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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안동김씨 詩·書·畵찾기♠ 발표자료 ⑥ (김순 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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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1-26 00:29 조회2,06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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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명-3 김순 묘지명



○ 중대광판삼사사보문각대제학상호군 김순 묘지명 병서

○ 연대 : 1321년 대원 지치원년 신유 10월 14일 閔漬 찬

○ 현재 소재

- 1942년(임오)에 경기도 개풍군 임계면 가정리 마산의 동쪽 기슭에서 발견

<참고문헌>

-김용선 신자료 고려묘지명 17점 (역사학보27 1988)

-고려묘지명집성 (1993, 김용선, 한림대)

-고려사 104 김방경전 부김순전

-안동김씨대동보 (서울 1979)







▣ 김용선 신자료 고려묘지명 17점 (역사학보27 1988)



김순 묘지명

대원 지치원년 신유 10월 14일

閔漬 찬



김순의 묘지는 1942년(임오)에 경기도 개풍군 임계면 가정리 마산의 동쪽 기슭에서 발견되었다. 명문은 몇 군데 결락된 곳이 있으나 대부분은 훌륭하게 판독되어 있다.



김방경의 제3자인 김순은 15세에 음서를 통하여 입사하였으며, 22세인 충렬왕5년(1279, 원 지원16년 을묘)에 과거에 급제함으로써 본격적인 관리생활을 하게 되었다.



충숙왕8년 (1321, 원 지치1년, 신유)에 사망하였는데, 許珙의의 녀와 결혼하여 4남 3녀를 두었다. 그중 장남 영돈의 묘지가 이번에 소개할 차례이다.









▣ 안동김씨 파보 (안렴, 익원)



문영공 (휘순) 묘지석 발견 및 이장 경위



오호라 공의 묘소는 실전되어 未知何代而歲 壬午년 봄에 개풍군 임계년 가정리 마산 동록 장씨 성을 가진 무덤 부근에서 誌石을 발견하여 奉審後欲爲[人+乃]舊守護卽 張姓之?惡非常勢



부득이 익년 癸未 봄에 시흥군 안양시 관양1동 후록 양좌지원에 옮겨 모시었다. 이때 배위 제평군부인 양천허씨 영단을 설단하였다.



이 산은 익원공 16대손 讚源 소유 선산 내의 한 葬地로 헌납한 것이다.



이제 비석을 세우고 用閔公所撰誌文記之 盖閔公 史家臣匠 且當時托契深厚記實楷白 以後歲傳聞搜記 不敢窺其萬一者也 但恨綠於剝落 間有缺者 不敢恣意補識 然一 猶知其全鼎 ?瑕不害於[王+業]玉云[弓빼고彌]



공몰후 625년 갑신 10월 일

문영공 21대손 若浩 謹識

문영공 21대손 舜默 謹書幷篆

문영공 22대손 達演 幷識



追記

그후 讚源씨 후손이 이 산을 타인에게 매도할 때에 문영공 묘 영역 300여평을 우리파 문중에 희사하여 제,안,익 3파 공동명의로 등기를 필하였다.









▣ 안동김씨 파보 (안렴, 익원)



중대광 판삼사 보문대제학 상호군 김순 묘지



옛적에 이르기를 君子라고 하는 것은 德行을 두고 말한 것이냐? 功業을 두고 말한 것이냐? 하면 오직 덕행이요 공업은 아니다.



왜냐하면 덕행은 마음에 있는 것이요 공업은 때(時機)에 있는 것이니 마음에 있는 것은 사람이 수양할 수 있는 것이요 때에 있는 것은 하늘이 주는 바이니 사람이 수양할 수 있는 것을 수양하는 것이 군자이다.



무릇 덕행은 忠孝가 근본이 되므로 능히 충효로써 當世에 입신양명한 분은 오직 우리 판삼사 相君이 계실 뿐이다.







공의 휘는 恂이요 자는 歸厚며 신라왕 金傅의 10세손으로 태어나시니 안동부는 즉 그의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고향이다.



증조의 휘는 敏成이시니 좌복야로 追封되고 장야서승 겸 직사관을 지냈으며

조의 휘는 孝印이시니 중서령으로 追封되시어 정의대부 병부상서 한림학사 충수관수찬관 지제고를 지내시고

고의 휘는 方慶이시니 元帝로부터 중봉대부 관고려군 도원수 추충정난 정원공신 광정대부 삼중대광 판도첨의사사 전리사사 상장군 상락군개국공 食邑 1천호를 宣授하니 實封은 3백호이며 돌아가신 후에 고려에서 선충협모 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을 贈職하고 시호는 忠烈이라 내렸다.



