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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조경선생과 김찬(눌암)선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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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5-01-03 12:09 조회1,58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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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趙絅)2

1586(선조 19)∼1669(현종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일장(日章), 호는 용주(龍洲)·

주봉(柱峯). 아버지는 봉사(奉事) 익남(翼男)이며, 어머니는 증좌승지 유개(柳愷)의 딸이다. 윤근수(尹根壽)의

문인이다.

1612년(광해군 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의 난정(亂政)으로 대과를 단념, 거창에 은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고창현감·경상도사에 계속하여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다가

이듬해 형조좌랑·목천현감 등을 지냈다.

1626년(인조 4) 정시문과에 장원, 정언·교리·헌납 등 청요직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강화도에 파천하고 조정에서 화전 양론이 분분할 때 지평으로 강화론을

주장하는 대신들에 대하여 강경하게 논박하였다.

이어 이조좌랑·이조정랑을 거쳐,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사간으로 척화를 주장하였고, 이듬해

집의로 일본에 청병하여 청나라를 공격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뒤 응교·집의 등을 역임하고, 1643년 통신부사로 일본에 다녀와서 기행문을 저술하였다.

이어 형조참의·대사간·대제학, 이조·형조의 판서 등을 거쳐, 1650년 청나라가 사문사(査問使)의 척화신에

대한 처벌요구로 영의정 이경석(李景奭)과 함께 의주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안치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와,

1653년 회양부사를 지내고 포천에 은퇴하였다.

그뒤 노인직(老人職)으로 행부호군에 등용, 1658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1661년 판중추부사로

윤선도(尹善道)의 상소를 변호하다가 대간의 논박을 받고 파직되었다.

숙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포천의 용연서원(龍淵書院), 흥해의 곡강서원(曲江書院), 춘천의

문암서원(文巖書院)에 각각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용주집》 23권 12책과 《동사록 東?錄》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e7c3212af926db8ab8cbc8e522dae005.gif조경(趙絅)

 

인조(仁祖) 4년 (병인, 1626년), 정시(庭試) 갑과1(甲科1)

 

70732952fa8b3120b3f051e859e522f7.gif인적사항

생년(生年)

병술1586(丙戌1586)

자(字)

일장(日章)

호(號)

용주(龍洲)

본관(本貫)

한양(漢陽)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문간,청백리(文簡,淸白吏)

 

 

 

1f1d3213f701d88cec8e7e386cd2f53e.gif가족사항

부(父)

조익남(趙翼男)

조부(祖父)

조현(趙玹)

증조부(曾祖父)

조수곤(趙壽崑)

외조부(外祖父)

유개(柳愷)

처부(妻父)

김찬(金瓚)

자(子)

조위봉(趙威鳳)

 

 

 

aa0cb50c84cc261fc68f5e4194cca693.gif이력 및 기타사항

소과(小科)

1612(임자) 진사시

전력(前歷)

좌랑(佐郞)

관직(官職)

문형(文衡)

 

 

김찬(金瓚)3

1543(중종 38)∼1599(선조 3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숙진(叔珍), 호는 눌암(訥菴).

아버지는 형조참의 언침(彦沈)이다.

1567년(명종 22)에 진사가 되고, 156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

1570년에 검열이 되고, 이후 대교·봉교·전적·형조정랑·검상·사인·이조정랑 등의 관직과 지평·집의·정언·

헌납·사간·수찬·교리·응교 등 삼사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특히, 1573년 평안 삼도사로 나가 군적(軍籍)을 정리하였으며, 다음해에는 평안도 순무어사로 활약하였다.

1584년 이후로는 전한·직제학·승지·좌참찬·동지중추부사·대사헌·대사간·대사성·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임금의 파천을 반대하였으며, 임금 일행이 개경에 이르자 동인(東人)

이산해(李山海)의 실책을 탄핵하여 영의정에서 파직시키고, 백성들의 원성을 사고 있던 김공량(金公諒)을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

뒤에 정철(鄭澈)밑에서 체찰부사(體察副使)를 역임하고, 양호조도사(兩湖調度使)로 전쟁의 뒷바라지를

하였으며, 접반사(接伴使)로서 명나라와의 외교를 담당하였다.

