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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方慶 열전-13 (연해 주현과 진도의 삼별초 토벌② : 59-6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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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1-22 01:32 조회1,75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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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휘方慶 할아버지의 행적을 고려사열전을 중심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근거자료는

1300년 이진 찬 [김방경 묘지명]

1350년 안진 발 [김방경 행장]

1392-1454년 김종서, 정인지 등 편수 [고려사 김방경열전]

안동김씨 대동보 (초보 : 1580 경진보)

김방경 연구 석사학위논문 3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 기타 자료를 참고로 하고 있습니다.









金方慶 열전-13 (연해 주현과 진도의 삼별초 토벌② : 59-61세)





1270년 (원종11, 59세) 逆賊追討使, 홍친 홍기의 무고로 (★2번째 무고) 삭탈관작되었다가 다시 上將軍이 됨



1271∼1272년 (원종12∼13, 60∼61세) 진도 삼별초 공격 및 평정, 그 공으로 中書侍郞 平章事,

<묘지명> 金紫光祿大夫 수대위 平章事 판리부사 대자대보로 배명, 얼마후에 門下侍郞 平章事 배명.











▣ 김방경연구 (이상철, 1986, 청주대)



한편 김방경은 삼별초 토벌과정에서 크게 성장하였다. 두 번째로 몽고에 갔던 원종이 임연을 제거하기 위해 군사를 청하고 출륙환도를 약속한 후에 몽고 군사와 함께 귀국길에 올랐을 때 (원종11년 1270 2월) 임연은 몽고와 싸워 대결할 결의를 굳히다 등창이 나서 죽고 아들 임유무가 아버지의 직을 이었다. <고려사 세가 권26 원종11년 2월 乙未조>



이때 귀국중에 있던 원종은 사람을 보내 문무 양반으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개경으로 돌아오도록 명을 내리었다. 그러나 임유무는 환도하면 권력을 잃게될 것이 두려워 왕명에 항거하여 몽고와 대전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고려사 세가 권26 원종11년 5월 庚戌조>



그러나 강도를 둘러싼 국내외의 정세는 이미 기울었고, 몽고의 군대도 벌써 개경과 서경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항전에 대한 고려의 국론도 분열되어 있었으므로 무인이 계속 정권을 장악하기는 어려운 상태였다. 이러는 가운데 임유무는 홍문계, 송공례 등에게 죽임을 당하고 100년만에 무인 정치는 끝나고 말았다. <고려사 세가 권26 원종11년 5월 癸丑조>





이에 강도에서는 재추회의를 열고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의논하고 날자를 정하여 발표하였다. 조정에서 출륙환도를 결의하자 삼별초는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반정부 반몽고의 기치를 높이 내걸고 일제히 봉기하였다. <고려사 세가 권26 원종11년 6월 乙巳조>







삼별초는 대몽항전의 전 시기를 통하여 무인정권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었다. 삼별초는 본래 정부 군대였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권신의 사병 구실도 하였다. 또 삼별초는 고려의 국방력을 대표하여 몽고와 항전에서도 매우 중요한 활약을 하였다.



삼별초가 국왕과 몽고에 반대하여 환도에 응하지 않고 무력봉기를 감행한 행동의 저변에는 몽고에 대한 증오와 적의의 감정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삼별초는 국왕과 무인들의 대립관계에 있어서 국왕측과는 반목하는 위치에 있었다. 또 삼별초의 봉기의 궁극적 목적은 몽고에 대한 고려의 종속화를 막자는데 있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7, p383-384, 탐구당>



그러나 임유무가 제거됨으로써 무신정권이 붕괴되고 고려조정은 개경으로 환도하게 되었다. 이로써 고려와 몽고와의 오랜 투쟁은 청산되고 새로운 양상의 대원관계가 전개되었다.







이때 여기에 대한 저항으로 등장한 삼별초를 김방경은 고려 대표로 몽고와 함께 토벌하여 큰 공을 세우게 되었다. <이 무렵 삼별초의 세력은 매우 강성하여 국내인심에 끼친 영향이 매우 컸으니 <고려사절요> 권18 원종11년 9월조에 ---- 이라 하여 바람따라 적에게 항복하는 현상을 이루었으며, 또 김상기 <삼별초와 그의 난에 취하여(완)> 진단학보 제13권 p45에 승화후를 진왕으로 생각하여 알현하는 경우도 있었다>



김방경이 흔도 등과 함께 원종12년 (1271) 5월 진도의 삼별초를 토벌하고 돌아와자 수태위 중서시랑 평장사를 가하였다. <고려사 세가 권27 원종12년 11월 丙戌조>







