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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先안동김씨 詩·書·畵찾기♠ 발표자료 ⑤ (김방경 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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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1-25 04:13 조회1,72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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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환 종친님! 감사합니다.



충렬공 묘지명 내용이 길고 한자가 너무 많아서 타이핑을 못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많은 분량을 게재하여 주셔서 고맙습니다.



묘지명을 정리하는 일환으로 영환 종친님께서 게재하여 주신 그대로 인용하여 충렬공 김방경 묘지명을 정리하였습니다. 양해하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先안동김씨 詩·書·畵찾기♠ 발표자료 ⑤ (김방경 묘지명)





묘지명-2 김방경 묘지명



○ 제액 : 고려국상락공지묘지

○ 연대 : 충렬왕26년(원 대덕4년 1300) 경자 9월 일

○ 찬자 : 이진 (익재 이제현의 부)

○ 소재

- 원래 묘지 : 확인 못함

- 필사 묘지 : 안동김씨대종회 (후손 윤회 書)

<영환종친 게시자료>

墓誌의 실물은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묘지문만 보첩에 전하여 옴

일설에는 능동 충렬공 묘소에 묻혀 있다고도 하는데 이도 정확히 확인하지

못했음

<참고문헌>

-김용선 신자료 고려묘지명 17점 (역사학보27 1988)

-고려묘지명집성 (1993, 김용선, 한림대)

-고려사 104 김방경전

-안동김씨대동보(서울 1979)









▣ 김용선 신자료 고려묘지명 17점 (역사학보27 1988)



김방경 묘지명의 발견장소 및 시기는 미상이며, 원래의 형태도 어떠하였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1980년에 간행된 안동김씨대동보에는 후손이 쓴 묘지의 필사본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에 의하면 묘지의 본문은 1행당 47자씩 규칙적으로 구분되어 있다. <안동김씨대동보1, 1980, p64, 서울> 이 필사는 1979년에 후손인 김윤회가 하였다.



따라서 이 구분은 원래의 묘지에 의한 것이 아닌가 짐작되므로, 본고에서는 이 구분을 따르기로 하였다. 아울러 동보에는 김방경의 묘지와 아울러 그의 행장도 소개되고 있는데, 이 행장은 묘지보다 약 네배가 넘는 분량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묘지명에 빠져있는 내용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예컨대 김방경의 입사 과정에 대하여 묘지에는

"기자호관 능어이간 이장군겸급사중" 이라고 하였으나



행장에는

"연16 이삼한공신태사대광일긍지음 선양온사동정 대정 수위태자부견룡 배산원겸식목녹사" 라고 자세하게 밝혀놓은 것을 대표적 사례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고려사 104 소재의 김방경전의 기사와 대비해 볼 때 그 찬자는 이 행장을 원사료로 삼은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이 행장은 지정10년(1350, 충정왕2년 경인)에 예문관대제학 등의 관직을 역임한 安震이 편찬한 것이다. 그리고 고려사 104 김방경전에는 그의 입사에 대하여 "고종조 연16 이음보산원겸식목녹사" 라고 밝혀 놓고 있다.



그러므로 김방경의 묘지명을 사료로서 이용하려 할 때에는 그의 행장을 아울러 참조하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김방경은 충렬왕26년(1300, 원 대덕4년) 89세로 사망할 때까지 3남3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제1남이 선, 제2남은 흔이며, 제3남은 다음에 소개할 순이다.









▣ 안동김씨 족보



김방경 묘지명 (1300년, 이진 찬)



대덕(大德) 4년 경자(庚子) 9월

전 정헌대부 밀직사 좌승지 판비서시사 문한학사 충사관 수찬관 지제고

(前 正獻大夫密直司左承旨判秘書寺事文翰學士充史館修撰官知制誥)

이 진(李 ) 지음(撰)



西紀2002年 1月 忠烈公 22世孫 솔내 榮煥 옮김







고려국 상락공지묘 지문(高麗國 上洛公之墓 誌文)



무릇 천하(天下)에서 존경(尊敬)을 받는 것이 세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덕(德)이요, 둘은 수(齒=壽)요, 셋은 벼슬(爵)이니



군자(君子)가 처세(處世)함에 그 하나 둘을 얻기도 어렵거늘 하물며 그 셋을 다 얻을 수 있겠는가? 그 세가지를 결(缺)함이 없는 분은 오직 우리 상락공(上洛公)뿐이다.





