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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석사논문:김방경 연구 (이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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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02-01-22 18:31 조회1,98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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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늦게야 발견해서 정오표를 올리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김방경은 원종 10년(1269년) 임형===== 임형(誤)- 임연(林衍)



,,,셋째, ... 식읍 일천호 식실봉 삼천호를 =====- 식읍 삼천호,식실봉 삼백호



즐거운 하루 되세요



영환드림



김정중 wrote:



: 아래 내용은 1986년 4월15일(토)안동김씨 대종회보 7면 기사 내용입니다

: --------------------------------------

: 석사 학위 논문

: 김방경연구

: 청주 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이상철(1989)

: ----------------------------------------

: <결론>

: 김방경 (1212-1300)은 무신 집권기에 출생하여 고려의 대몽 항쟁이 일단락 되고

: 새로운 여원관계가 형성 될 무렾 무인으로 크게 출세하여 당시 고려의 최고 관위에 올라

: 그의 가문을 유력한 귀족 가문으로 끌어 올렸다.

: 김방경은 충직하고 청렴함을 바탕으로 형부상서 추밀원 부사가 되었으나

: 그가 뒷날 최고의 권력자로 등장하는 것은

: 다음과 같은

: 세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

: 첫째. 김방경은 원종 10년(1269)임형의 원종 폐립 사건과 최항의 반란때 몽고와 고려 왕실및

: 태자갈(뒷날 충렬왕)과 밀착된 관계를 맺음으로서 출세 기반을 마련 하였다.



:

: 둘째. 삼별초를 토벌하여 크게 성장하니 진도 삼별초 토벌 후 그는 수태위 중서시랑 평장사가

: 되었으며 탐라 삼별초 토벌 뒤에는 시중이 되어 최고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

: 셋째. 김방경은 일본 원정에서 활약하여 크게 부상하였고 마침내는 당시의 유력한 권력가의

: 하나가 될수 있었으니 제 1차 원정후 상주국의 훈작을 받았으며 또한 원으로부터 지극한

: 사랑을 받게 되었다. 그뒤 제 2차 원정후에는 추충정난정원공신 상락공을 더하여 치사케

: 하였으며 상락군 개국공의 작호를 더하여 식읍 일 천호와 식실봉 삼천호를 봉하였다.



:

: 김방경은 원종이나 충렬왕이 가장 크게 의지한 인물이었으며 원으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 삼별초의 저항과 일본 원정으로 고려가 크게 시련을 겪을때 이 난국을 담당하고 출장입상하면서 누려던

: 그의 지위는 독보적인 것이었다.

: 그는 원종14년(1273년)시중이 된 다음부터 충렬왕9년(1283년)62세 까지 삼별초 토벌을 위한

: 여몽(원)연합군의 고려측 장사로 출정하여 소극적인 몽고군과는 달리

: 매우 적극적인 자세로 전투에 임하였다

: 또 그는 삼별초 토벌과정에서 무고로 심문을 받다가 무죄석방되어

: 다시 토벌에 임한 일이 있던바와 같이 굳은의지로 공사의 난관을 극복하였던 것이다

: 오랜 전란으로 피폐한 고려가 원의 무리한 요구에 여러가지 부담을 지고 일본원정에 참가하였으나

: 전투에 임하여서만은 원의 소극적 태도와는 달리 적극적 자세로 임하였으며 공방전에서는

: 특히 김방경이 무적의 승리를 계속하였다

: 김방경은 출장입상의 역할을 십분 발휘 하여

: 제 1차 일본원정(충렬왕 즉위년1274)에서 돌아온뒤 원에 사신으로 파견되어서는 재원정을 사전에 막기 위하여 노력하기도 하였으며 충렬왕 3년 수상으로 있을 때에는 위득유등의 무고로 무자비한 고문을 당한 일이 있었으나 불의에 굴하지 않는 굳은 의지로 이것을 극복하고 제2차 원정에 참여하였다

: 제2차 원정에서도 수전에 익숙치 못한 원군은 항상 소극적이었으며 회군을 종용하기까지 하였으나 김방경의 고려군은 국지전에서 승리를 거듭하였다.

: 김방경은 세 아들을 두어 자손들도 크게 번창하였으나 그의 2남 김흔이 충렬왕과 충선왕 사이 부자간의 갈등이 생겼을때

: 충선왕편에 가담하여 김방경 가문에 일시적 타격을 주기도 하였다.

: 그리하여 김방경이 죽었을때 당시의 집권자들이 예장까지 막았으며

: 충선왕이 다시 즉위하여 재상지종을 지정하였을때 그의 가문은 여기서 탈락되었던것이다

: 그러나 그의 손자들은 심왕 우와 충혜왕 사이에 왕위 계승문제가 발생했을때 충혜왕편에 가담하여 다시 정치적 세력을 만회하게 되었다

: 특히 조적이 난을 일으켰을 때 왕을 시종한 공으로 그의 손자 5명중 2명은 1등공신, 1명은 2등공신으로 봉하여 졌으며 뒷날 모두 재상의 지위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 이와 같이 김방경 자손들의 활발한 사회적 진출은 이 집안 뒷날까지 번창하게 만들었다

: 끝으로 김방경의 출세기반에 대한 좀더 깊은 연구가 아쉬우며

: 앞으로 김방경 출세의 성격에 대한 분석 비판이 있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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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 참고문헌 고려사외31건 끝 -김정중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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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탈자 RE달아주세요 고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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