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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하계동의 한글고비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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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4-11-26 15:21 조회1,753회 댓글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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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11. 25), 평소 관심은 많았으나 찾아 보지 못했던 귀중 문화재 하나를 탐방했습니다.

서울시 노원구 하계동 산 12번지에 있는 이윤탁의 한글 고비(古碑)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로 된 비석입니다.

 그런데 이 비석을 새긴 분은 우리 문중과 깊은 관련이 있는 분입니다. 제학공파의 김언묵(참판공, 金彦默. 세칭 제학공파 5갑선조의 조부.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 소래산에 모셔져 있음)의 따님이 성주 이씨 묵재 이문건에게 시집을 갔고 이 분이 자신의 부모님 묘소에 세운 묘비입니다.

 묵재선생은 처남인 영상공(金錫)과 함께 정암 조광조의 도학정치에 함께 활동하다가 피해를 입기도 했습니다. 또한 묵재선생은 처가의 조카들인 5갑 선조중 충갑, 효갑 등에게 학문적 영향을 크게 주었으며 충갑, 효갑이 고모부인 묵재선생에게 보낸 친필 서찰과 친필 시가 그의 문집의 일부인 <묵휴창수> 속에 실려 있기도 합니다.

 실은 지난 10월 초 충북 괴산 축제 행사의 하나로 학술발표회가 있었는데 이때 발표자로 나온 김경숙(서울대 규장각 선임연구원)과 전화 통화를 하여 비석의 실 위치를 묻고 난 뒤 노원구청 문화관광과 직원에게 자세한 문의를 하여 어제 찾아 갔던 것입니다.

 혼자 나서기가 심심하여 한 분의 동행을 요청했고, 인근에 살고 있는 죽마고우 친구(한정수-혜원여중 국어 교사)에게도 연락하여 찾아갔습니다 .

 오후 3시30분에 석계역에 도착, 약 15분간 버스(1132번)를 타고 서라벌 고등학교 앞에서 내려 산쪽으로 약 5분간 도보로 가니 길옆에 바로 보였습니다.  시도유형문화재   27호로 지정되어 있었습니다.

 다행히 문이 열려져 있습니다. 간단히 배례하고 살펴보았습니다. 원래는 15m앞 도로에 있던 묘비를 안쪽 현 위치로 옮겼다고 합니다. 고비는 비각으로 보호하고 있었고 같은 크기의 복사본 비를 만들어 묘전에 세웠습니다. 비문의 찬자. 서자. 새긴자가 모두 이문건입니다. 시묘살이를 하면서 1535년 11월 추운 겨울에 하루 몇자씩 새겨 이듬해 4월까지 제작하였다고 합니다. 

묘비 전면은

 좌측에 -- 權知承文院副正字李公諱允濯

 우측에 -- 安人申氏籍高靈

 중앙 아래에 -- 合葬之墓

라 써 있었고

 

 묘비 좌측 옆면에는 다음과 같이 한글로 씌여 있습니다.

 녕한 비라 거운사라만 재화랄 니브리라 이난 글모라난 사람다려 알위노라 (신령한 비석이다. 훼손하는 사람은 재앙을 입으리라. 이는 글 모르는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다.)

( *고어인 아래아는 '아'로 씀)

 

묘비 뒷면에서는 (복사본으로 확인) 낯익은 선조님들의 휘를 발견했습니다.

 1)이문건의 부친인 이윤탁의 배위 고령신씨는 金自行(서운관정공파)의 외손녀이며

 2)이문건의 배위는 金彦默(제학공파)의 女이며

 3)이문건의 장 조카인 이휘의 배위는 金錫(제학공파. 김언묵의 자. 오갑의 부친)의 女이며

 4)이문건의 아들인 이온의 배위 경주김씨의 어머니(이온의 장모)는 김지(안렴사공파)의 따님입니다.

 

이렇게 우리 문중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비각 안에 있는 묘비를 살펴 보니 석질이 좋아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탁본해 간 흔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글 부분은 몰지각하게도 어느 사람이 비석에 먹물을 칠한 뒤 한지에 찍어내는 방법으로 탁본을 뜬 뒤, 그 먹물을 닦아내지도 않고 가버려 검게 자욱이 남아 있었습니다. 가슴이 아팠습니다.

 한 시간을 살핀 뒤 3사람은 공릉역 근처로 가서 식사하고 헤어져 돌아왔습니다.