공의 어머님은 박씨요 중서사인 지제고 益旌의 따님으로서 陰平郡夫人을 봉하였다.







공께서 글씨를 잘 쓰심으로 비문을 많이 쓰시고 소년시절부터 학문에 힘쓰시고



先代의 蔭德으로 벼슬에 들어가 장생서승이 되었고 후에 별장이 되어 견룡행수직을 맡아서 비록 동으로 갔다 서로 갔다 하여도 그 뜻은 항상 문학에 두었으니 대개 부친(=휘방경)께서 왕조 兩代의 최고 벼슬인 將相을 지냈으나 오직 과거를 보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음으로 아드님(=휘순)이 능히 조부(=휘민성)의 업적을 다시 회복하기를 기원했기 때문이다.



공이 그러므로 힘써 배우기를 게을리 하지 않더니 至元 16년 춘계과장에서 금방 부장원으로 급제하여 그 해에 처음으로 섭랑장에 임명되더니 후에 다시 국학직강이 되시니 이는 공이 능히 부친(=휘방경)의 遺恨을 펴신 것이다.







이로부터 부친(=휘방경)께서는 막내아들(=휘순)을 더욱 사랑하여 항상 신변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시고 하정사로 가실 때도 꼭 데리고 다니녔으나 다만 일본을 정벌하러 가실 때는 따라오지 못하게 하신 것은 從軍하여 위태한 일에 참여치 못하게 함이었다.



공이 이에 출정행차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몰래 먼저 군함에 올라 타고 갔는데 마침내 부친을 호위하고 구원한 공이 자못 컸으니 이는 공이 오로지 충효로써 發奮(발문)하여 자신을 돌아보지 않은 것이다.







壬午(임오)년에 전중시사로 승진하고 그 이듬해에 상주판관으로 나가서 선정한다는 소문이 들어오니 1년도 못되어 불러들여 전법좌랑00 통예문사 고공정랑으로 薦擧(천거)되었다.







壬戌(임술)년에 남방사신의 명을 받고 선친(=휘방경)을 배행하여 고향 조부(=휘효인) 묘소에 다녀왔으며





戊子(무자)년에 비서소윤 지통예문사를 除授(제수)하더니 그해에 왕이 공을 명하여 세자부 행이별감을 삼고 사부의 책임을 위촉하였으며





壬辰(임진)년에 조현대부 전법총랑 지제고를 첨가 위임하더니 누차 승진되어 소부윤000학 군부총랑 전리총랑 조봉대부 비서윤 삼사우윤에 모두 三字銜(삼자함 : 奉朝賀봉조하 : 종3품으로 치사 후에 특별히 받은 직위)을 겸하였다.





元貞 乙未년 겨울에 과거로 선발된 동지들은 모두 당시의 명사들이라 크게 하려한 宴席(연석)을 베풀으니 0000사 朝野가 가상히 여기고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는 선친(=휘방경)에 대한 극진한 영광이요 효도인 것이다.







이해에 조의대부로 올라가고 丙申년에 세자사인을 겸하고 大德 丁酉년에 국학전주로 승진되고 또 봉열대부 밀직사 좌부승지로 천거되었더니 별안간 좌부승지 보문각 직학사로 승진되고







그 이듬해에 우승지 지판도사사를 더하고 매양 옮길 때마다 모두 三字를 겸하였다.



이해 봄에 南方으로 사신 갔다 돌아와서 다시 통의대부 광정부사 승지 성균제주로 임명하고 또다시 정중대부 집현전학사 좌산기상시를 배명하였다.



이해 7월에 다시 밀직사 우승지 국학제주 보문각학사 지민조사로 拜命하고 三字는 전대로 두었다.



8월에 봉익대부 삼사좌사 숭문관학사로 승진되고



9월에 또다시 정헌대부 밀직사 좌승지 판비서시사 충사관 수찬관 지제고 지군부사시가 되고



12월에 봉익대부 밀직사부사 문한학사를 배명하였다.







己亥(기해)년에 공계서 그칠줄을 아시고 벼슬을 사퇴하였다.







그 이듬해 8월에 선친(=휘방경)께서 세상을 하직하심으로 遺願(유원)에 의하여 고향 선영에 장례를 모셨다.





