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안동김문 詩·書·畵찾기♠ 발표자료 ② (김효인,김방경 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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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1-23 07:07 조회2,255회 댓글0건본문
지난해 12월부터 수집 분석하기 시작한 고려시대 선조 筆蹟과 墓誌銘을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이번주 일요일 행사에서 [고려시대 선조 필적과 묘지명] 찾은 결과에 대해서 본인에게 주제발표를 하라는 하명이 있어 심적 부담이 매우 큽니다.
너무 복잡해서 자꾸 엉키고 정리가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개시판에 게재하다 보면 정리가 될까 해서 올려볼까 합니다. 양해하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수정해야 하거나 보충할 자료가 있으신 종친께서는 많이 많이 지적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선안동김문 詩·書·畵찾기♠ 발표자료 ② (김효인,김방경 필적)
Ⅱ 고려시대 선조 필적을 찾아서
1. 상서공 김효인
1) 상서공 김효인 문헌기록
▣ 안동김씨 족보
公性嚴毅 善隸字 文章事業 傑出一世 事見勝覽
師事致仕英烈公琴儀 名冠士林 早年登第 世稱琴學士 玉筍門生
筆跡在 淸河內延寺 靈巖道甲寺 康津月南寺 遺基等地 而俱以君命書碑文
공은 성품이 엄숙하고 굳셌으며, 예서(隸書)를 잘 썼다. 문장(文章)과 사업(事業)이 한 시대에 걸출(傑出)하였으니, 그 일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보인다.
나이가 들어 벼슬을 그만 둔 영열공(英烈公) 금의(琴儀)를 스승으로 모셨는데, 이름이 사림에서 으뜸이었다. 젊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니 세상에서 칭하기를 “금학사옥순문생(琴學士玉筍門生)”이라 하였다.
필적이 청하(淸河)의 내연사(內延寺), 영암(靈巖)의 도갑사(道甲寺), 강진(康津)의 월남사(月南寺) 등지에 있는데, 모두 임금의 명으로 비명(碑銘)을 쓴 것이다.
▣ 근역서화징 (1928, 오세창)
본관은 안동, 벼슬은 병부상서 한림학사
성격이 엄하고 굳세었다. 젊어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고 글씨도 잘 썼다. <고려사>
고종11년 甲申(1224)에 세운 보경사 원진국사비는 이송로가 글을 짓고 보문각 교감 김효인이 글씨 및 전액을 썼으니 청하 내연산에 있다. <해동금석총목>
글자체는 조금 살이 쪘으나 그래도 골력이 원만하고 굳세며 맑고 아리따워 사랑할 만하다. <서청>
▣ 신고 한국서예사 (1975, 김기승)
<서예부흥의 3대기수>
고종시대에는 고려문화의 황금기를 이루었다. 따라서 서예도 중기말의 침체상태에서 재흥의 활기를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즉 고종대 반세기간에 서예부흥의 3대기수가 나타났다.
우선 문호 이규보를 비롯하여 집권자 최이, 한림학사 병부상서 김효인 등 3거두가 모두 당대의 명필이었다. 이 3대가 중에서도 김효인의 글씨가 가장 뛰어났으며 그의 書蹟도 두 개의 名碑에 남아 있다.
김효인은 일세의 文章家이기도 했었는데 文才, 書才를 兼全한 것이 이규보와 쌍벽을 이루었다. 그러나 글은 역시 이규보의 존재가 더 컸고, 글씨는 김효인이 더욱 빛나는 존재였다.
<김효인의 두 개 名碑의 書蹟>
본관은 안동, 충렬공 김방경의 아버지. 벼슬은 병부상서 한림학사에 이르렀다.
그는 특히 서예를 잘 쓴 당대의 명필이었다. <書鯖>에서 그의 書風을 "字體雖微帶肉 而骨圓勁 淸婉可愛" 라고 평하였다.
그가 쓴 書蹟이 보경사의 원진국사탑비와 송광사의 진각국사원소탑비에 유존되어 있다. 경상북도 영일군 송라면 중산리의 보경사 경내에 서 있다.
