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와 문온공 김구용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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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02-01-31 18:13 조회1,875회 댓글0건본문
여주 신륵사에 가면 보물로 지정된 보제존자석종과 석종비를 만날 수 있다.
이외에도 보물로 지정된 것만도 도합 6개가 있으니 한번 찾아가 볼만하다.
여기 석종비에 보면 시주자 명단에 척약재 김구용 할아버님이 새겨져 있는
것이 보이는데 매우 반갑기 그지 없다.
이는 본 홈 개설후 초반에 주회씨께서 여주신륵사를 다녀와서 쓰신 글이
있는데 오늘 다시 항용씨께서 동국대학교에서 확인하신 탁본 내용이 있어
다시 한번 정리하여 본다.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비는 고려말 보제존자 (혜근 나옹선사) 스님의
묘탑인 석종(보물제228호)을
세우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로서,
목은 이색이 글을 짓고 한수가 글씨를 썼다.
내용은 여흥군신륵사보제사리석종기 와 보제존자진당시병서로 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당시의 주지 및 대중스님, 석수, 목수 시주자명단등
많은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보물 229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중 시주자 명단에 전 삼사좌윤 김구용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비문에서는 희미하여 직접 확인하기가 어렵고 탁본에서는
확연히 볼 수 있으며 신륵사 입구에 있는 여주시자료관에 탁본이 전시되어 있다.
참고자료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神勒寺普濟尊者石鐘]
경기도 여주군(驪州郡) 신륵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종.
지정번호 : 보물 제228호
소재지 : 경기도 여주군(驪州郡) 신륵사
시대 : 고려시대
크기 : 높이 1.9m
종류 : 석종
보물 제228호. 높이 1.9m.
화강석으로 제작된 이 석종은 먼저 지상에 석축(石築)으로 넓은 건축기단(建築基壇)을
축조하고 상면 외주(上面外周)는 장대석(長臺石)으로 돌려 갑석(甲石)을 삼고 전면과
양측면에는 계단을 설치하였다. 이 기단 상면에는 박석(薄石)을 깔고 그 중앙에 2매의
판석(板石)을 얹어 2단의 탑신(塔身) 받침을 마련하였으며, 탄신과 접하는 곳에는 원형
몰딩이 조각되었다. 탑신은 원래의 종형(鐘形)에서 퇴화되어 위가 잘라진 포탄같이 되어
있으며 표면에는 장식이 없고 탑신의 상하는 수평을 이루었다. 탑 꼭대기에는
화염무늬[火焰文]를 모각(模刻)한 낮은 보주(寶珠)가 얹혀 있을 뿐이다.
이 석종을 중심으로 전면에 석등, 후면에 탑비가 서 있다.
이러한 석종형은 신라시대부터 내려오던 팔각문당형(八角門堂形)의 부도형식(浮屠形式)이
고려시대에 일부 새로운 양식으로 가미되었다가 그 말엽에 이르러 완전히 바뀌어 전혀
새로운 형식이 된 것인데, 이 석종은 고려 말기의 명승(名僧) 혜근(慧勤) 보제존자(普濟尊者)의
묘탑으로서 고려 말기의 석종형 부도형식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神勒寺普濟尊者石鐘碑]
경기도 여주군(驪州郡) 신륵사에 있는 고려시대 묘비(墓碑).
지정번호 : 보물 제229호
소재지 : 경기 여주군(驪州郡) 신륵사
시대 : 고려시대
크기 : 전체 높이 2.12m, 비신(碑身) 높이 1.21m, 폭 0.61m
종류 : 묘비
보물 제229호. 전체 높이 2.12m, 비신(碑身) 높이 1.21m, 폭 0.61m. 비신은 대리석이고,
비대(碑臺)와 옥개(屋蓋)는 화강석이다. 비표(碑表)는 ‘여흥군 신륵사 보제사리 석종기
(驪興郡神勒寺普濟舍利石鐘記)’로 시작되는 석종기와 ‘보제존자 진당시 병서
(普濟尊者眞堂詩幷序)’로 시작되는 진당시로 양분되어 있고, 이면(裏面)에는
수월사(水月寺) ·보광사(普光寺) 주지를 비롯하여 석수(石手) ·목수(木手)에 이르기까지
약 200명이 열기되어 있다.