1. 삼별초와 김방경



원종11년 (1270) 고려 조정에서 출륙환도를 결의하자 배중손 등은 6월에 승화후 온을 왕으로 삼아 개경정부와 다른 새로운 정부를 세워 삼별초를 거느리고 반정부, 반몽고의 기치를 높이 내걸고 봉기하였다. <고려사 세가 권26 원종11년 6월 乙巳조, 승화후 온의 계보는 김상기, 삼별초와 그의 난에 취하야(완), 진단학보 제13권 1941, p77참조>



그러나 강도는 육지와 指呼의 거리에 있으므로 (수전에 능숙하지 못한 몽고와는 40년 가까이 대항할 수 있었으나) 원종이 몽고와 결탁한 이상 다시 이곳을 근거로 하기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삼별초는 강도를 버리고 남방 해상에 근거지를 구하기 위하여 남하하였다.



그러나 삼별초가 진도에 들어간 것은 원종11년 8월 병술이었으니 <고려사 세가 권26 원종11년 6월 辛未조, 동년 8우러 丙戌조> 삼별초가 바로 진도로 향한 것이 아니라 서해 일대의 도서를 거쳐 남하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남하하는 삼별초를 토벌하기 위하여 김방경을 역적추토사로 삼아 <고려사 세가 권26 우너종11년 6월 辛巳조> 몽고군과 함께 해상으로 추격케 하였으니 김방경전에



----- 방경에게 명하여 군사 60여인을 거느리고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라고 한 것을 보면 큰 성과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진도로 들어간 삼별초는 용장성을 쌓고 일대 해상 왕국을 건설하였으며, 육지에서의 활동도 활발하여 장흥을 비롯하여 합포(마산), 금주(김해), 동래 등은 물론 나주, 전주에까지 진공하였다. <김상기, 삼별초와 그의 난에 취하야(완), 긴단학보 제13권, 1941, p44-45>



이렇게 삼별초가 진도에 있으면서 육지의 주군을 침략하자 전라도 토적사 신사전, 전주부사 이빈이 도망하였기 때문에 이들을 모두 파면하고 <고려사 세가 권26 원종11년 9월 乙亥조, 김방경 전에는 전부부사 이빈> 그 대신 김방경을 전라도 토적사로 삼아 몽고 원수 아해와 함께 진도를 토벌하게 함으로써 <고려사 세갸 권26 원종11년 9월 甲辰조> 이때부터 김방경이 총사의 격으로 몽고군과 같이 진도 토벌을 담당하게 되었다.





김방경이 아해와 더불어 삼견원에 주둔하고 진도에 대하여 포진하니 김방경전에



"방경이 아해와 더불어 (생 fir)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고 하였다. 이로써 삼별초의 해상세력과 작전이 연합군을 압도하고 있었으며, 또 연합군 측에서 실패를 거듭하여 시일만 끌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김방경까지도 삼별초와 내통하였다는 무고로 잡아 가두게 되었던 것이다. <고려사절요 권18 원종11년 11월조>



날로 강성하여 가는 삼별초를 앞에 두고 군의 중심인물인 김방경을 파면하게 된 것은 개경정부의 큰 손실이었다. 그후 홍찬 등의 무고인 것이 밝혀짐에 원종은 달로화적에게 청하여 김방경에게 上將軍의 직을 주어 다시 삼별초를 토벌하게 하였다. <고려사절요 권18 원종11년 윤11월조>







김방경이 다시 진용을 정비하여 12월에 <고려사 세가 권26 원종11년 12월 丁巳조> 진도를 향하여 추격케 되었으니 그때의 전황을 김방경전에 보면



방경이 진도에 이르니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라고 하였다. 삼별초의 전투력은 매우 우세하여 아해가 겁을 내어 싸우려 하지 않자 김방경이 홀로 적중으로 돌입하여 싸웠으나 큰 곤경에 빠졌었다. 아해의 이러한 소극적 태도로 연합군측의 군세는 더욱 떨치지 못하고 시일만 끌게 됨으로









원종12년(1271) 정월에 아해는 드디어 몽고로 소환되고 3월에 흔도를 보내어 아해를 대신하였다. <고려사 세가 권27 원종12년 3월 丙寅조> 그리하여 여몽연합군은 동년 5월 진도를 총공격하게 되었으니 전부터 진도 대안에 삼별초와 대치하고 있던 김방경, 흔도 등은 고려의 증발군을 인솔하고 남하한 홍다구를 기다려 5월 15일에 진도 총공격을 실시하였다. <고려사 세가 권27 원종12년 5월 丁丑조>



김방경이 몽장 흔도 등과 좌, 우, 중 3군으로 나누어 세 방면으로 공격하여 적을 분산시키니, 삼별초는 연합군의 중군을 대항하고자 벽파정에 모였다. 이때 좌익인 홍다구 등이 측면에서 공격하니 삼별초가 무너졌다.



