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여행 2---새해를 태백산 정상 천제단에서...(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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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12-20 11:12 조회1,397회 댓글0건본문
■ 충렬공 묘지명 (1300년 이진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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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술(丙戌=1286)년에는 조부(祖父=김민성)께서 애육(愛育)해 주신 은혜(恩惠)를 생각하여 휴가(休暇)를 얻어 성묘(省墓)하실 때 왕(王)이 막내아들(季子) 고공정랑(考功正郞) 순(恂=문영공)을 보내서 태백산(太白山)에 제고(祭告)하니 호위(護衛)하는 공경(公卿)들이 떠나는 길에 장막(帳幕)쳤다.
아마 분영(墳瑩)에 참배(參拜)하고 돌아오는 길에 향당(鄕黨)의 친구들을 위해 칠 팔일을 머무는데 부로(父老)들에게 말하기를 '가을 일철이 등장(登場)하여 인력(人力)이 부족(不足)한데 어찌 내가 오래 머물러 방해가 되게 하리오!'하고 가마를 명하여 돌아왔다.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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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왕에게 요청하여 고향 땅에 성묘하러 가게 되었는데 왕은 그의 아들 김순(恂)을 태백산 제고사(祭古使)로 임명하여 아버지를 따라 고향에 가게 하였다.
김방경이 친구들의 만류로 며칠을 묵게 되었는데 아들더러 이르기를 “지금 가을 곡식이 다 익어 베어 들일 때가 되였다. 백성들의 힘이 부족하여 다른 일을 할 짬이 없는데 어찌 오래 머물러 있어 그들을 번거롭게 만들겠느냐? 너는 이 길로 곧 돌아가도록 해라!”라고 하였다.
태백산사(太白山祠)
태백산의 산신을 모셨던 신당. 성현(成俔)의 ≪허백당집 虛白堂集≫에 그 산은 동쪽으로 뻗어 동해를 임하여 삼척부(三陟府)가 있고, 3도(道)의 사람들이 산정에 신당을 짓고 신상을 만들어 모셔놓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런데 예전에는 산신을 모시는 사람들이 줄을 이어 제사를 마치고는 신사 앞에 소를 매어두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갔다가 3일 만에 와서 몰고 가는 습속이 있었다. 잠시 소를 두고 갈 때 뒤를 돌아보면 신의 벌을 받는다고 하여 금기를 지켰다고 하는데, 소를 두고 가는 풍속을 퇴우(退牛)라고 한다.
그리고 이 산신은 매년 사월 초파일에 마을에 내려왔다가 5월 단옷날에 산으로 돌아간다고 하여, 이 신이 마을에 있는 기간 동안에는 마을사람들이 신기(神旗)를 만들어 읍의 서낭당에 모셔두고 그 앞에 제상을 차려놓고 빌고 정성을 드린다.
이러한 것을 미신으로 여긴 충학(沖學)이라는 중이 이 신사를 불살라 버렸다고 하는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는 당시 영동의 관찰사였던 김치(金緻)가 태백산사를 헐었다고 하였다.
아직도 이 지방에서의 산신에 대한 주민의 숭배는 여전한데, 현존하는 민속으로서 강릉의 단오제가 대관령산신을 맞아 별신굿을 하고 보내는 과정에서 산신을 맞아 모시고 보내는 과정은 그러한 유습이라고 생각된다. 현재 태백산 천제단에서 매년 개천절에 단군을 기리는 천제가 복원되어 행해지고 있다.
≪참고문헌≫ 朝鮮巫俗考(李能和, 啓明 19,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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