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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의 일생과 시대적 배경-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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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02-01-21 19:38 조회1,62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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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의 일생과 시대적 배경 -3-





[3]조국은 어디로 가고 있나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고려의 전후 복구사업은 너무도 엄청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몽고도 30년 동안에 걸친 고려의 강인한 항쟁에 감복되어 회유정책을 폄으로써 그 해 가을



몽고군을 철수시켰다. 그리하여 1264년 원종은 다시 몽고에 갔다 왔으며, 그 동안 고려는



복구사업에 총력을 기울였으니 몽고 또한 고려에 대하여 지나친 요구는 해오지 않았다.



김 방경은 원종이 즉위한 뒤에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에 승진되었고, 1263년에는



진도(珍島)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치고 상장군이 되었다. 그러다가 그는 모함을 받아



남경 유수(男京留守)로 좌천되었는데, 일찍이 몽고 침입시 서북 병마판관으로 선정을



베푼 일이 계기가 되어 서북 여러 성(城)에서 진정이 들어와 곧 이어 서북 병마사로



승진되어 부임하였다.



김 방경은 1265년 광평공(廣平公) 순(恂)을 모시고 사은사(謝恩使)로 몽고에 갔다 왔는데,



비교적 후대를 받았으므로 강도의 군사들도 안심하였다. 김 방경은 이후 조정에 들어가



형부상서, 추밀원부사를 지냈다. 이때 조정에는 김 준이 다시 권력을 장악하여 무신집권



때와 마찬가지로 강경론을 펴고 있었고. 노련한 이 장용은 화친론을 전개하여 은연중에



알력이 노정되고 있었다. 그러나 강경론이나 화친론은 전화에 시달린 고려로서는 당연히



있을 수 있는 두 가지 방향의 정책대결 이었을 것이다. 다만 몽고의 탄압이 비교적 완강하지



않다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는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1266년 몽고 쿠빌라이의 사자인 흑적(黑的)과 은홍(恩弘)이 가지고 온 조유(詔諭)는



고려를 다시 암운에 떨게 하였다.



몽고는 흑적과 은홍을 국신사(國信使)와 부사로 삼아 일본에 보내고자 하니, 고려가 그 향도



구실을 해야 한다는 엄청난 명령이었다. 이는 몽고가 섬나라 일본까지 정복하려는 침략의



야욕을 드러낸 것이었다. 고려로서는 그 전쟁의 뒷감당을 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몽고 사신 흑적, 은홍을 일본에 보내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고려의 이 장용은 일부러



그들을 거제도 앞바다로 보내어 풍도(風濤)가 거센 것을 보게 하고는 되돌아서게 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해 8월 흑적 등을 다시 일본과의 통호(通好)의 교섭을 고려가 책임지고 맡아야



한다는 조서를 가지고 왔다. 이에 고려는 9월 반부(潘阜)에게 몽고서 및 국서를 가지고



일본으로 떠나게 하는 한편 안경공 창을 몽고에 파견했으나 면책만 당하고 맥없이 돌아왔다.



다음해인 1268년 5월 이장용이 몽고로 들어가서 전해 온 소식은 엄청난 것이었다.



몽고는 일본을 칠 터이니 고려가 배 1천 척과 전쟁수행에 따르는 물자를 공급하라는



요구였다. 고려로서는 이 요구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해 11월 몽고의 흑적, 은홍 등이 다시 고려로 들어와 고려의 반부, 진자후를 향도롤 삼아



일본에 들어가게 되었다. 고려는 몽고의 일본 정벌을 앞에 두고 점점 괴로운 입장으로



빠져들어갔다. 이들이 일본으로 들어갔을 때 일본 조야는 발칵 뒤집혀 의논한 결과 사신들에게



아무런 확약도 내리지 않았으니, 그들은 1269년 소득 없이 일본으로부터 되돌아오고 말았다.



