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유배길>(6)-유배일기를 통해 본 유배길(원로대신의 유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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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4-12-24 11:31 조회1,584회 댓글1건본문
<조선시대 유배길>(6)-유배일기를 통해 본 유배길(원로대신의 유배길)
1)원로대신의 유배길-이항복을 중심으로
이항복은 광해군때 인목대비의 폐비를 반대하다가 1618년(광해군 10) 1월, 63세의 연로한 나이에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 그 과정이 <백사선생 북천일록>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는 1617년(광해 9) 12월 19일 극변(極邊)에 정배하라는 명을 받고 거주지인 동강(東岡)에서 청파(용산구 청파동)로 향했다. 그러던 중 유배지가 평안도 창성, 함경도 경원, 삼수 등으로 수차례 변경되면서 여러날 동안 단자가 내려오지 않았다. 결국 해가 바뀌어 다음 해인 1월 6일에야 의금부에서 최종적으로 북청을 유배지로 결정했고, 8일에 출발하게 되었다.
압송관으로는 의금부 도사인 이승의가 배정되었다. 경기도 포천, 영평, 강원도 금성, 신안, 회양, 철령을 넘어 함경도로 들어가 안변, 덕원, 영흥, 정평, 함흥, 덕산, 홍원, 평포 등을 경유하여 북청에 도착했다. 그때 그가 철령을 넘으며 읊은 임금을 사모하는 시는 세인의 입에 회자되어 광해군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철령(鐵嶺) 높은 재에 자고가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삼아 띄어다가
님계신 구중궁궐에 뿌려본들 어떠하리
북청은 서울에서 1000리 길이었는데 <의금부 노정기>에 의하면 12일(1일 83.3리 기준) 내에 도달해야 하는 거리였다. 그렇지만 하루 평균 34.5리씩 길을 가서 29일 만에 도착했다. 규정보다 17일이 더 소요되었다. 뿐만아니라 도중에 머물러 있는 날도 7일 정도나 되었다.
이항복이 유배 가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자. 출발 후 1월 11일, 유배길목에 있는 포천의 선산에 들러 성묘를 하고 본격적인 유배길에 올랐다. 그런데 출발할 무렵 폭설이 내렸다. 그래서 친구들이 만류했으나 정해진 기한 때문에 지체없이 길을 떠났다.
그의 행차가 이르는 지역마다 수령이 미리 접경지역에 마중 나와 후하게 대접했고 고을사람들이 행차를 보기 위해 몰려 나와 성시를 이루었다. 특히 안변과 함흥에서 성시를 이룬 모습은 상세하고 잘 기록되어 있다.
또한 저녁에 숙소에 들면 해당 지역의 수령이나 지역 사족들이 와서 인사하고 접대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함흥에서는 관찰사, 도사, 판관이 모두 찾아와 인사를 했다.
유배길 도중에는 대체로 역점, 고을 읍내 등에서 투숙했으며, 간혹 중인이나 기생집에 묵는 경우도 있었다. 2월 3일 홍원에서는 읍성 남쪽에 있는 기생 조생(趙生)의 집에서 묵었는데 조생은 서울까지 이름난 기생이었다.
드디어 2월 6일 저녁 늦게 유배지인 북청에 도착했는데 관에서는 이미 강윤박의 집을 배소로 정해 놓고 병사(兵使)의 명령으로 집을 수리하여 살림도구와 여러 기물들을 완비하고 노비까지 마련해 두었다. 그러나 그는 노비 2-3구만 남기도 모두 돌려 보냈다.
이와 같이 이항복의 유배길은 죄인으로서의 모습을 거의 느낄 수 없다. 수차례에 걸친 친지 및 문인들의 전송을 받으며 출발하고, 시종하는 자제와 노비들이 모시고 길을 가며, 이르는 곳마다 수령들의 후한 접대와 보살핌이 이어졌다. 63세의 나이만 아니라면 유람길에라도 오른 듯한 모습이었다.
댓글목록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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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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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흥미 진진합니다. 유배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고 있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