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 김뉴와 매월당 김시습의 교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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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4-11-28 11:59 조회1,628회 댓글1건본문
▣ 자고 김뉴(子固 金紐)와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의 교우 ▣
○ 양양부사 유자한과 교우하다.
--<전략>-- 김시습을 좋아한 유자한은 그에게 동구를 나와 양양에 정착하여 『장자』를 가르쳐주기를 청하였다. 김시습은 서한을 냈다. 『梅月堂集』권21, 書, 「上柳自漢書」제3서
이 서한 첫머리에서 김시습은 서울에서 김수온, 서거정, 김뉴(金紐)와 격의 없이 지내던 때의 광경을 회상하고, 유자한이 자신을 포용해줄 것을 청하였다.
전일에는 영공을 뵈옵고 익살을 떨었는데, 혹 비위를 건드리지나 않았는지요? 저는 본래 천성과 버릇이 연하(煙霞 : 산수) 를 좋아하고 풍운(속세)을 조롱하여, 세상 사람을 향해 말하기를, "난 지체 높은 사람이나 고위 관료라 하더라도 한번 보면 정(情 : 상대의 배경)을 잊고 사귄다"고 하였습니다. 서울의 옛 친구인 문량(文良 : 김수온), 강중(剛中 : 서거정), 자고(子固 : 김뉴)는 본디 오래된 친구 사이로 서로 허물없이 대했지만, 비록 새로 사귄 사람이라 하더라도 서로 말할 수 있다면 편히 악수하고 단란하게 글을 토론라고 시를 평가하며 감히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서 서로 의견 충돌을 하지 않고 모나면 모나는대로 둥글면 둥근대로 구멍을 파고 자루를 깎으며, 또 좁으면 좁은대로 넓으면 넓은대로 그 바라와 뚜껑을 만드니, 여전히 이러한 태도가 있어서이지 부질없고 오만한 사실은 없습니다.--<후략>--
○ 인명해설
김뉴(金紐, 1420~?) : 김시습이 양양에 있을 때 부사 유자한에게 자신의 서울 친구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밝힌 인물이다. 단, 『매월당집』의 시문에서는 그와의 관계를 밝힐 만한 자료를 찾지 못하였다. 이덕무(李德懋)가 『청비록(淸脾錄)』에서 조선조 시문학의 대가로 손꼽은 인물이다. 본관은 안동. 자는 자고(子固), 호는 금헌(琴軒), 취헌(翠軒), 쌍계재(雙溪齋), 관후암(觀後庵) 또는 상락거사(上洛居士)이다. 아버지는 중엄(仲淹)이고, 어머니는 조준(趙浚)의 손녀이며 대림(大臨)의 딸이다. 1464년(세조 10) 녹사로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성균관 학유가 되었다. 곧 사복직장으로 옮겼으며, 이듬해 호조좌랑으로 『경국대전』 편찬 사업에 참여하여 이전(吏典)을 수교하였고, 경차관으로 전라도에 파견되었다. 1466년 발영시, 등준시에 을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안효례(安孝禮), 유희익(兪希益) 등과 함께 도성(都城)을 측량하고 지도를 작성하였다. 또한 예문관직제학으로 『세조실록』,『예종실록』 등을 편찬하는데 기여하였다. 1470년(성종 원년)에 『경국대전』을 다시 수교하였다. 1472년 동부승지를 거쳐, 이듬해 참찬관으로 저화법(楮貨法) 사용을 강조하는 방안을 주장하였다. 이어 공조참판, 충청도관찰사, 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1478년에는 대사헌으로 군비 확충을 위해 여러가지 방안을 제의하여 실천하게 하였다. 1479년 겸성균관동지가 되고, 1481년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파직되었다. 1484년 행사직이 되고, 1490년 다시 이조참판이 되었다. 학문을 좋아하고 글을 잘 지었으며 그림과 글씨에도 능하였다.
<출전 : 김시습평전 - 시대의 비판자, 귀속을 거부한 자유인 -/심경호 지음/돌베개 펴냄/2003.10.10>
댓글목록
김주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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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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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김시습, 김수온, 서거정, 그리고 김뉴!!!
한문학사에 쟁쟁하신 분들이 친밀했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