서자(書者)는 한수(韓脩)이며, 이 비의 서체가 안노공풍(顔魯公風)의 해서임을
시사(示唆)하고 있다. 전체의 조형은 이 절의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와 같으나
대석이 1단의 앙련대(仰蓮臺)를 가졌으며, 개석(蓋石)에 옥개부 공포(屋蓋部 包)와
와구(瓦溝)가 조출(彫出)되어 있고, 부분적으로 정제(整齊)되어 있다. 대장각기비보다는
불과 4년 앞서는 것이다.
혜근 [惠(慧)勤, 1320 ~ 1376]
고려 말의 고승(高僧).
호 : 나옹(懶翁) 시호 선각(禪覺)
별칭 : 초명 원혜(元慧)
출생지 : 경북 영해(寧海)
속성 아(牙). 초명 원혜(元慧). 호 나옹(懶翁). 시호 선각(禪覺). 영해(寧海) 출생.
20세 때 친구의 죽음을 보고, 출가하여 공덕산 묘적암(妙寂庵)의 요연(了然)에게서
득도하고, 1348년(충목왕 4) 원나라에 가서 연경(燕京)의 고려 사찰인 법원사(法源寺)에서
인도 승려 지공(指空)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견문을 더욱 넓히기 위해 중국 각지를 편력하며, 특히 평산 처림(平山處林)과
천암 원장(千巖元長)에게서 달마(達磨)로부터 내려오는 중국선(禪)의 영향을 받았다.
고려가 자주국가로서의 면모를 회복하고자 노력할 때, 나옹은 중국에서 선의 기개를 떨치고
1358년(공민왕 7) 귀국, 1361년 왕의 요청으로 신광사(神光寺)에 머물며 홍건적(紅巾賊)의
침입 때 사찰을 지켰는데, 그 뒤는 광명사(廣明寺)와 회암사(檜巖寺)에 머물렀다.
1371년 왕사(王師)가 되어 회암사에 있으면서, 1376년(우왕 2) 문수회(文殊會)를 열었는데
사람들이 다투어 모여들어 대혼란이 일자, 조정에서 밀양(密陽) 영원사(瑩源寺)로
이주하도록 하였는데, 가는 도중 여주(驪州) 신륵사(神勒寺)에서 죽었다.
신륵사 [神勒寺]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北內面) 봉미산(鳳尾山)에 있는 사찰.
종파 :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용주사 말사
창건시기 : 신라 진평왕(眞平王) 대
창건자 : 원효
소재지 :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창송리 228, 0337-85-6916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고려 말인 1376년(우왕 2) 나옹(懶翁) 혜근(惠勤)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한데,
200여 칸에 달하는 대찰이었다고 하며, 1472년(조선 성종 3)에는 영릉 원찰(英陵願刹)로
삼아 보은사(報恩寺)라고 불렀다.
신륵사로 부르게 된 유래는 몇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 하나는 “미륵(혜근을 가리킴)이,
또는 혜근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려 고종 때
건너마을에서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사람들이 붙잡을 수가 없었는데,
이 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나서서 고삐를 잡자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神力)으로
말을 제압하였다 하여 절 이름을 신륵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려 때부터 벽절[寺]이라 불려지기도 하였는데, 이는 경내의 동대(東臺) 위에 있는
다층전탑(多層塼塔)을 벽돌로 쌓은 데서 유래한 것이다.
이 절의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180호인 조사당(祖師堂), 보물 제225호인 다층석탑,
보물 제226호인 다층전탑, 보물 제228호인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 보물 제229호인
보제존자 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 보물 제230호인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 보물 제231호인
석등이 있으며,
유형문화재로는 극낙보전(極樂寶殿) 과 그이외의 부속건물로 구룡루(九龍樓) ·
명부전(冥府殿) ·시왕전(十王殿) ·산신당 ·육각정 등이 있다.