이와 같이 어려운 고려의 정국은 또 한번의 권력투쟁으로 하여 홍역을 겪게 되었으니,



이해 6원 김 준 대신 실권을 장악한 무신 임 연(林衍)이 삼별초와 육번도방( 番都房)을



모아 쿠테타를 일으켜 왕 원종을 폐하고 안경공 창을 세웠다. 원종은 별궁에 유폐되었고,



고려는 다시 무신집권 당시와 마찬가지로 살벌한 공포정치의 분위기로 화해 버리고 말았다.



고려로서는 몽고에 화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려다가 다시 항몽의 태도로 돌변하였으니,



역사의 파국으로 뒷걸음질하는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몽고 쿠빌라이는 원종이 폐립된 것을 알게 되자 이 기회에 고려를 다시 징벌하여 철저한



간섭을 시도하려고 했다. 마침 원에 들어가 있던 김 방경은 2천의 군사와 원의 장수



맹격도(孟格圖)와 함께 동경[東京:랴오양(遙陽)]으로 출동하였다. 또한 사신(흑적)등을



파견하여 신랄하게 원종 폐립사건을 추궁하였다.



이와 같이 국내 고려인의 반발과 몽고의 위협적인 탄압으로 원종은 다시 복위되었다.



즉, 그 해 11월 23일 원의 흑적 등의 권고와 이 장용의 수습으로 폐위되었던 원종은 반년이



채 못되어 왕권을 다시 되찾은 것이다



이로써 임 연 등 무신집권 당시의 골수분자들이 일으킨 폐립사태는 수습되었지만,



고려의 양분된 국론과 파국적인 현실은 그렇데 쉽사리 안정될 수가 없었다.



복위된 원종으로서는 우선 몽고에 무마책을 펴서 일본 원정이 따르는 고려로서의 부담을



면해 보는 일이 급선무였다. 이에 원종은 복위한 나흘 뒤인 11월 27일 이 장용을 몽고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고려의 현실은 더욱 암담했으니, 이 장용이 강도를 떠난 직후 최 탄(崔坦)의



반역소식이 전해졌다. 최 탄은 서북면 병마사의 기관(記官)으로 있던 자였는데, 임 연을



징토한다는 명분 아래 서북 각지의 수령을 죽인 뒤 몽고에 내응함으로써 일시에 50여 성의



서북지방이 몽고 영토처럼 되어버리고 말았으니, 몽고는 서경을 동녕부(東寧府)라 개칭하고



최 탄을 동녕부총관으로 삼았다.



이에 원종은 겹친 내우외환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직접 몽고로 들어가 협상해 보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여 약 20일 뒤인 12월 19일 일행 700여명을 거느리고 길을 떠났다.



이들은 섣달 그믐 박주(博州;지금의 박천)에 다다랐다,

.

이날 원종은 동경에 가 있는 김 방경. 이 장용으로부터 사자(使者)를 만났다.



최 탄의 반역으로 서북지방을 몽고의 영토로 삼은 몽고는 3천 명의 군사를 서경에 파견하려



하고 있으니 이를 저지할 군사를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원종은 여행중에 새해를



맞이하여(1270),1월 1일 저녘 동경에서부터 영접나온 김 방경과 이 장용은 왕을 모시고



함께 행차코자 했으나 이는 몽고측에 의하여 제지되었다.



이와 같은 원종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왕이 연경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몽고군은



몽구토를 대장으로 출동명령을 내리고 말았다. 따라서 원종은 출륙환도(出陸還都)등을



몽고에게 약속하고 되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한편 동경에 남아 있던 김 방경은 몽구토의 군사가 동경을 출발할 때 그들과 함께



고려로 돌아왔다. 김 방경은 몽구토와 함께 머물러 서경에 있었다. 김 방경으로서는



몽고 군사가 더 이상 남하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몽구토군의 남하는



고려를 더욱 혼란으로 몰아넣을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다음에 4편이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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