삼별초는 그동안 관군과 싸워 여러차례 승리를 거듭한 결과 관군을 가볍게 여기는 마음이 생겨 방비시설을 소홀히 하였을 때 연합군의 총 공격을 받아 패배하고 나머지 무리는 탐라로 들어가게 되었다.



삼별초를 격파한 김방경은 남녀 만 여인과 전함 수십척, 쌀 4천석 등을 거두어 개경으로 실어 보냈다.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 김방경 연구 (윤애옥, 1992, 성신여대)



원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복위한 원종은 몽고로 가서 태자와 몽고 공주와의 혼인을 제의하였고, 또한 권신을 제거하고 구경으로 환도하는데 필요한 몽고군의 원조를 요청하였다. 원은 혼사문제는 뒤로 미루었지만 조병은 즉시 허락하였다.



원은 원종이 귀국할 때 이미 서경에 군대가 주둔해 있었지만, 별도로 원종을 호송할 군대를 같이 보냈다. 이에 왕은 먼저 사람을 보내 강도의 신료들에게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명하고 또한 몽고의 유력자가 상당한 군사력을 가지고 자신을 호위하고 있음을 밝히게 하였다.



왕의 환도명령에 접한 강도에서는 논의가 분분했지만 왕명을 따라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었다.. 이는 왕을 호위하는 몽고의 유력자와 군대의 존재가 이 사태에 몽고가 깊숙이 개입했음을 뜻하는 것으로 이것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민현구, 몽고군 김방경 삼별초, 한국사시민강좌 제8집 1991>









그동안 불안감 속에서 항전태세를 견지하던 임연이 등창으로 사망하고, 아들 임유무가 그 지위를 계승하였다. 임유무는 개경환도의 결정에 당황해 하면서 삼별초를 움직여 각 지역마다 入保하도록 항전 준비를 갖추었다.



이때 왕의 밀명을 받은 홍문계가 임유무를 제거하니, 약 100년간의 무인집권시대가 끝나고 동시에 개경환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삼별초는 출륙을 거부하였다. 삼별초가 출륙환도를 거부하자 원종은 정자흥을 강화에 보내 회유해 보았지만 듣지 않자 단호한 조처를 취하여 원종11년 (1270) 5월 장군 김지저를 강화에 보내 삼별초를 혁파하고 그 명부를 압수하게 하니, 이에 삼별초의 난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 삼별초의 난은 고려 무인들의 자주적 배외정신을 보여주고 고려가 몽고의 간섭 아래 독립왕조를 유지할 수 있게 한 하나의 요인으로 지적되지만, 동시에 삼별초의 난으로 귀결되기까지의 최씨정권의 독단적 위압적 폐쇄적 정치행태 및 대몽항쟁과 정권의 이해관계와의 연결이 기본적 이유가 된다는 점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민현구, 몽고군 김방경 삼별초, 한국사시민강좌 제8집 1991>





김방경은 화친을 주장하는 고려 조정의 입장에 서서 무력항쟁을 고수하려는 삼별초의 진압에 나서게 된 것이다.











2. 김방경의 군사활동



1) 삼별초의 진도입거와 진압



배중손 등은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하여 관부를 설치하고, 대장군 유존비, 상서좌승 이신손을 좌우승선으로 삼았으며, 반정부 반몽고의 기치를 내걸고 봉기하였다.



이들은 먼저 문무양반의 도외 탈출을 엄중히 금지하고, 금강고의 무기를 꺼내어 군졸에게 나누어 주어 성의 수비를 공고히 하였지만, 강화를 수비하던 병졸들이 대부분 도망하여 수비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선함을 모아 공사의 재화와 자녀를 모두 싣고 남쪽으로 내려 갔는데, 仇浦로부터 ?破江에 이르기까지 무려 1천여 척의 배가 꼬리를 물었다. <고려사 권104 김방경전>







삼별초는 서해 일대의 도서를 거쳐 남하하여 <고려사절요 권18 원종11년6월조, 바로 진도로 향한 것이 아니라 서해 일대의 도서를 거쳐 남하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종11년 (1270) 8월 진도에 입거하였는데, 삼별초의 진도 입거는 상당한 근거가 있는 것이다. 즉 대몽항쟁을 하려면 강화와 같이 육지에 가까우면서 광활한 도서와 해상 요해의 땅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요건으로 본다면 서남 다도해상의 진도가 적격이었을 것이다. <김상기, 삼별초와 그 난에 취하여, 진단학보 제9,10,13권>