김영환
solnae@empal.com
이외에도 보물로 지정된 것만도 도합 6개가 있으니 한번 찾아가 볼만하다.
여기 석종비에 보면 시주자 명단에 척약재 김구용 할아버님이 새겨져 있는
것이 보이는데 매우 반갑기 그지 없다.
이는 본 홈 개설후 초반에 주회씨께서 여주신륵사를 다녀와서 쓰신 글이
있는데 오늘 다시 항용씨께서 동국대학교에서 확인하신 탁본 내용이 있어
다시 한번 정리하여 본다.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비는 고려말 보제존자 (혜근 나옹선사) 스님의
묘탑인 석종(보물제228호)을
세우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로서,
목은 이색이 글을 짓고 한수가 글씨를 썼다.
내용은 여흥군신륵사보제사리석종기 와 보제존자진당시병서로 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당시의 주지 및 대중스님, 석수, 목수 시주자명단등
많은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보물 229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중 시주자 명단에 전 삼사좌윤 김구용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비문에서는 희미하여 직접 확인하기가 어렵고 탁본에서는
확연히 볼 수 있으며 신륵사 입구에 있는 여주시자료관에 탁본이 전시되어 있다.
참고자료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神勒寺普濟尊者石鐘]
경기도 여주군(驪州郡) 신륵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종.
지정번호 : 보물 제228호
소재지 : 경기도 여주군(驪州郡) 신륵사
시대 : 고려시대
크기 : 높이 1.9m
종류 : 석종
보물 제228호. 높이 1.9m.
화강석으로 제작된 이 석종은 먼저 지상에 석축(石築)으로 넓은 건축기단(建築基壇)을
축조하고 상면 외주(上面外周)는 장대석(長臺石)으로 돌려 갑석(甲石)을 삼고 전면과
양측면에는 계단을 설치하였다. 이 기단 상면에는 박석(薄石)을 깔고 그 중앙에 2매의
판석(板石)을 얹어 2단의 탑신(塔身) 받침을 마련하였으며, 탄신과 접하는 곳에는 원형
몰딩이 조각되었다. 탑신은 원래의 종형(鐘形)에서 퇴화되어 위가 잘라진 포탄같이 되어
있으며 표면에는 장식이 없고 탑신의 상하는 수평을 이루었다. 탑 꼭대기에는
화염무늬[火焰文]를 모각(模刻)한 낮은 보주(寶珠)가 얹혀 있을 뿐이다.
이 석종을 중심으로 전면에 석등, 후면에 탑비가 서 있다.
이러한 석종형은 신라시대부터 내려오던 팔각문당형(八角門堂形)의 부도형식(浮屠形式)이
고려시대에 일부 새로운 양식으로 가미되었다가 그 말엽에 이르러 완전히 바뀌어 전혀
새로운 형식이 된 것인데, 이 석종은 고려 말기의 명승(名僧) 혜근(慧勤) 보제존자(普濟尊者)의
묘탑으로서 고려 말기의 석종형 부도형식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神勒寺普濟尊者石鐘碑]
경기도 여주군(驪州郡) 신륵사에 있는 고려시대 묘비(墓碑).
지정번호 : 보물 제229호
소재지 : 경기 여주군(驪州郡) 신륵사
시대 : 고려시대
크기 : 전체 높이 2.12m, 비신(碑身) 높이 1.21m, 폭 0.61m
종류 : 묘비
보물 제229호. 전체 높이 2.12m, 비신(碑身) 높이 1.21m, 폭 0.61m. 비신은 대리석이고,
비대(碑臺)와 옥개(屋蓋)는 화강석이다. 비표(碑表)는 ‘여흥군 신륵사 보제사리 석종기
(驪興郡神勒寺普濟舍利石鐘記)’로 시작되는 석종기와 ‘보제존자 진당시 병서
(普濟尊者眞堂詩幷序)’로 시작되는 진당시로 양분되어 있고, 이면(裏面)에는
수월사(水月寺) ·보광사(普光寺) 주지를 비롯하여 석수(石手) ·목수(木手)에 이르기까지
약 200명이 열기되어 있다.
