軍勢는 전투엔 習熟(습숙)하고 있지만, 종일 싸워서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날이 저물어 무기를 거두었다. 내일도 또 전투를 할 것인가』라고 했다.
★金方慶이 말하기를, 『우리 兵들이 이미 敵陣에 침입해서 잘 싸우고 있어 「지금부터 一步」라는 상황에 있다. 옛날 秦(진)의 명장 孟明(맹명)은 (상륙 후에) 스스로 (타고 온) 배를 불태웠고, 漢의 淮陰侯 韓信(회음후 한신)은 背水陣(배수진)으로 싸워 승리를 쟁취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이 故事에 따라 決戰을 해야 할 것 아닌가』라고 했다.
이에 忽敦이 말하기를, 疲兵(피병: 피로한 병사)을 가지고 大敵과 싸우더라도 完勝을 얻지 못할 것이니 물러서는 것이 좋다』고 했다 >
高麗의 사령관 ★金方慶은 하카타 교두보에서 野營한 뒤 다음날 일본군과 決戰을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 데 대해 총사령관 ♥都와 右副元首(우부원수) 洪茶丘는 이 이상 싸워도 결정적인 승리를 얻어지지 않을 것이니 만큼 철병해야 할 것이라고 거부했던 것이다.
손자병법(孫子兵法)
중국 고대 군사학 명저이며 현존하는 중국 최고(最古)의 병서(兵書).
〈손자 孫子〉·〈오손자병법 吳孫子兵法〉·〈손무병법 孫武兵法〉 등으로도 불린다. 춘추시대말 손무(孫武)가 지었다. 〈한서 漢書〉 예문지(藝文志)에는 82편, 도록 9권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 남아 있는 송본(宋本)에는 계(計)·작전(作戰)·모공(謨攻)·형(形)·세(勢)·허실(虛實)·군쟁(軍爭)·구변(九變)·행군(行軍)·지형(地形)·구지(九地)·화공(火攻)·용간(用間) 등의 13편만이 전해진다. 1972년 산둥 성[山東省] 린이 현[臨沂縣] 인췌 산[銀雀山]에 있는 전한시대 묘에서 죽간(竹簡)으로 된 〈손자병법〉 13편이 출토되었는데 기본적으로 당시 동행되던 송본과 같다. 그밖에 오문(吳問)·황제벌적제(黃帝伐赤帝) 등의 중요한 유실문이 있다. 이 책은 춘추 말기의 군사학설 및 전쟁경험을 모두 묶은 책이다. 그 가운데 "적을 알고 나를 알면 100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知彼知己百戰不殆), 우세한 병력의 집중, 민첩한 기동작전 등의 수많은 기본원칙은 세계 각국 군사가들의 높은 평판을 얻었다. 조조(曹操)를 포함한 11명이 주를 달았으며, 영어·일어·프랑스어·독일어·체크어·러시아어·한국어 등으로 번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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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吳子)》와 병칭(倂稱)되는 병법 칠서(七書) 중에서 가장 뛰어난 병서로 흔히 《손오병법(孫吳兵法)》이라고 한다. 저자는 춘추시대 오나라 합려(闔閭)를 섬기던 명장 손무(孫武:BC 6세기경)이며, 그가 바로 손자라고 하나, 일설에는 손무의 후손으로 전국시대 진(晋)에서 벼슬한 손빈(孫)이라고도 한다. 《사기(史記)》에는 손자 13편이라 하였으나 그 편목은 알 수 없으며,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는 오손자병법 82편이라 하여 <병서략(兵書略)> 첫머리에 기재하고 주(注)에는 그림 9권이 있었다고 하였다. 현재 전해지는 것은 13편으로 이것은 당초의 것이 아니고, 삼국시대 위(魏)의 조조(曹操)가 82편 중에서 번잡한 것은 삭제하고 정수(精粹)만을 추려 13편 2책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13편의 편명은 계(計) ·작전(作戰) ·모공(謀攻) ·군형(軍形) ·병세(兵勢) ·허실(虛實) ·군쟁(軍爭) ·구변(九變) ·행군(行軍) ·지형(地形) ·구지(九地) ·화공(火攻) ·용간(用間)으로 되어 있으며, “병(兵)은 국가의 대사(大事), 사생(死生)의 땅, 존망(存亡)의 길”이라는 입장에서 국책(國策)의 결정, 장군의 선임을 비롯하여 작전 ·전투 전반에 걸쳐 격조 높은 문장으로 간결하게 요점을 설명하고 있다. 그 뜻하는 바는 항상 주동적 위치를 점하여 싸우지 않고 승리하는 것을 주로 하고, 또 사상적인 뒷받침도 설하고 있어 병서로서는 모순을 느낄 만큼 비호전적(非好戰的)인 것이 특징이다.