庚戌(경술)년 겨울에 선친(=휘방경) 산소에 제사를 지내고





壬子(임자)년에 다시 중대광 上洛君을 봉하여 선친(=휘방경)의 작위와 식읍을 이어 받았다.





己未(기미)년에 또 선친(=휘방경) 산소에 성묘차 가시는데 왕께서 季子(계자 =막내아들) 永煦를 시켜 모시고 배행케 하였으니 왕께서도 공의 행차를 극진히 배려한 때문이다.





至治원년 (1321) 辛酉에 어진 정승을 기용하기 위하여 공을 발탁하여 판삼사사를 삼고



8월에 또 보문각 대제학 상호軍을 명하였다. 그달 21일에 노환으로 자택에서 별세하시니 향년 64세이다.







공은 성품이 敦厚(돈후)하고 剛直(강직)하고 內柔(내유)하시며 孝悌와 忠信은 천하에 출중하였다.



아깝도다! 공의 才德으로 만일 몇해만 더 사셨더라면 국가의 이익과 혜택이 어찌 만민에 미치지 않았으며 명예와 지위도 어찌 이에서 그칠뿐이랴?





配는 광정대부 첨의충찬 수문전태학사 감수국사 판전리사사 세자사 증시 문경공 휘 許珙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4남 3녀를 낳으셨는데



장남 永暾(영돈)은 현재(*1321) 도관직랑 지합주사로 있고



2남 永暉(영휘)는 현재 흥위위 보승별장으로 있고



3남 斯順(사순)은 삭발하고 중이 되어 慈惠宗 大德이 되었고



4남 永煦(영후)는 사헌부 지평으로 있었다.





장녀는 입내시 중정대부 친어군대호군 鄭(마음심+)責(정책)에게로 출가하고



2녀는 대광 상당군 白 正(백이정)에게로 출가하고



3녀는 원나라 좌승상 아홀반의 아들인 사인 별리가불화에게로 출가하였다.







영돈의 문중에서 이미 장지를 德水縣 馬山 위에 잡아놓고 장차 장례를 지내려고 하는데 나(=민지閔漬)는 그(=휘영돈)의 선친(=휘순)의 친구인지라 공의 行狀을 가지고 와서 銘을 지어달라고 간청함으로 내가 비록 병들었으나 굳이 사양치 못하고 받아서 명을 쓰노라.





銘文에 이르기를



혁혁한 충렬은 동국의 황제의 讓位와 같고

(*분양이란 황제의 양위 요 임금이 분양에서 仙人과 나서 황제의 자리를 물려 주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



滿堂한 子姪들은 모두가 수재요 영재로서 白眉와 같이 우수하니

(*백미 : 여럿 가운데서 가장 뛰어남, 故 옛날 촉나라 마씨 집안 5형제중 눈썹이 하얀 마량이가 베일 뛰어났던데서 유래한 말)



당시에 이르기를 제일 어질다고 하였도다.



선친(=휘방경)의 遺恨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함이더니



공이 그 뜻을 이어 문학에 뜻을 예민하게 세우고



대대로 전해오는 조상의 법도를 본받아 시시로 錦囊이 찰만큼 시 짓기에 노력하더니

(*금낭 : 시 작품을 넣는 비단 주머니)



묘령 22세에 금방에 급제하여 이름을 사방에 떨치니



臺閣에서 傳播하는 告示文은 향기가 돌았도다.



한번 학문의 권세를 잡으니 형제가 列을 이루도다.



尊堂의 기쁜 눈물은 흘러 축하하는 술잔에 넘치고



생전에 정승을 지내어 검은 구렛나루에 金章이 빛나도다



힘껏 榮華와 충효를 다하여 고향 사람들이 애달피 하노라



자식된 도리를 다하니 만복이 내리도다



만년에 은퇴하매 하느님의 뜻이 담당하도다



마침내 先君(=휘방경)의 爵祿(작록)을 襲封(습봉)하니 門戶가 다시 빛이 나도다



정계에 참여치 않고 은퇴 후에 9년간의 세월을 허송하다가



별안간 極品宰相에 올랐으니 민생도 안정되고 나라도 태평하도다.



아직 돌아가실 나이도 아니신데 급작스럽게 황천길을 재촉하니



공에게 있어서는 여한이 없겠으나 나라를 위해서는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이에 銘을 새기니 흐르는 광채는 천만년 끝이 없으시리라





대원 至元 원년 辛酉 10월 14일



선수 조열대부 한림직학사 삼중대광 검교 첨의정승 우문관 대제학 감춘추관사 여흥군 閔漬 지음(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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