서자(書者)는 한수(韓脩)이며, 이 비의 서체가 안노공풍(顔魯公風)의 해서임을
시사(示唆)하고 있다. 전체의 조형은 이 절의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와 같으나
대석이 1단의 앙련대(仰蓮臺)를 가졌으며, 개석(蓋石)에 옥개부 공포(屋蓋部 包)와
와구(瓦溝)가 조출(彫出)되어 있고, 부분적으로 정제(整齊)되어 있다. 대장각기비보다는
불과 4년 앞서는 것이다.
혜근 [惠(慧)勤, 1320 ~ 1376]
고려 말의 고승(高僧).
호 : 나옹(懶翁) 시호 선각(禪覺)
별칭 : 초명 원혜(元慧)
출생지 : 경북 영해(寧海)
속성 아(牙). 초명 원혜(元慧). 호 나옹(懶翁). 시호 선각(禪覺). 영해(寧海) 출생.
20세 때 친구의 죽음을 보고, 출가하여 공덕산 묘적암(妙寂庵)의 요연(了然)에게서
득도하고, 1348년(충목왕 4) 원나라에 가서 연경(燕京)의 고려 사찰인 법원사(法源寺)에서
인도 승려 지공(指空)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견문을 더욱 넓히기 위해 중국 각지를 편력하며, 특히 평산 처림(平山處林)과
천암 원장(千巖元長)에게서 달마(達磨)로부터 내려오는 중국선(禪)의 영향을 받았다.
고려가 자주국가로서의 면모를 회복하고자 노력할 때, 나옹은 중국에서 선의 기개를 떨치고
1358년(공민왕 7) 귀국, 1361년 왕의 요청으로 신광사(神光寺)에 머물며 홍건적(紅巾賊)의
침입 때 사찰을 지켰는데, 그 뒤는 광명사(廣明寺)와 회암사(檜巖寺)에 머물렀다.
1371년 왕사(王師)가 되어 회암사에 있으면서, 1376년(우왕 2) 문수회(文殊會)를 열었는데
사람들이 다투어 모여들어 대혼란이 일자, 조정에서 밀양(密陽) 영원사(瑩源寺)로
이주하도록 하였는데, 가는 도중 여주(驪州) 신륵사(神勒寺)에서 죽었다.
신륵사 [神勒寺]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北內面) 봉미산(鳳尾山)에 있는 사찰.
종파 :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용주사 말사
창건시기 : 신라 진평왕(眞平王) 대
창건자 : 원효
소재지 :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창송리 228, 0337-85-6916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고려 말인 1376년(우왕 2) 나옹(懶翁) 혜근(惠勤)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한데,
200여 칸에 달하는 대찰이었다고 하며, 1472년(조선 성종 3)에는 영릉 원찰(英陵願刹)로
삼아 보은사(報恩寺)라고 불렀다.
신륵사로 부르게 된 유래는 몇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 하나는 “미륵(혜근을 가리킴)이,
또는 혜근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려 고종 때
건너마을에서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사람들이 붙잡을 수가 없었는데,
이 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나서서 고삐를 잡자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神力)으로
말을 제압하였다 하여 절 이름을 신륵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려 때부터 벽절[寺]이라 불려지기도 하였는데, 이는 경내의 동대(東臺) 위에 있는
다층전탑(多層塼塔)을 벽돌로 쌓은 데서 유래한 것이다.
이 절의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180호인 조사당(祖師堂), 보물 제225호인 다층석탑,
보물 제226호인 다층전탑, 보물 제228호인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 보물 제229호인
보제존자 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 보물 제230호인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 보물 제231호인
석등이 있으며,
유형문화재로는 극낙보전(極樂寶殿) 과 그이외의 부속건물로 구룡루(九龍樓) ·
명부전(冥府殿) ·시왕전(十王殿) ·산신당 ·육각정 등이 있다.
김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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