 탁본할 날과 방법을 연구중입니다. 절차도 까다롭습니다. 12월 중에 다시 갈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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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라벌 고교 옆 도로에 접해 있는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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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소 올라가는 입구의 문화재 표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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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구의 안내 해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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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윤탁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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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 고비 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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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전 우측 문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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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각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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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비 전면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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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비 전면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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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비 좌측면 한글부분-탁본 자욱으로 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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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비 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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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비 우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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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사본 묘비 좌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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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사본 묘비 후면-한문 원문을 국역하여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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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사본 묘비 우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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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각 안의 한글비문 내용 알림판>

 

 

<문화재청 홈페이지 소개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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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27호
명   칭   한글고비
  (한글古碑)
분   류   석비
수   량   1기
지정일   1974.01.15
소재지   서울 노원구 하계동 산12-2
소유자   성주이씨종친회
관리자   성주이씨종친회


조선 중종 때 승문원 부정자를 지낸 이윤탁 선생의 묘 앞에 서 있는 비로, 묘의 훼손을 경계하는 내용이 한글로 적혀 있다.

비는 사각의 받침돌 위에 비몸만을 세워둔 간결한 구조로, 비몸의 윗변 양쪽을 비스듬하게 다듬었다. 서쪽면에는 한글 30자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윤탁의 셋째 아들인 이문건이 글을 짓고 글씨를 새긴 것이다.

비 뒷면에 새겨진 기록으로 미루어 중종 31년(1536)에 비를 세운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지 90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글씨는 한글창제 당시와 똑같은 글씨에 서민적인 문체로 쓰여져 있다. 남아있는 ‘한글비’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아직 한글이 널리 사용되지 못했던 시기에 과감히 ‘한글묘비’를 세웠다는 점에서 그 가치는 더욱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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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건 소개

출전 : <한국학 지식>(전 디지털 한국학)

이문건(李文楗)
1494(성종 25)∼1567(명종 2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자발(子發), 호는 묵재(默齋)·휴수(休?). 승문원정자 윤탁(允濯)의 아들이다.
일찍이 중형 충건(忠楗)과 더불어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고, 1513년(중종 8) 중형과 함께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화를 입자, 그 문인들이 화를 염려하여 감히 조상하는 자가 없었으나, 그의 형제는 상례(喪禮)를 다하였다. 이에 남곤(南袞)·심정(沈貞)의 미움을 받아 1521년 안처겸(安處謙)의 옥사에 연루되어 충건은 청파역(靑坡驛)에 정배되었다가 사사되고, 그는 낙안(樂安)에 유배되었다.
1527년 사면되어 이듬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정원주서에 발탁되었고, 이어서 승문원박사를 거쳐 정언·이조좌랑에 이르렀는데, 이때에 전날의 혐의로 대간으로부터 서경(署經)이 거부되었으나, 김안로(金安老)의 협조로 관로는 순탄하였다.
1539년 장령을 역임하며 관기확립에 힘썼고, 그뒤 통례원우통례(通禮院右通禮)를 거쳐 승문원판교가 되어, 중종의 국상을 맞아 빈전도감(殯殿都監)낭관으로서 대사를 무난히 처리하였다.
1546년 명종이 즉위하면서 윤원형(尹元衡) 등에 의하여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족친 이휘(李輝)가 화를 입었고, 이에 연루되어 성주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성품이 근후하였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23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면서 오로지 경사(經史)에 탐닉하고 시문에 힘쓰니, 뒤에 이황(李滉)·조식(曺植)·성수침(成守琛)·이이(李珥) 등이 그의 시문을 즐겨 읊었다.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댓글목록

김주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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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너무 복잡해서 쉽게 정리해 봅니다.

1)이문건 부친 이윤탁의 장모가 안동김씨임 &lt;金自行(1412-1489)의 딸&gt;
***김자행은 김희수(1475-1527)의 조부임
2)이문건의 배위가 안동김씨임 &lt;金彦默(1472-1506)의 딸&gt;
***김언묵은 김석의 부
3)이문건 장조카 이휘의 배위가 안동김씨임 &lt;金錫(1495-1534)의 딸&gt;
***김석은 오갑형제의 부
4)이문건 아들 이온의 장모가 안동김씨임 &lt;김지(1455-1534)의 딸&gt;
***김지는 공걸, 공예(1485-1537), 공언, 공연 형제의 부

김발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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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쩝! 부러울 뿐!!!!!!

김윤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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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허! 대단합니다. 그런 인연이 있었군요.

김상석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상석
작성일

  T V에서 조선조의 육아일기편 묵재선생의 &lt;양아록&gt;을 소개하면서 성주유배를 재현하는 프로그램 속에서 시묘살이를 통한 효의 실천을 보며 남달랐던 감회가 새롭습니다.

김정중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정중
작성일

  좋은 내용 소개 해주셔서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