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암 채제공과 우리 가문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4-12-30 13:44 조회1,488회 댓글0건본문
●김사원(金士元 1539∼1601) :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이 행장을 짓고 번암 채제공(樊岩 蔡濟恭)이 묘갈을 썼다.
●김종덕(金宗德) : 후산 이종수, 번암 채제공, 회병 신체인, 노애 유도원, 입재 정종로, 백불암 최흥원, 남야 박손경, 마옹 조진도 등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하고 있었다. 천사문집(川沙文集) 서(書)는 이상정·채제공(蔡濟恭)·신체인(申體仁) 등 당시 유명학자들과 주고받은 것이다.
●김종섭(金宗燮) : 명상 채제공과 친교를 가졌고 서찰의 왕래가 있었다.
■ 퇴계문인록 (1983, 이희대 편저, 제자 서봉 김사달)
p132
晩翠堂 金士元
김사원의 자는 景仁이고 호는 晩翠堂(만치당)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중종33년(1539년) 의성에서 출생하여 퇴계선생에게 薰陶(훈도)를 받은 후 덕행을 실천한 선비였다.
천성이 인자하고 어릴때부터 공부를 즐겨하였던 만취당은 20세가 지난후에 퇴계선생 문하에 들어가 훈학을 받았으며 이때 선생은 武夷 觀善齋(무이 관선재)에 간한 시를 써 주면서 면학을 장려하였다.
도산에서 훈학을 받던중 산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병이 위중하게 되자 선생이 경계하기를 "古人들이 학문을 하는데 비록 勤苦(근고)했다고 하지만 어찌 生病을 얻어 부모의 근심을 끼치는데 이르러서야 되겠느냐" 고 하여, 건강을 돌보면서 공부하게 했다는 일화도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영남의 선비들이 의병에 가담하여 왜적과 싸울 때 의성 齋整將(?整齋將)에 추대되어 의병대장 金垓(김해-의성김씨 김효로의 ?현손)를 도우면서 활약했던 그는 전란통에 굶주리는 지방민들에게 자기집 곡식과 음식물을 골고루 나누어 주어 살아날 수 있도록 도왔으며 난리가 평정된후 도움받은 사람들이 토지와 물건을 가져와 사례하는 것 조차 거절한 덕망있는 선비였다.
학문을 닦으면서 농사일에도 힘써 가난한 사람들을 무상으로 구제한 적도 있으며 이러한 선행에 대하여 이 지방 사람들은 "金氏義倉"(김씨의창)이라고 불렀다고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와같이 일생동안 관직을 멀리 하고 학문과 영농에만 힘쓴 만취당은 일찍이 "선비가 처세하는데 義아닌 것으로 祿을 받지 말 것이오 오직 본분에 진력하면 거의 허물이 없을 것이며 언행을 삼가는 한편 독서를 부지런히 하고 農桑(농상)에 힘쓰는 등 세가지 일을 스승의 가르침대로 수행할 것이다." 고 말했다고 번암 채제공이 지은 墓碣에 적혀 있다.
還故 후 고향에 月瀾精舍(월란정사)를 지어 학문에 정진하다가 1601년(선조34년)에 서거하니 향년이 63세였으며 의성 后山祠(후산사)에 입향되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