진도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 진도의 섬됨이 아득히 떨어져 있는 천부지리 5.60리 사이에 산이 높고, 물이 깊으며, 땅도 또한 기름지고, 목장에는 말이 있어 비단과 같은 말들이 들을 덮고, 귤나무가 있어 구슬나무가 수풀을 이루고 있으니 보물의 장이요 재물의 부로서 남쪽 고을의 으뜸이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7 진도군 누정조>



라고 하여 진도가 삼별초의 근거지로 천혜의 요지임을 말하고 있다.





또한 진도는 물이 깊어 본도와 육지 사이에는 큰 풍랑이 일어나 방어에 유리함이 많았다. 이와 같은 요건은 또한 원종이 몽고에 보낸 국서에도 나타나는 바



[전라도 경상도의 貢賦는 모두 육상 운수로 나르지 못하고 반드시 바다로 운반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역적들이 거점으로 삼고 있는 진도는 해상 수로의 요충 지점인 까닭에 왕래하는 선박들은 그 곳으로 통과시킬 수 없다.] <고려사 세가 권27 원종12년 3월조>



라고 한 것으로 보아도 진도가 삼별초의 근거지로 얼마나 적격이었나를 알 수 있다.









진도에 입거한 삼별초는 용장성을 쌓고 궁전도 크게 지었으며 육지에서의 활동도 활발하여 장흥을 비롯하여 합포(마산), 금주(김해), 동래 등은 물론 나주, 전주에까지 진공하였다.



이에 개경정부의 피해는 실로 막심하여 맞서서 싸우지 않은 전라도 토벌사 신사전을 파면하고, 김방경을 그 대신으로 삼아 몽고원수 아해와 함께 진도를 토벌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김방경이 총사의 격으로 삼별초 토벌을 담당하게 되었다.



몽고의 삼별초의 진압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였는데 이는 모처럼 원종을 회유하여 고려를 그의 외?으로 삼으려는 정책에 착오가 생기는 외에 몽고의 숙원인 동정계획에 지장이 있기 때문이다. <<김상기, 삼별초와 그 난에 취하여, 진단학보 제9,10,13권>



김방경은 원의 원수 아해와 더불어 삼견원에 주둔하며, 진도에 대하여 진을 쳤다. 이때 삼별초의 기세는 매우 강하여 해상 세력과 작전이 연합군을 압도하였다.









이에 연합군측은 시일만 끌게 되었고, 김방경까지도 삼별초와 내통하였다는 무고로 잡아 가두게 되었다. <고려사 권104 김방경전> 이는 그후 홍찬 등의 무고임이 밝혀졌지만 군의 중심인물인 김방경을 파면하게 된 것은 개경정부의 큰 손실이었다.



왕은 달로화적에게 청하여 다시 방경으로 하여금 반적들을 토벌하게 하고, 그에게 上將軍의 직을 주어 위로하여 보냈다. <고려사 권104 김방경전> 이는 원종이 김방경을 매우 신임하고 의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방경이 진도에 이르니 삼별초의 전투력은 매우 우세하여 아해가 겁을 내어 싸우려 하지 않자 방경이 홀로 적중으로 돌입하여 싸웠으나 큰 공경에 빠졌다. 이는 다음의 사료로 알 수 있는데



[----- 방경이 말하기를 "결승은 오늘에 해야 한다." 라고 하면서 (생략)]

<고려사 권104 김방경전>



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김방경이 홀로 진격하여 목숨을 잃을 뻔 한 것은 몽고원수 아해의 비겁에 격분한 데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시일을 끌수록 연합군측에 불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김상기, 삼별초와 그 난에 취하여, 진단학보 제9,10,13권>









원종12년 91271) 정월에 아해는 몽고로 소환되고 대신 흔도가 임명되었다. <고려사 권27 세가 원종12년 3월 병인조> 그리고 증발군을 이끌고 남하한 홍다구와 함께 진도를 총공격하였다.



이에 연합군은 좌,우,중 3군으로 나누어 동,중,서 세 방면으로 공격하여 적을 분산시키니 삼별초는 연합군의 중군을 대항하고자 벽파정에 모였다. 이때 홍다구 군이 삼별초를 측면에서 공격하니 삼별초가 무너졌다.