공(公)의 성(姓)은 김(金)이요 휘(諱)는 방경(方慶)이니 영가군(永嘉郡)사람이다. 증조(曾祖)는 사호(司戶)벼슬을 지내신 의화(義和)요 증 검교 군기감(贈檢校軍器監)이시고

조(祖)는 장야서승 겸 직사관(掌冶暑丞兼直史館) 민성(敏成)이시며 증 은청광록대부 상서우복야(贈銀靑光祿大夫尙書右僕射)이시고

고(考)는 정의대부 병부상서 한림학사 충사관 수찬관 지제고(正議大夫兵部尙書翰林學士充史官修撰官知制誥) 효인(孝仁)이며 증 금자광록대부 중서령(贈金紫光祿大夫中書令)이시니

모두 공(公)으로 인(因)하여 추봉(追封)된 것이다.

비( )는 원흥진 부사 낭장(元興鎭副使郎將) 김해부 송기(金海府宋耆)의 따님이시다.







공(公)은 천성(天性)이 충직(忠直)하고 근면(勤勉)하시며 공손(恭遜)하시고 검소(儉素)하시며 신의(信義)있고 후덕(厚德)하시며 과묵(寡默)하고 엄숙(嚴肅)하시며



비록 무관(武官)으로부터 출발(出發)하였으나 관리로서의 재간(才幹)이 능(能)하시어 장군(將軍)으로서 급사중(給事中)을 겸하시고 혹은 어사중승(御使中丞)을 겸(兼)하시고 혹은 금오위 대장군(金吾衛大將軍)으로서 지각문사(知閣文事)와 또 지어사대사(知御使臺事)를 지내시고 또 어사대부(御使大夫)을 지내시고 대각(臺閣)을 역임(歷任)하면서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게을리 하지 않으시고 매사를 결단(決斷)함에 있어 신명(神明)하고 늠름(凜凜)하고 엄숙(嚴肅)한 기풍(氣風)이 있어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무서워하였다.



혹은 백성들의 소원에 따라 서북(西北)지방을 여러 번 진압(鎭壓)하시고 은혜(恩惠)와 위엄(威嚴)을 병용(倂用)하니 그 지방(地方)의 민요(民謠)는 지금까지도 공(公)을 사모(思慕)하고 있다.







국가(國家)가 경오년(庚午=1270)을 당하여 강화(江華)에서 다시 송경(宋京)으로 나오자 역신배(逆臣輩)들이 난(亂)을 일으켜 남하(南下)하니 공(公)이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서 추토사(追討使)가 되어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진도(珍島)를 포위(包圍)하고 익년(翌年) 5월까지 대전(大戰)을 15 차례를 거쳐 진도를 평정(平定)함으로써 마침내 금자광록대부 수대위 중서시랑 평장사 판리부사 대자대보(金紫光祿大夫守大尉中書侍朗平章事判吏部事大子大保)로 배명(拜命)하였다.



이번 싸움에서 도망(逃亡)한 적도(賊徒)들이 다시 탐라(耽羅)로 들어가 멀고 험함을 믿고 방자한 짓을 하여 또 공(公)으로써 행영중군 병마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를 삼아 계유(癸酉) 4월 28일에 전함(戰艦)을 이끌고 큰 바다를 건너 적진(賊陣)을 소탕(掃蕩)하니 마치 큰 산(山)이 계란(鷄卵)을 누르는 것 같은지라 이로부터 삼한(三韓)이 소생(蘇生)하는 희망(希望)이 보였다.





원조(元朝)에서 청(請)하여 침전(寢殿)에 모시고 가곡(歌曲)을 울리며 잔치를 베풀어 극진히 위로(慰勞)하고 수대사 개부의 동삼사 문하시중 상주국 판어사대사(守大師開府儀同三司門下侍中上鑄國判御史臺事)를 봉(封)하였다.



