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方慶열전-14 (연해 주현과 진도의 삼별초 토벌③ : 59-61세)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2-01-22 01:37 조회1,915회 댓글0건본문
충렬공 휘方慶 할아버지의 행적을 고려사열전을 중심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근거자료는
1300년 이진 찬 [김방경 묘지명]
1350년 안진 발 [김방경 행장]
1392-1454년 김종서, 정인지 등 편수 [고려사 김방경열전]
안동김씨 대동보 (초보 : 1580 경진보)
김방경 연구 석사학위논문 3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 기타 자료를 참고로 하고 있습니다.
金方慶열전-14 (연해 주현과 진도의 삼별초 토벌③ : 59-61세)
1270년 (원종11, 59세) 逆賊追討使, 홍친 홍기의 무고로 (★2번째 무고) 삭탈관작되었다가 다시 上將軍이 됨
1271∼1272년 (원종12∼13, 60∼61세) 진도 삼별초 공격 및 평정, 그 공으로 中書侍郞 平章事,
<묘지명> 금자광록대부 수대위 평장사 판리부사 대자대보로 배명, 얼마후에 문하시랑 평장사 배명.
▣ 금자광록대부 金紫光祿大夫
고려시대의 종1품∼종2품 문산계.
1076년(문종 30) 종2품으로 문산계 제3계로 정하였으며, 1275년(충렬왕 1) 원나라의 간섭으로 광정대부(匡靖大夫)로 고쳤다. 1356년(공민왕 5) 금자광록대부로 바뀌면서 종1품 상계가 되었으며, 1362년에 폐지되었다.
▣ 평장사 平章事
고려시대의 정2품 관직.
982년(성종 1)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에 내사시랑(內史侍郞)평장사 ·문하시랑(門下侍郞)평장사를 둔 이래 1061년(문종 15)과 1356년(공민왕 5)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에 중서시랑평장사 ·문하시랑평장사 ·중서평장사 ·문하평장사를 두었는데 모두 정2품관이었으며 정원은 각각 1명씩이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문하시랑평장사 門下侍郞平章事
고려시대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정2품 관직.
문하시랑 ·문하평장사라고도 한다. 문하시중(門下侍中)의 다음 자리로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와 같은 지위이다. 성종 때 처음 두었으며 1061년(문종 15) 정2품, 정원 1명으로 정하였다. 1275년(충렬왕 1) 원(元)나라의 강요로 관제를 격하 ·개편할 때, 중서시랑평장사와 합쳐져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로 개칭하였다. 1298년 폐지하였다가 다시 두었다. 1308년 중호(中護)로 개명하고 3명으로 증원하였으며, 1356년(공민왕 5) 반원운동의 일환으로 다시 문하시랑평장사, 정원 1명으로 바꾸었다. 1362년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1369년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고쳤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중서시랑평장사 中書侍郞平章事
고려시대 정2품관으로 보하던 중서문하성의 관직.
문종 때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을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으로 고치면서 성종 이래의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를 고친 이름이며, 정원은 1명이다. 그 뒤 여러 차례 명칭이 변경되다가 1362년(공민왕 11)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바뀌었다. 이 관직은 서열상 고려시대의 평장사 가운데 가장 하위에 속하지만, 다른 평장사와 마찬가지로 국사를 논의하는 재신(宰臣)의 하나였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삼별초 三別抄
고려 무신정권(武臣政權) 때의 특수군대.
1219년(고종 6) 최충헌(崔忠獻)의 정권을 계승한 최우(崔瑀)가 방도(防盜) 등 치안유지를 위해 설치한 야별초(夜別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별초란 ‘용사들로 조직된 선발군’이라는 뜻이다.
그 뒤 야별초에 소속한 군대가 증가하자 이를 좌별초 ·우별초로 나누고, 몽골병과 싸우다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병사들로 신의군(神義軍)을 조직, 이를 좌 ·우별초와 합하여 삼별초의 조직을 만들었다.
삼별초는 무신정권의 전위(前衛)로서 다분히 사병적(私兵的)인 요소도 있었으나, 항몽전(抗蒙戰)에서는 그 선두에서 유격전술로 몽골병을 괴롭혔고,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몽골과 강화(講和)가 성립되자 반란을 일으켰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별초 別抄
고려시대의 군대조직.