예로부터 작전의 성전(聖典)으로서 많은 무장들에게 존중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경영의 요지와 인사의 성패 등에도 비범한 견해를 보이고 있어 인생문제 전반에 적용되는 지혜의 글이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예로부터 많은 무신들이 이를 지침으로 삼았고, 조선시대에는 역관초시(譯官初試)의 교재로 삼기도 하였다. “남을 알고 자신을 알면 백번 싸워 백번 이긴다”는 명구도 담고 있으며, 《손자병법》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인용 번역되고 있다.
손무(孫武)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전략가. 본명 손무(孫武). 러안[樂安:山東省] 출생. 제(齊)나라 사람. BC 6세기경 오(吳)나라의 왕 합려(闔閭)를 섬겨 절제·규율 있는 육군을 조직하게 하였다고 하며, 초(楚)·제(齊)·진(晋) 등의 나라를 굴복시켜 합려로 하여금 패자(覇者)가 되게 하였다고 한다.
그가 저술하였다는(그의 후손 孫의 저술이라고도 함) 병서(兵書) 《손자(孫子)》는 단순한 국지적인 전투의 작전서가 아니라 국가경영의 요지(要旨), 승패의 기미(機微), 인사의 성패(成敗) 등에 이르는 내용을 다룬 책이다. 그는 "싸우지 아니하고도 남의 군사를 굴복시키는 것은 착한 자의 으뜸이니라"라고 가르치고 있다.
사기 (史記)
중국 전한(前漢)의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의 저서. 상고의 황제(黃帝)로부터 전한의 무제(武帝)까지 2천 수백 년에 걸친 통사이며, 역대왕조 편년사인 본기 12권, 연표 10권, 부문별 문화사 8권, 열국사인 세가(世家) 30권과 개인전기집인 열전 7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친 사마담(司馬談)의 유언을 받아 BC 104년 전후부터 편찬에 착수했다. 중도에 이릉(李陵)의 사건에 연루되어 궁형(宮刑)을 받았지만 그 굴욕을 극복하며 집필을 계속해 BC 91년 무렵 초고를 완성했다. 그때까지 중국에는 유교의 경전으로 중시한 《상서(尙書)》 《춘추》 《시전》 《주역》 《예기(禮記)》 및 춘추에서 전국시대에 걸친 사상가의 저작인 《제자백가(諸子百家)》가 있었다. 어느 것이나 전문학자들이 전승하고 해설해 왔으나 고대에서 한나라까지의 통일된 역사서는 없었다. 사마천은 서로 대립하는 학자적 입장을 떠나 고래의 전적(典籍)을 충분히 이용해 첨가하고, 궁정에 보관된 남은 풍부한 사료와 넓은 견문을 바탕으로 본기·표·서·세가·열전 등 독특한 형식으로 종합적인 기술을 하는데 성공했다. 사마천은 중국 최초의 역사학자이고 또한 대표적인 중국역사가이다. 특히 그가 창시한 본기·열전 등과 같이 성질이 서로 다른 역사기술방법을 병용한 종합사형식을 기전체(紀傳體)라 한다. 이는 반고(班固)가 쓴 《한서(漢書)》에 이어 이후 왕조의 관선정사(官選正史)의 표준이 되었다. 송(宋)나라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의해 완성된 편년체와 함께 기전체는 중국 역사기술의 기본 형식이다.