삼별초는 그동안 관군과 싸워 여러차례 승리를 계속한 결과 관군을 가볍게 여기는 마음이 있어 방비를 소홀히 하였던 것이다. <고려사 권104 김방경전>





홍다구는 가장 먼저 승화후 온과 그의 자, 환을 죽였으며 배중손도 이때 죽은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사절요 권18 원종12년 5월조>



김방경은 적군이 붕괴되는 것을 보고 추격하여 남녀 1만여명과 전함 수십척을 획득하였으며 쌀 4천석과 재물 보배 기구 병기 등을 얻어 모두 개경으로 운반하여 가게 하였다. 이와 같이 사녀와 진보가 많았던 것을 보면 당시 진도의 삼별초의 위세가 매우 강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방경은 역적들에게 강요당하여 항복하였거나 추종하였던 양민들은 모두 자기 생업에 종사하게 하였다. 고려 조정에서도 사신을 보내



[----- 역적의 처자와 친족들이 그 죄를 받았지만 대소 인민이 먼저 옛 서울로 나오고 그 부모와 친족 노비로서 적의 겁탈 노략을 받았던 자들이 지금 다시 관군에 붙잡혀서 모두 몽고로 갔으니 장수들에게 잘 유시하여 옛날대로 회복하게 하여 주기를 바랍니다.] <고려사절요 권19 원종12년 5월조>



라고 하여 몽고군이 포로로 잡아간 자들을 다시 고려로 돌려 보내 다시 옛날대로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요구하였다.









김방경이 개선하니 왕이 사신을 보내 교외에서 그를 맞이하게 하고 그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수태위 중서시랑 평장사의 벼슬을 더하여 주었다. <고려사 권104 김방경전>



연합군에 의한 진도의 함락으로 삼별초는 그 중심인물을 많이 잃었고, 세력 또한 약해졌다. 이에 배중손의 일당인 김통정이 삼별초의 잔당을 거느리고 제주도로 들어가니, 이때부터 김통정을 중심으로 하는 삼별초가 활동하게 된 것이다.













▣ 고려후기 김방경의 정치활동과 그 성격 (류선영, 1993, 전남대)



3. 개경환도 이후의 활동



원종복위를 계기로 무인정권은 종식되었고 10년을 끌어 온 개경환도 정책이 실현되었다. 이후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으로서 원에 의해 내정을 간섭받게 되었다.



그런데 개경환도와 더불어 고려 정국에는 다시 또 회오리바람이 몰아쳤다. 그것은 개경환도에 반대하여 배중손, 김통정 등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삼별초는 무인정권의 사병적 군대로서 항몽전쟁을 수행한 전위조직이었다. 무인정권이 몰락하고 개경환도가 이루어지려 하자 이들은 신상에 위협을 느꼈던 것이다. <민현구, 몽고군 김방경 삼별초, 101쪽>









1270년 (원종11년) 6월 김방경은 역적추토사 참지정사 신사전, 몽고 송만호 등과 더불어 삼별초 토벌에 나섰다. <고려사절요 권18 원종 11년 6월> 이로써 김방경은 5년에 걸친 삼별초의 토벌에 참여하게 되었다.



삼별초의 토벌은 삼별초의 완강한 저항과 일부 토벌활동에 소극적이었던 태도로 쉽지가 않았다. 추토사 신사전, 송만호 등이 삼별초 토벌활동에 소극적이었던 까닭으로 파면되기도 하였다.



반면 김방경은 삼별초 토벌에 적극적이어서 오히려 무고사건에 걸리기도 하였다. 그는 신사전이 파면되자 이어 추토사가 되어 몽고원수 아해와 더불어 나주에서 삼별초를 물리쳤는데,







나주 반남인 홍찬 등이 김방경이 적과 내통했다는 참소를 하여 아해에게 잡혀 압송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를 신임하던 다루가치와 왕에 의해 그는 석방되어 다시 토벌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아해 등의 소극적 태도로 진도의 삼별초를 공격할 때 김방경은 패하여 자살을 기도할 정도로 위하에 처하기도 하였다. 그러니 토벌에 소극적이던 아해가 물러 가자, 김방경은 흔도, 홍다구 등과 더불어 진도를 수복하였고, 이 공로로 수태위 중서시랑 평장사가 되었다.



1273년 그는 다시 출병하여 삼별초의 최후 근거지인 탐라도를 정벌하였다.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이와 같이 김방경은 적극적으로 토벌활동을 벌여 삼별초를 토벌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삼별초 토벌에 소극적이었던 국내 일부 분위기와는 달리 반삼별초의 핵심에 섰던 것이다. 그는 원종복위와 개경환도때 무장의 위치에서 공을 세웠던 환도파였던 점에서 이러한 그의 활동은 당연한 것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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