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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생 당(日生堂) 상량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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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작성일04-12-04 23:26 조회1,498회 댓글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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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당 상량문

 

조상과 자손들이 모성이 서로 통해서 이른바 정성이 있은즉 사물의 이치를 얻어내고

 

마루는 겨우 용납해서 대축(大祝)과 집레가 선조를 추모해서 보본의 정성을 드리네.

 

동우(棟宇)는 새롭고 탄추(탄楸)는 어제 같은데 공손히 생각컨데 우리의 충렬공 선조께서는

 

하악(河嶽)의 기상을 받으시고 문무의 재질을 겸했네

 

고려의 조정에 몸을 의지하고 일본을 정벌해서 안위(安危)를 두번이나 떨치고

 

 원나라의 임금을 화친으로 대해서 아름답게도 금호(金虎)의 부(符)를 받았도다

 

상서로운 구름을 꿈꾸어서 평지에 신선이 내린것 같고 거문고와 노래로 전별할때

 

고국(故國)의 산수에 감격했네

 

구십 평생 나라 걱정했으나 모발은 세이지 않았고

 

천호(千戶)의 식읍을 받는 영광이 있었으나 뜬구름 같았네

 

신명(神明)을 감히 통철하고 노적(虜賊)에게 하늘의 벌을 주었으며

 

변설에 밝아 이름이 산두(山斗)처럼 높고 송신(宋臣)의 자리에서 한머리로 자리를 양보했네

 

그 훈업을 말로하면 이루 다 말할수 없고 그 충절을 논한다면 가히 햇빛을 가릴것이다

 

지금에사 지례(知禮)의 마을을 돌아 보면

 

실제로 체백이 영구히 묻힌 자리라 오산(梧山)과 죽전(竹田)을

 

세상사람들은 비봉(飛鳳)의 명당이라 일컬었다

 

묘앞에 리석(리石)에는 고려 왕실의 기록이 전해있고 삼관(三官)의 은혜스러운 말씀은 제사때 말씀드려 눈물 뿌리네

 

녹사(錄事0의 의복은 의로운 중이 향불을 올려 척재(척약재)의 글귀가 더욱 절실하나

 

중세에 세상의 변란을 겪은 뒤에 묘소를 실전(失傳)한지 오래 되었다

 

산소를 관리하는 하인의 전설이 확실하지 않아 이백여년의 춘추가 되도록 실전하였으며

 

농부의 깊은 눈에 확연한 증거가 없어 육 칠세 후손들이 어찌 다행이라 아니하리요.

 

영령이 은연중에 유도해서 옥(玉)에 어복(魚復)을 보는 것 같으며 정사(情事)의 비롯 됨은 화마(火馬)에서 펼쳐지도다.

 

무덤의 투장을 파헤침은 실로 하담공이 감사로 와서 징청(澄淸)한 탓이고

 

위토를 의논해서 장만함은 이에 양진(養眞) 옹이 힘을 다해서 계획함이라

 

무릇 묘전의 의물(儀物)이 모두 새로움은 당일의 느낌에서 비롯되고 재각(齋閣의 옛과 같음은 오히려 뒷사람이 보기에 한스럽다

 

하물며 지금은 세월이 오래 지나서 최각(최각)이 무너지고 기울어졌으나 세가(勢家)사람에게 빼앗긴 바 되지않았다  -- 쓰 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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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김정중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정중
작성일

  능동재사    일생당      음수재    상락재    정립이......?!@#$%

김영윤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영윤
작성일

  만사문집중의 일생당 상량문 잘 보았습니다
일생당 소개 부탁드림니다
사진 작업 잘하시면 워드의 수고는 덜으셔도 될것같습니다

깅윤만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깅윤만
작성일

  잘 읽어 보았습니다.
만사문집은 어느 분의 문집이고 일생당은 어느 집을 이르키는 가요?

김항용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항용
작성일

  찾고 찾던 상량문입니다. 이로써  능동의 구재실에 대한 상고가 가능해졌습니다. 아울러 논란이 되었던 재실명 음수재에 대한 것도 문헌증거로 정리되구요. 감사합니다. --<日生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