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水亭 小史>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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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12-28 18:09 조회1,263회 댓글0건본문
20. 종택터 발굴조사
2004년 봄, 포천시청에서 종택터의 기초조사 추진. 기초발굴조사비 4,000만원의 예산을 책정. 2004년 12월, 단국대학 매장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작업 실시
<2004.12, 김영환, 문온공 종택 발굴 참관기>
솟을대문이 있었던 주춧돌을 보면 솟을대문 좌우에 작은 방이 딸려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주춧돌이 또 있다. 음수재 솟을대문과 좌우 곁방을 연상하면 딱 맞을 듯 싶다. 이 대문은 금수정쪽을 향해서 나 있다.
지금은 뒤쪽(종택터에서 보면)으로 입구가 나 있지만 옛날에은 금수정 왼쪽 현재의 문온공 단소가 모셔져 있는 아래쪽이 입구였을 것을 짐작하기에는 모자람이 없다. 금수정쪽은 절벽이 10여미터이니 불가능 할 것이고,, 전에는 물길을 따라 길이 이어졌을 것이니 금수정 밑 절벽을 돌아서 종택으로 올라 왔을 것이다.
여기에 중요한 증거가 되는 암각문이 있으니, 커다란 바위에 洞天石門이라고 새긴 단정한 해서체의 암각문이 있다. 成海應의 [東國名山記]에 이글씨는 한석봉의 글씨라고 되어 있다. 아마도 여기를 통해서 종택이나 금수정으로 올라갔을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 바위뒷쪽에는 또 암각문이 있는데 이 글씨는 瀾石이라고 되어 있다. 자료에 의하면 이 글씨는 중국황제의 사신 허국이 쓴 것이며 원래 廻瀾石이란 글자인데 회자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廻자의 한 부분이 남아 있어 이를 증명한다.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잘 다듬어진 돌을 쌓고 그 위에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과 중문옆으로 곳간인 듯한 방이 있다. 중문초석에는 문지방을 걸었음직한 홈이 양쪽으로 파여 있다. 안채는 디귿자형의 내실인데 앞마당이 조금은 좁은 듯하고 안채의 내실이 규모에 비하여 작아 보였다. 그러나 이 곳은 육이오 때 종택이 불난후 임시로 종가를 지었으므로 훼손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안채 옆으로 주춧돌이 더 있는 것으로 보아 이쪽으로 다른 건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곳도 몇 개의 주춧돌이 빠져 있으나 그 규모를 짐작하기에는 충분하다. 발굴현장 근처에는 많은 주춧돌이 모아져 있으니 틀림이 없으리라
안채옆 건물을 별채라고 우선 이름 짓고 이 별채 앞쪽으로 또 커다란 주춧돌이 있으니 아마도 사랑채였을 것 같다. 이곳은 십여칸의 건물과 이어져서 높은 누각이 있었음을 짐작케하는 높이 1.5미터의 높은 초석이 세 개가 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한개는 부러져있음을
알 수 있으니 이 주춧돌위에 높은 누각이 있었지 않을까 생각된다.
우선 종택의 규모가 99칸이라고 전해오나 그렇게는 볼 수 없고요.
생각보다 안채의 규모가 작아보여서 지금 안채의 동쪽 부분을 더 발굴해보라고 지시했습니다. 안채보다는 별채와 사랑채의 규모가 대단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구요. 또 종택에 딸린 하인들이 살았을 부속건물들이 발견 되지 않고 있네요. 물론 이곳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만, 현재 발굴지역을 넓혀가지 못한 상태여서 이에 대해서는 좀 미흡합니다. 그리고 출토 유물들도 보잘것 없는 것도 이상합니다. 현재로서는 조선후기 이후의 유물이 조금 발굴 된 상태입니다. 생활용품의 유물도 그리 많지 않구요. 종손부의 말씀을 들어보면 육이오때 종택이 불타고 난 후 들어와 보니 동네 사람들이 구들장까지 뜯어 갔었다는 말씀으로 미루어 이때 많이 없어 진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사랑채의 규모는 상상보다 대단함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각이 있었을 기둥 네 개중 한개는 부러져 있지만 그 웅장함이 놀랠만합니다.“
---그후 이 종택에 대한 의견을 나눈 결과, 이 건물을 처음지은 것은 정확할 기록이 없지만 임진란 이후 조선 후기에 별서(別墅)로 지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본다. 그후 조선 말기 이후는 이곳에서 종손가가 계속 살아 오셨으리라. 이런 짐작을 하는 것이 건물의 구조상 안채가 빈약하고 별채와 사랑채의 규모가 대단한 것으로 보아 짐작이 가는 부분이다.
그러나 別墅치고는 그 규모가 너무나 커서 당시로서는 제2의 종택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21. 종택 복원 및 문화재 지정
향후 추진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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