또, 일본과 강화회담을 벌일 때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 때부터 예조판서·지의금부사·대사헌·이조판서를 연이어 지냈고, 지돈녕부사를 거쳐

우참찬까지 승진하였다. 대사헌 때 가족을 멀리 피난시켰다고 탄핵을 받고 체직되는 등 소소한 정치적

부침을 겪기도 하였지만, 문장가로도 이름이 높았으며, 경제문제에 밝고 외교적 수완이 능숙한 명신이었다.

임진왜란 뒤 전쟁의 수습과정에서 죽자, 선조는 조회를 정지하여 추모의 뜻을 표했다. 시호는 효헌(孝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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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또 차근차근 발굴이 시작되었다.


조심조심 흙 한줌 한줌을 파 내려가면서 모두들 긴장한 표정들이었다.

박교수의 예리한 눈빛이 돌틈에 내리 꽂히고,

작업하는 연구원들과 인부들의 손끝에서 흙한덩어리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섬세함에

우리들 안동김씨일동은 숨을 죽이며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길이 2미터 남짓하고 폭이 1미터쯤되는 타원형으로 둘러쌓인 돌더미 가운데에 흙을

조심조심 파내기를 이십여분...

문득 내눈에 조그만 기와파편이 들어왔다.

연구원은 즉시 이 파편을 거두어내고 박교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때 박교수 얼굴에 스치는 야릇한 표정에서 나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뭉클함에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쥐어 건너편에 있는 발용씨에게 눈빛을 주었다.

아! 이것이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앞으로 선사시대의 다른 유물이 출토되지 않는 한 분명히 이 돌더미는 선사시대의 것이 아닐 것이라는 증거가 충분히 되리라.

선사시대의 유적에서 기와파편이 출토될 수 없을 것이라는 나의 추리는 어느 정도 맞아들어가는  듯 했다.

계속해서 옆의 흙을 모두 거두어 냈으나 아무런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나는 깨어진 기와파편을 손으로 만지면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이 아무 쓸데 없는 기와파편은 내가 고마운 기념으로 갖어야겠다고 했더니

박교수는 그것이 선사시대의 유적지가 아니라는 증거가 되니 따로 처리해야겠다고 했다.

아무려먼 어떻한가!  이 돌무덤이 선사시대 유물만 아니라면....


“구둘장이 모두 검게 그을러 있고 옆의 세운 돌들도 모두 그을러 있습니다.  여기에서 나온 기와 파편으로 미루어 보면 이 돌무덤은 정확히는 알수 없지만 근세의 온돌인 듯 합니다.

그러나 바닥에 아무런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불을 때는 다른 곳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흔적이 보이지 않아, 밖에서 불을 땐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불길이 들어온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이 이해가 안 갑니다만, 어쨌던 선사시대의 유물이 아닌 것은 틀림 없습니다.“


박교수의 이말에 우리(안동김씨 일행)은 모두 지옥에서 천당으로 다시 올라온 듯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 몇시간 동안 모두 얼마나 가슴 조리며 조바심했던가?

그제서야 우리 모두는 환한 웃음으로 주위를 맞을 수가 있엇다.

언제 오셨는지 김도만 부회장님의 모습도 보이고, 긴장에서 풀린 종손 광도씨와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흐르는 안사연 식구들(태우,발용,항용,주회)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이때의 기분을 글로 쓸 수 없는 내 재주가 몹시 한탄스럽기만 하다.

(이틀후 내가 다시 현장을 갔을때 이 돌더미 발굴 현장은 흙으로 덮여져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팠던 흔적만 있을 뿐.. 당시 애탔던 우리의 마음만 허고에서 맴돌고..

모든 지표면은 비닐로 덮여저 있었고 주춧돌만이 열병식하듯 줄지어 서 있는 장관을 보면서그제의 애탔던 상황을 다시한번 새겨보았다..)


꼬리 짧은 겨울해는 벌써 뉘엿뉘엿 기울어 가고 있었다.

나는 다시 초석이 반듯반듯 줄지어 있는 발굴현장을 한발한발 더듬어 가면서 이 종택이

원래의 모습으로 재현복구된 모습을 상상해 본다.

요새는 컴퓨터그래픽으로 가상의 재현도 하는 것을 본적이 많은데(역사스페셜 같은데서)

그렇게라도 해불 수 있다면 얼마나 장대하겠느가?

박교수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짧은 초겨울 해는 저물어 가기 시작하였다.

저녁먹고 가라고하는 종손을 뒤로 하고 우리 일행은 부지런히 포천으로 향했다.

아침에 올때 건성으로 지나친 조경선생의 묘를 답사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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