김효인이 碑書를 쓴 또하나의 진각국사 원소탑비는 전라남도 순천군 송광면 송광리의 송광사에 있다. 그러나 이 비는 일찍이 倒潰(도궤)되어서 斷石으 유존되어 있는데 비신 하부의 좌반부 뿐이다. 단석은 高가 3척8촌, 橫이 2척1촌인데 거기 잔존한 비문은 16행이다. 입비년대는 그 이듬해 (1224)이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9 (199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보경사 원진국사비>
비는 입적 3년 뒤에 세워졌는데, 비문은 당대의 문신 이공로가 지었고 김효인이 썼다. 김효인은 충렬왕 때의 명장 김방경의 아버지로 글씨에 뛰어났다.
따라서 이 비문은 구양순체의 글씨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활달함을 잘 살렸다.
<서예>
고려 중기에 이르면 우리나라의 서예사상에 큰 변화를 일으킨 대가가 나타났으니 그가 곧 坦然이다. 그는 왕사와 국사를 지낼 정도로 학문과 덕이 높은 고승이었으나, 일반적으로 불법보다는 글씨의 명가로 이름이 높았다.
그의 글씨는 구양순체 일색이던 당시의 전통을 깨트리고 왕희지의 서풍에 기초를 둔 서법을 창출하였다. 그의 글씨로 전하는 것은 문수원비인데, 이 비는 현재 없어졌으나 탁본이 전하여지고 있다. 그 글씨는 왕희지의 <집자성교서>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왕희지의 글씨에서 볼 수 있는 경직한 맛이 전혀 없고 운치가 넘치는 유려함에 강철과 같은 힘이 들어보인다.
그의 영향은 상당히 오래 지속되어 탄연의 문인 기준(機俊)은 탄연의 글씨와 구별할 수 없들 정도로 훌륭한 작품을 남겼는데, 단속사 대감국사비가 바로 그의 글씨이다.
같은 탄연의 서법으로 쓴 것으로는 운문사 원응국사비가 있으나 쓴 사람의 이름이 마멸되어 알아볼 수가 없다.
12세기에 이르러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한 뒤에는 문인들은 모두 활기를 잃어 문학,예술 전반에 걸쳐 크게 쇠퇴하였는데, 서예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은 고종 말기에 최씨정권을 몰아낼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동안 우수한 작가로서는 유공권, 김효인 등이 있다.
김효인은 고종 때의 사람인데 보경사 원진국사비 (보물 제252호)는 탄연의 서법을 계승한 명작이다.
2) 상서공 김효인 필적 탐구
1-1. 보경사 원진국사비 (1224, 김효인 書)
○ 비석 실물
- 보경사 원진국사비 (보물 제 호) 로 경북 포항 보경사 내에 위치
○ 탁본 실물
- 全面탁본 실물1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에 보존 ( × cm)
- 全面탁본 실물2 : 한국금석문대계에 게재되어 있는 全面탁본은 장서각 소장 全面탁본과 다른 것으로 현재 소재는 확인 못함
○ 탁본첩
- 탁본첩1 : [대동금석서]에 部分탁본 1점이 있는데, 이 탁본은 [국역 근역서화징]에 전재된 탁본으로 비의 맨위 중간 부분이다.
- 탁본첩2 :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조속의 금석청완에 탁본 1점이 있는데 비의 어느 부분인지 확인하지 못했음 <※항용종친 비디오 촬영>
<항용종친 확인내용>
가)1P:비명제목글씨(圓眞國師碑銘)를 원문의 글씨보다는 약 50% 축소된 글자로 제작. 좌우 2열로 나누어 3자씩 배열.
나)2P, 3P:비문 중앙의 일부분을 각 장 13행 8열로 약 200여 자 제작.
- 탁본첩3 : [한국금석문대계]에 全面탁본과 部分탁본 1점이 있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있는 部分탁본은 [한국금석문대계]에 있는 部分탁본을 전재한 것인데, 비의 맨오른쪽 위 부분이다.
※ 全面탁본의 맨 왼쪽 둘째 줄에 "將士郞大官署丞兼寶門閣校勘臣金 孝印奉 宣書" 글씨를 희미하게 확인할 수 있음
- 탁본첩4 : [장서각소장탁본자료집1]에 全面탁본과 部分탁본 (상1, 상2, 하1, 하2)이 있다.