사마천 (司馬遷 ?∼?)
중국 전한시대(前漢時代) 역사학자. 자는 자장(子長)·태자공(太子公). 산시성[陝西省] 샤양[夏陽] 출생. 출생 연대는 BC 145년 또는 BC 135년이라는 두 설이 있고, 사망 연대는 미상이다. 어렸을 때부터 고문(古文)으로 쓰여진 전적(典籍)을 배웠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적을 탐방하여 견문을 넓혔다.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은 무제(武帝)가 거행한 태산(泰山)에서의 봉선의식(封禪儀式)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받지 못해 괴롭게 여기다가 분사하였는데, 죽기 전에 고대로부터 당시까지의 역사를 저작할 것을 사마천에게 부탁하였다. BC 108년 아버지에 이어 태사령에 임명된 사마천은 먼저 역법개정에 종사하여 BC 104년 태초력(太初曆)을 완성하자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통사(通史) 편찬에 착수하였다. BC 99년 한(漢)나라 장군 이릉(李陵)이 흉노와 싸우다가 패하여 포로가 된 사건이 생겼다. 이릉의 처분을 결정하는 자리에서 일가 멸족의 의견이 대다수를 차지했으나 사마천 혼자만 이릉의 충절과 용감함을 칭찬하고 변호했으므로 무제의 격분을 사서 궁형(宮刑)에 처해졌다. 몇 년 후 출옥하여 중서령(中書令) 직책으로 복귀하였다. 그 뒤 정신적 타격에도 꺾이지 않고 용기를 내어 통사 저작에 전력을 기울여 마침내 《사기(史記)》 130권을 완성하였다. 그가 《사기》를 저술한 직접적인 동기는 아버지의 유언에 의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분사와 이릉사건을 통해 인간의 운명에 대한 큰 의문을 품게 된 사마천은, 사실의 정확한 검토를 통하여 인간의 종합적 가치를 결정하고 인과관계의 불합리성을 하늘(天) 대신 수정하는 일에서 역사학이 지니는 특별한 의미를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사기열전(史記列傳) 회음후편(淮陰侯(韓信)列傳
다다익선 (多多益善) ...많을 다(多),많을 다(多),더할 익(益),좋을 선(善)
많으면 많을수록 더 좋다는 뜻으로 우리가 흔히 많이 쓰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이로울 익(益)"은 더한다는 뜻으로,"착할 선(善)"은 좋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다다익변(多多益辯)]으로도 쓰이며 《사기》"회음후열전"에 나오는 말입니다.
...한의 고조인 유방이 천하를 통일한 후인 어느날 유방은 회음후(淮陰候) 한신(韓信)과 여러 장수의 능력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고 합니다. 유방이 먼저 이렇게 물었다지요.
..."나는 도대체 어느 정도의 군사를 거느릴 수 있겠는가..??"
...그러자 한신은,"글쎄요,폐하께서는 기껏해야 10만 정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말을 들은 유방이 다시 "그럼 귀공은 어떠한가..??"라고 물었지요.
...그러자 한신은,"신은 다다익선(多多益善)으로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말을 들은 유방이 껄껄대고 웃으면서 (혹시 자신의 불쾌함을 감추는 웃음은 아닌지..??) 다다익선이라며 어찌하여 자신에게 잡혀있느냐고 물었지요.
...그러자 한신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폐하는 병의 장수로는 능하지가 못하나 장수들은 잘 거느리십니다. 이것이 제가 폐하께 잡혀 있는 이유이지요. 그리고 폐하의 힘은 소위 하늘이 주신 것으로 인력(人力)이 미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음,마지막 말은 혹시 자신의 무뢰함을 무마하려는 아첨..?? 하지만 유방은 이일이 있은 후로부터 한신을 의심하게 됩니다. 자신보다 뛰어나다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으나 설마 그렇게까지 여기고 있는 줄은 몰랐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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