고려 전기의 군사조직은 이군육위(二軍六衛)를 기간으로 하고 있었으나, 점차 병제(兵制)가 문란해지면서 선봉대 또는 별동대의 성격을 띠는 특수부대 조직으로서 별초가 나타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군육위 내의 각 부대별로 일정한 비율을 정하여 선봉대를 선발하는 형식이었으나, 숙종대 여진족(女眞族)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별무반(別武班)이 편성되면서 새로운 부대조직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이 별초의 효시를 이룬다.
무신집권기 병제의 문란이 극심해져서 기존의 군사편제 및 전시동원 체제가 유명무실해지자, 별초는 치안 및 국방이라는 대내외적인 목적을 위하여 많이 설치되었다. 1174년(명종 4) 이후 좌별초(左別抄) ·우별초(右別抄) ·신의별초(神義別抄)의 삼별초(三別抄) 및 경주별초(慶州別抄) ·양반별초(兩班別抄) ·노군잡류별초(奴軍雜類別抄) 등 다양한 별초 조직이 나타난다. 별초는 초기에는 주로 국내의 도둑을 잡기 위한 순검군(巡檢軍)의 역할을 맡았는데, 야별초(夜別抄)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몽골[蒙古]의 침략이 격화되면서 유명유실화된 정규군의 역할을 대신하여 전투조직으로서 별초군이 중앙뿐만 아니라 전국에 걸쳐 조직되었다. 이에 따라 별초는 초기 선봉대로서의 성격과는 달리 모군(募軍) 방식을 통해 조직한 일종의 직업군인으로서 정규군화되었다.
중앙에는 삼별초를 중심한 경별초(京別抄) 조직이 있었고, 지방에는 본주별초(本州別抄)로 표현되는 외별초(外別抄) 조직이 있었다. 별초군은 고려 후기 익군(翼軍)이 조직되기 이전까지 고려 병제의 면모를 이어주는 교량적 역할을 하였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야별초 夜別抄
고려의 최씨 무신정권이 밤에 도둑을 단속하기 위해 설치한 군대.
고종 때의 집권자 최우(崔瑀)가 도성(都城) 안에 도둑이 많아 이를 막기 위하여 설치한 것이다.
처음에는 개성에서 밤에 성안을 순찰하게 하였으나, 나중에는 도둑의 무리가 전국에서 발호하므로 각도로 확대하였다. 점차 기능과 권한이 확대되고 인원도 많아져 이를 좌 ·우별초로 나누어 편성하였다. 좌 ·우별초는 도둑잡기뿐만 아니라, 몽골의 침입이 있자 몽골군과도 싸워 공을 세웠다.
또한 몽골군과 싸울 때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하여 온 자들을 모아 또하나의 별초로 신의군(神義軍)을 조직하고, 이를 좌 ·우별초와 합하여 삼별초(三別抄)라 하였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신의군 神義軍
고려시대의 사병(私兵).
최우(崔瑀)의 무신정권(1219∼1249)인 고려에 침입했던 몽골군에 포로가 되었다가 탈주한 자들로 조직된 군대로, 좌별초(左別抄) ·우별초(右別抄)와 더불어 삼별초(三別抄)를 이루어 무신정권의 군사적 뒷받침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몽항쟁(對蒙抗爭)의 선봉에 섰던 중추적 군대였다.
신의군 등 삼별초는 1258년(고종 45)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1231년의 몽골 제1차 침입 이래 28년간 끈기 있게 싸워온 몽골과 강화가 성립되자 1270년(원종 11)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진도를 근거지로 왕을 따로 추대하고 정부와 대립되는 반몽(反蒙) 정권을 수립하였으나, 고려 ·몽골의 연합군에 의해 진도가 함락되고 제주도로 들어가 항쟁을 계속하다가 1273년 전멸되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흔도 熊都 [?~?]
중국 원(元)나라의 무장(武將).