※ 全面탁본의 맨 왼쪽 둘째 줄에 "將士郞大官署丞兼寶門閣校勘臣金 孝印奉 宣書" 글씨를 희미하게 확인 가능
1-2.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1238-1241 또는 125○, 김효인 書)
○ 비석 실물
-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보물 제 호)가 전남 강진 월남사지에 있는데
비석 前面 (이규보 撰, 김효인 書)은 깨어져 없어지고 後面(최자 撰, 탁연 書)은 일부 존재
○ 비 단석 실물
- 비 단석1 : 송광사에 있었던 비 前面 단석은 현재 소재 불명
조선금석총람에 송광사에 있다고 설명하고 게재한 비 단석 탁본이 있는데, 현재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비 단석 실물과 같은 것임. 따라서 조선금석총람이 간행되는 1919년 이전에 송광사에 있었던 비 단석이 어느 시기엔가 (?○○○○년 광주박물관 개관시) 광주박물관으로 이관된 것으로 판단됨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비 前面 단석 (78×98cm)
- 비 단석2 : 1972년 비 주변 대밭에서 민현구 교수가 수습한 비 前面 단석 (8○cm*55cm)은 현재 소재를 확인하지 못했는데, 비 윗부분 가로7○행중 4-21행, 세로34열중 13-43열에 해당됨
○ 탁본 실물
- 全面탁본 실물1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는 탁본( × cm),
○ 탁본첩
- 탁본첩1
대동금석서에 실려 있는 김효인 書 수선사비 (송광사 진각국사 원소탑비) 탁본은
비의 위에서 아래로 7∼16행, 우에서 좌로 1○∼14열 부문의 45글자 탁본으로
1972년 민현구 교수가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주변 밭에서 수습한 비 前面 비편과 8글자가 중복된 탁본임
- 탁본첩2
장서각소장탁본자료집1에 全面탁본 1점과 部分탁본 4점 (상1, 상2, 하1, 하2)이 있음
※ 全面탁본의 맨 오른쪽 둘째 줄에 "將士郞 中書舍人 知制誥太子司義郞賜紫金魚袋臣金 孝印奉 宣書" 글씨를 희미하게 확인 가능,
※ 또한 비 後面 (1250, 최자 찬, 탁연 서) 에 진각국사의 문도 이름이 열거되어 있는데 "秘書監 金孝印"을 확인할 수 있음
○ 학문적 연구 동향
월남사지 진각국사비에 대하여는 학문적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는데, 다음과 같다.
- 허흥식의 [진각국사 혜심의 원비와 해석의 보완] : 계간 정신문화연구 제16권 (1993년)
- 「월남사지 진각국사비의 비음기에 대한 일고찰」 (민현구, 1973, 목포대학교박물관,
『진단학보』36집, 서울 진단학회 1973)
1-3. 도갑사에 있었다고 하는 김효인 書 필적
○ 족보에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 어느 비인지? 전혀 확인이 불가능하고 탁본이나 문헌기록 등을 전혀 발견할 수 없음
○ 옛날에는 도갑사에 말사가 13개나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3개밖에 남아있지 않음. 추측컨대 없어진 10개의 말사중 진각국사와 관련된 말사 어딘가에 세워진 어느 비가 아닌가 생각할 수 있음
3) 건의사항
○ 안동김씨 대종회보 題號를 상서공 휘효인 필체를 集子? 하여 인쇄하면 무엇보다도 의미가 클 것임. 기타 다른 문중 인쇄물 발간시 겉표지 書名에 활용하여 주기를 건의함
2. 충렬공 김방경 필적
1) 충렬공 김방경 문헌기록
▣ 근역서화징 (1928, 오세창)
자는 본연. 본관은 안동. 학사 김효인의 아들. 벼슬은 평장사 상락공에 봉해졌다.
학문에 뜻을 두었고 글씨도 잘 썼다. <고려사>
▣ 신고 한국서예사 (1975, 김기승)
<憂國如家의 김방경>
김방경(1212-13○○)은 고종대의 명필 김효인 한림학사의 아들로서 부전자전의 서예 명문이었다.
본관은 안동이요, 신라 경순왕의 원손이다. 그런데 그는 나약한 시서풍류가가 아니고, 실로 우국일념의 고려 명장이었다.
<중략>
그의 書蹟이나 금석문의 書蹟등 유존물이 없으나 <? 文齋 書畵譜>에 "志學善書(지학선서)" 라고 평하고 있다.
2) 충렬공 휘방경 필적탐구
○ 필적1
- 족보에 충렬공 휘방경 어고필적 [상서공 유묵 원진국사비명]이 게재되어 있는데, 아버님이신 상서공 김효인께서 書하신 보경사 원진국사비 題額을 충렬공 휘방경께서 써서 보관해 온 것으로 판단되는데, 다른 기록은 전혀 발견할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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