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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유배길>(7)-유배일기를 통해 본 유배길(조정관료의 유배길)-묵재 이문건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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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4-12-25 20:33 조회1,880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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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유배길>(7)-유배일기를 통해 본 유배길(조정관료의 유배길)-묵재 이문건을 중심으로

 

 묵재 이문건(李文楗,1494-1567)은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경상도 성주에 유배되었다. 그의 유배길은 자신이 직접 기록한 <묵재일기>를 통해 상세히 파악할 수 있다.

 이문건이 유배가게 된 것은 조카 이휘(李輝)의 일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1545년(명종 즉위년) 8월 30일 명종 즉위와 관련하여 공신에 책봉되었는데 불과 며칠 뒤인 9월 10일 조카 이휘가 명종의 즉위를 부정하고 "서열이 아닌 어진 이를 국왕으로 모셔야 한다"고 주장하는 택현설(擇賢說)의 주모자로 몰려 추국을 받고 다음날 군기감 앞에서 능지처참을 당하는 상황에 처하였다. 이에 이문건은 9월 10일 관직을 사직하고 12일에는 청파에 사는 큰 누이 집으로 나아가 처분을 기다렸다.

 결국 그는 유배형의 일종인 안치(安置)형을 받았고 며칠이 지난 16일 새벽에는 의금부 서리 최세홍(崔世泓)이 찾아와 경상도 성주로 배소가 정해졌음을알리면서 마패가 나오면 다음날 바로 출발할 수 있다고 전했다. 이문건은 동부승지, 좌부승지, 우승지, 등 정3품 당상관직을  겸한 관료였기에 규정에 따라 의금부 서리가 압송관으로 배정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일기에는 최세홍이 찾아와 갓모자 1개, 목면1동, 솜고도1개, 흰 가죽신 1켤레, 분투 1개, 귀마개1개, 비옷용 베옷 1벌 등의 물품을 요구해 이를 보내주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낯선 곳으로 죄인생활을 떠나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직면한 유배인으로서는 압송관에게 지나친 물품을 요구까지 당하니 그 마음이 더욱 참담했을 것이다.

 그는 다음날인 17일 유배길에 올라 한강을 건너 경기도 양지, 좌찬역, 무극역, 충청도 괴산, 연풍을 지나 조령을 넘어 경상도에 들어가 문경, 유곡, 상주, 선산을 거쳐 11일 만에 성주에 도착했다.

 성주는 서울에서 630리이며, <의금부노정기>에 의하면 7일 반 일정으로 하루 평균 84리를 달려야 하는 거리이다. 그는 실제로 하루 평균 57.8리를 달려서 규정보다 3일이 더 늦은  11일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자신의 처가(처남-안동김씨 제학공파, 괴산 입향조 영상공 金錫, 당시 서울 주자동에서 살다가 기묘사화로 인해 은둔,  괴산군 문광면 전법리로 옮겨와 살고 있었음)가 있는 괴산에서 이틀을 머물렀기 때문에 목적지까지 그만큼 지체했던 것이다.

 구체적 유배길을 보면 압송관인 의금부 서리와 함께 동행하지 않고 따로 길을 갔다. 이에 따라 그는 9월 20일에 압송관보다 먼저 괴산에 도착했고 압송관은 이틀 뒤인 9월 22일 도착했다.

 이문건은 또한 괴산에 머무는 동안 후한 접대를 받았다. 괴산군수가 각종 물품을 보내왔고 아전, 지역 사족들, 친지들이 찾아 왔다. 그 뒤 23일에 다시 출발했는데 서울에서 데리고 온 노비 외에 사내종 4구, 말 3필을 추가로 거느리고 길을 떠났다. 9월 28일 성주에 도착했을 때는 아전 5-6명이 길에 나와 그의 행렬을 맞이했고, 읍성 아래에 있는 사장(沙匠) 김옥손의 집을 거처지로 정해주었다.

 이문건의 유배길은 원로대신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노비 6구와 말 4필 이상을 거느리며 가는 성대한 행차였다. 소요기간도 규정을 넘어섰다. 또한 의금부 서리가 출발할 때부터 물품을 요구하다가 괴산에서는 술주정까지 하는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댓글목록

솔내님의 댓글

profile_image 솔내
작성일

  유배길... 이문건(묵재)=영상공 김석의 매부...  흥미로운 연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