그 해에 원제(元帝)가 조서(詔書)를 내려 초청(招請)하여 광한전(廣寒殿)의 승상서열(丞相序列)에 앉히고 대연(大宴)을 베풀고 원제(元帝)께서 친히 탁상(卓上)의 진미(珍味)를 주시고 이어서 금부(金符)와 금안장(金鞍)과 백은정(白銀鋌)과 많은 폐백(幣帛)을 상(賞)으로 내리시니 천하(天下)에서 보고 듣는 사람들이 부러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삼한(三韓)에도 인물(人物)이 있음을 가히 알게 되었다.







이에 또 다시 동정(東征)의 명(命)을 받고 갑술(甲戌=1274)년에 일본(日本)을 정벌(征伐)하여 포로(捕虜)와 참수(斬首)한 자가 대단히 많았다.





몇 해 후 기묘(己卯=1279)년에 두 번째 글을 올려 퇴직(退職)을 원하였으나 상왕(上王)께서는 매양 중사(中使)를 보내어 간곡(懇曲)히 말하기를 "내가 경(卿)에게 궤장( 杖)을 주고 싶었으나 시국(時局)이 다난(多難)한 때이므로 예의(禮儀)를 갖추지 못하니 내 마음이 불안(不安)하노라, 청(請)하니 경(卿)이 다시 일어나 일을 보아 달라"고 하니 공(公)은 퇴임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경진(庚辰)=1280)년 겨울에 원경(元京)에 들어가니 원제(元帝)는 중봉대부 관고려군 도원수(中奉大夫管高麗軍都元帥)를 제수(除授)하였다.





신사(辛巳)년 여름에 또 일본을 정벌하러 들어갔는데 남송군(南宋軍)의 도착(到着)시기(時期)가 삼 개월이나 늦어짐으로 인하여 전함(戰艦)은 부패(腐敗)하고 질병(疾病)은 발생(發生)하여 원(元)나라 군사들이 매양 군대(軍隊)를 철수(撤收)]하여 돌아가기를 권유(勸誘)하였으나 공(公)은 불가(不可)하다고 강력(强力)히 주장하고 여러 번 전쟁(戰爭)을 치른 후에 부득이 환국(還國)하였다.







계미(癸未1283)년에 또다시 소장(疏章)을 올려 퇴임(退任)할 것을 간청(懇請)하니 왕은 부득이 하여 삼한벽상 추충정난정원공신 광정대부 삼중대광 판도첨의사 상장군 판전리사사 세자사(三韓壁上推忠靖難定遠功臣匡靖大夫三中重大匡判都僉議事上將軍判典理司事世子師)를 더 봉(封)하고 이내 치사(致仕)하게 하였다.



그러나 왕께서 마음속으로 미안(未安)하게 생각하여 병신(丙申=1296)년 겨울에 또 관작(官爵)을 상락공(上洛公)으로 가봉(加封)하고 식읍(食邑) 일천호를 봉하였으나 실봉(實封)은 삼백호(三百戶)였다.







공(公)께서 재직(在職)시에 항상(恒常) 밤에는 일찍 주무시고 새벽에는 일찍 일어나 앉아서 아침을 기다리시고 이내 수레에 오르시기를 전과 다름없이 한결같이 하였으며 나라의 안위(安危)에 대하여 항상(恒常) 염려(念慮)하셨다.







대덕4년(大德4년=1300년) 8월 16일에 병환(病患)으로 인하여 백목동(栢木洞) 영계리(영溪里)에서 돌아가시어 9월 초3일에 예안현(禮安縣) 서쪽 산록(山麓)에 유교(遺敎)에 따라 안장(安葬)하였다. 아! 슬프다.



난(難)을 구원(救援)하고 백성(百姓)을 구제(救濟)하고 나라를 다시 편안케 하였으니 덕(德)이 그 하나요, 연세 89세에 돌아가시니 수(壽) 또한 하나요, 상국 도원수(上國都元帥)로서 작(爵)을 더 봉(封)하였으니 벼슬이 또 하나이다. 세 가지가 다 구비(具備)하고 결함이 없는 것은 대개 실지(實地)대로 기록(記錄)할 뿐이오, 과장해서 찬미(讚美)하는 것은 아니다.