별칭 : 홀돈(忽敦)
국적 : 중국 원(元)
활동분야 : 군사
홀돈(忽敦)이라고도 한다. 1271년(원종 12) 고려에 주둔하고 있던 몽골군의 지휘관으로, 고려 장군 김방경(金方慶)과 함께 탐라(耽羅:제주)에서 삼별초군을 평정하였다. 1274년 고려와 원나라가 연합하여 일본을 정벌할 때, 연합군의 도원수(都元帥:총사령관)로서 대군을 거느리고 합포(合浦:지금의 마산)를 출발, 쓰시마섬[對馬島] ·이키섬[壹岐島] 등을 점령하고 하카타만[博多灣]에 이르렀으나 심한 풍랑으로 철수하였다. 1281년(충렬왕 7) 정동행성사(征東行省事)가 되어 고려에 들어와 동로군(東路軍)을 이끌고 2차 일본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또다시 태풍을 만나 많은 병력을 잃고 고려를 경유, 귀국하였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홍다구 洪茶丘 [1244~1291]
시대 고려
생몰년 1244-1291(고종31-충렬왕17)
본관 당성(唐城)
자
호
시호
활동분야 부원(附元)분자
다른 이름 준기(俊奇)
1244(고종 31)∼1291(충렬왕 17). 고려 원종·충렬왕 때의 부원(附元)분자. 본관은 당성(唐城:南陽). 본명은 준기(俊奇), 다구는 소자(少字)이다.
고종 때 몽고에 투항한 대선(大宣)의 손자이며, 역시 고종 때 몽고에 투항하여 몽고의 고려 침략을 향도하였던 복원(福源)의 아들이다.
몽고에서 출생하고 성장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종군하면서 용맹으로 이름을 떨쳤다. 원나라 세조의 총애를 받아 세조가 소자(少字)로써 그를 불렀다고 한다.
1261년(원종 2) 아버지의 관직을 이어받아 관령귀부고려군민총관(管領歸附高麗軍民總管)에 임명되었으며, 1263년에는 영녕공 준(永寧公#준17)을 참소하여 당시 그가 원에서 가지고 있던 고려 군민에 대한 관령권(管領權)을 탈취하였다.
그뒤 1269년 원종이 임연(林衍)을 제거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군사를 요청함에 따라 다음해에 국왕 두연가(頭輦哥)를 좇아 3,000의 귀부군(歸附軍)을 이끌고 처음 고려에 왔으며, 이로부터 봉주(鳳州)의 둔전총관부(屯田總管府)에 주둔하면서 당시 고려에 있던 부원세력의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진도와 제주도의 삼별초 진압을 지휘하였으며, 계속해서 1274년 소용대장군 안무사 고려군민총관(昭勇大將軍安撫使高麗軍民總管)이 되어 일본정벌을 위한 군량과 조선의 조달을 감독하고 곧이어 동정우부도원수(東征右副都元帥)로서 일본정벌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일본정벌이 실패로 끝나자 1275년(충렬왕 1)에 원나라로 돌아갔으며, 1277년 진국상장군 정동도원수(鎭國上將軍征東都元帥)에 임명되어 일본정벌에 대비하였으나, 때마침 원나라의 상도(上都)에서 지로와대(只魯瓦#알09) 등이 일으킨 반란으로 일본정벌이 연기되자 승상(丞相) 백안(伯顔)을 쫓아 상도를 공략하여 전공을 세웠다.
이해에 고려에서 위득유(韋得儒) 등에 의해서 김방경(金方慶) 무고사건이 일어나자 고려에 들어와 김방경을 고문하고 고의로 사건을 확대시켜 고려의 입장을 난처하게 하려다 충렬왕의 적극적인 외교활동에 의하여 원나라로 소환되었다.
그 뒤 1279년 원나라에서 다시 일본정벌을 추진하자 동정군(東征軍)의 지휘를 자청하였고, 고려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음해에 용호위상장군 정동행성우승(龍虎衛上將軍征東行省右丞)에 임명되어 일본정벌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번의 일본정벌 역시 실패로 끝나고 곧 원나라로 돌아갔으며, 이후로는 다시 고려에 오지 못하였다.
1284년에도 다시 정동행성우승에 임명되었으나 곧 일본정벌 계획이 무산되었다.
1287년(충렬왕 13) 원나라에서 내안(乃顔)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요양행성우승(遼陽行省右丞)이 되었다. 이후 1290년에 병으로 사직하였다가 이해에 내안의 여당인 합단(哈丹)이 고려를 침략하자 다시 기용되어 요양행성의 관리가 되었으나 다음해에 죽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元史, 新元史. 〈李益柱〉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