공(公)의 배위(配位)는 거서랑 지제고(起居郞知制誥) 박익정(朴益旌)의 따님으로서 삼남 삼녀를 나셨으니



장자 선( )은 봉익대부 부지밀직사사 전법판서 상장군(奉翊大夫副知密直司事典法判書上將軍)을 지내시고 공(公)보다 먼저 돌아가셨으며,



차남 흔( )은 관고려군 만호 진국상장군 광정대부 도첨의참리 상장군(管高麗軍萬戶鎭國上將軍匡靖大夫都僉議參理上將軍)을 지내시고



삼남 순(恂)은 봉익대부 밀직사부사 판비서시사 문한학사(奉翊大夫密直司副使判秘書寺事文翰學士)를 지내시고





딸 한분은 참지성사 조계순(參知政事 趙季恂)의 2자(二子) 변( )에게 출가(出嫁)하였는데 변( )은 봉익대부 부지밀직사사 상장군 전리판서(奉翊大夫副知密直司事上將軍)을 지냈다.



둘째따님은 지첨의부사 김광원(知僉議府事 金光遠)의 장남(長男)인 조헌대부 신호위 보승장군(朝顯大夫神虎衛保勝將軍) 김원충(金元沖)에게로 출가하였고,



셋째따님은 통례문사(通禮門事) 권윤명(權允明)에게로 출가(出嫁)하였다.





전취 박씨(前娶 朴氏)는 공(公)보다 먼저 돌아가시어 또다시 손씨(孫氏)를 재취(再娶)하여 딸 한 분을 나셨는데



그 따님은 통례문기후(通禮門 候) 채의(蔡宜)에게로 출가(出嫁)하였다.



여러 자손(子孫)들이 계속(繼續) 줄을 이어 도한 창달(暢達)하고 난초(蘭草)를 꽂고, 옥(玉)을 꽂듯이 문호(門戶)에 광채(光彩)가 빛났다.





공(公)께서 연세가 90이 되셔도 홍안(紅顔)소년(少年)같고, 손자(孫子)의 손자(孫子)를 생전(生前)에 보셨으니 이는 또한 특이(特異)한 일이로다.



무릇 전쟁(戰爭)을 할 때에도 항상 원(元)나라 군마(軍馬)와 더불어 출입(出入)응대(應對)함에 있어 오로지 법(法)에 의해서 처리(處理)하였으며,



비록 온화(溫和)스럽게 하면서도 친압(親狎)하지 않았으며 상대방이 비록 항거(抗拒)하여도 노(怒)하지 않았으며 어려운 일을 당하여도 구차하게 모면하려고 하지않고 죽음이 옳다고 생각하면 삶을 돌아보지 않았으니



이와 같은 하나 하나의 공업이 모두 녹권(錄券)과 국사(國史)에 실려 있음으로 여기에서는 자세(仔細)히 말하지 않고 다만 대강(大綱)만 기록(記錄)하노라.



나는 과갈(瓜葛)의 친분(親分)도 있고, 또 특별(特別)히 알아 주시고 대우(待遇)를 받은 자(者)이며, 또 사자(嗣子)이신 상국(相國=나라의 재상)의 간청(懇請)도 있음으로 해서 삼가 붓을 잡아 명(銘)을 쓰노라.





명(銘)하기를



큰집이 사람을 가리니 오직 기둥과 초석(礎石)이요



한서(寒暑)가 침노치 못하고 풍우(風雨)도 두렵지 않을새라



어천만년(於千萬年)을 두고 무너짐이 없으시라



높고 높으신 우리 공(忠烈公)은 주공(周公)에 비(比)하여 또한 크시며



좌명(佐明)의 공(功)과 정란(定亂)의 책(策)으로



지금까지 삼한(三韓)의 백성(百姓)들이 그 혜택(惠澤)을 받았으며



국노(國老)께서 영원(永遠)히 가시니 천지(天地)가 아득하고



사람들은 갈 바를 몰라 금석지감(今昔之感)을 금치 못하노라



고향(故鄕)승지(勝地)의 만산송백(滿山松栢)은 그 조상(祖上)의 영험(靈驗)있어



길지(吉地)를 택(擇)하여 유택(幽宅)을 정하니 유원(遺願)이 분명(分明)한데



무엇을 다시 택(擇)하리오



공(公)은 자신(自身)이 홀로만 편안(便安)하려 하지 않으시니



자손(子孫)이 그 음덕(蔭德)을 입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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