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의 우리 선조님 09---김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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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01-13 09:59 조회1,407회 댓글1건본문
■ 디지털한국학
김구용(金九容)
1338(충숙왕 복위 7)∼1384(우왕 10). 고려말의 문신. 본관은 안동. 초명은 제민(齊閔), 자는 경지(敬之), 호는 척약재(?若齋) 또는 육우당(六友堂). 첨의중찬 방경(方慶)의 현손으로 묘(昴)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 16세로 진사에 합격하고, 왕명으로 모란시〔牡丹詩〕를 지어 일등을 하여 왕으로부터 산원직(散員職)을 받았다. 18세에 등제하여 덕녕부주부(德寧府注簿)가 되고, 1367년(공민왕 16)성균관이 중건되고 나서 민부의랑겸성균직강(民部議郎兼成均直講)이 되어 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후학의 훈화에 노력하여 성리학을 일으키는 일익을 담당하였다.
1375년(우왕 1) 삼사좌윤(三司左尹)이 되어 이인임(李仁任) 등 권신들이 북원(北元)이 보낸 사절을 맞으려 하자 이숭인·정도전(鄭道傳) 등 당시 친명파와 함께 도당(都堂)에 상서하여 이를 반대하다가 죽주(竹州)에 귀양갔으며, 뒤에 여흥(驪興)으로 옮겨 강호에 노닐며 거처하는 곳을 육우당이라 이름하고 시와 술로 날을 보냈다.
1381년에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가 되어 왕의 절제 없는 거둥을 경계하는 글을 올려 직간하였고, 이듬해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다.
1384년 행례사(行禮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는데, 떠날 때 국서와 함께 백금 1백냥과 세저(細苧)·마포 각 50필을 가지고 갔다. 요동에서 체포되어 명나라 서울 남경(南京)으로 압송되었는데, 명나라 태조의 명으로 대리위(大理衛)에 유배되던 도중 노주 영녕현(瀘州永寧縣)에서 병사하였다.
그는 사장(詞章)을 잘하여, 특히 시로 유명하였다. 이색(李穡)은 그의 시를 가리켜 “붓을 대면 구름이나 연기처럼 뭉게뭉게 시가 피어나온다.”고 하였다. 《동문선》에 그의 시 8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특히 무창시(武昌詩)가 유명하다. 허균(許筠)은 이 시를 들어 청섬(淸贍)하다 하였고, 신위(申緯)도 〈동인논시절구 東人論詩絶句〉에서 그의 시를 들어 감탄하고 있다. 《주관육익 周官六翼》을 찬하였으며, 문집인 《척약재집》이 전하고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牧隱集, 惺?詩話, 警修堂集, 韓國漢文學史(李家源, 民衆書館, 1961). 〈朴天圭〉
■ 김구용 연보 (정리 : 김주회)
김구용(金九容) 1338~1384
고려말의 문신. 본관은 안동. 초명은 제민(齊閔), 자는 경지(敬之). 호는 척약재(小易,若齋), 육우당(六友堂). 고려의 명장 김방경(金方慶)의 현손으로 상락군(上洛君) 김묘(金昴)의 아들이다. 1338년(충숙왕복위7) 태어나서 외가에서 자라며 외조부 민사평(閔思平)에게 수학하였다. 16세 1353년(공민왕2) 송천봉(宋天奉)이 감시한 진사시에 합격하고, 친시에 왕명으로 모란시(牡丹詩)를 지어 장원하여 왕으로부터 산원직(散員職)을 받았다. 18세 1355년 과거에 합격하였다. 덕령부 주부(德寧府注簿)가 되고, 24세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공민왕이 복주(안동)로 피난하였다. 26세 1363년 정언을 거쳐 헌납이 되었다.
30세 1367년(공민왕16) 성균관(成均館)이 중영(重營)되자 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후학의 훈화에 노력하여 성리학을 일으키는 선봉이 되었다. 31세 1368년 전교부령이 되었다. 동생 김제안이 신돈을 죽이려고 모의하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33세 1370년 외조부 閔思平의 문집 <급암집>을 편찬 간행하였는데, 보물 제708호로 지정되어 있다. 34세 1371년 민부의랑 겸성균직강이 되고, 35세 1372년 총부의랑이 되고, 성절사의 서장관이 되어 중국에 갔다. 전교령에 제수되고, 이듬해 7월 귀국하였다.
38세 1375년(우왕1) 삼사좌윤(三司左尹)이 되었다. 이인임(李仁任) 등 권신들이 북원(北元)이 보낸 사절을 맞으려 하자 이숭인·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 등 당시 친명파와 함께 도당(都堂)에 상서하여 이를 반대하다가 죽주(竹州)에 유배되었다. 뒤에 모향(母鄕)인 여흥(驪興)으로 옮겨 7년간 한거하였는데 이때 여강어우(驪江魚友)라 자호하고 강호에 노닐면서 거처하는 곳을 육우당(六友堂)이라 이름하고 ---六友堂은 천령현, 현재의 금사면에 있었는데, 외가가 있던 곳이다--- 시와 술로 날을 보냈다. 침류정(沈流亭)---川寧 金沙里에 있었다--- 승산(勝山)---주 남쪽 5리에 있다---, 보은사(報恩寺)---여강 동쪽 기슭 봉미산에 있는데 옛 신륵사이다---, 여강(驪江) 등지를 다니면서 읊은 시문이 그의 문집 <척약재학음집>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남아 있다.
44세 1381년 다시 풀려나와 나라에서 그 풍의를 숭상하여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를 제수하였다. 왕의 절제없는 거둥을 경계하는 글을 올려 직간하였고, 45세 1382년 성균대사성이 되었고, 이어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다.
47세 1384년(우왕10) 고려와 명나라와의 국교(國交)가 난관에 부딪치자 행례사(行禮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가던 중 요동(遼東)에서 私交를 했다는 죄목으로 명나라 서울 남경(南京)으로 압송되었고, 명나라 태조의 명으로 운남 대리위(大理衛)로 유배가던 중 사천 노주 영녕현(瀘州永寧縣) 객사에서 병사하였다.
그는 사장(詞章)을 잘하여 특히 시로 유명하였다. 이색(李穡)은 그의 시를 가리켜 “붓을 대면 구름이나 연기처럼 뭉게뭉게 시가 피어나온다.”고 하였다. 《동문선》에 그의 시 8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특히 무창시(武昌詩)가 유명하다. 허균(許筠)은 이 시를 들어 청섬(淸贍)하다 하였고, 신위(申緯)도 〈동인논시절구>(東人論詩絶句)에서 그의 시를 들어 감탄하고 있다.
전장(典章)을 널리 구해 모아서 한 권의 책을 만들어 『주관육익(周官六翼)』이라고 이름지었고, 또 고금의 시문(時文) 몇 권을 모아 『선수집(選粹集)』이라고 했다. 유고 문집 『척약재 학음집(小易若齋 學吟集)』이 전하고 있다.
1400년 아들 明理가 문집을 간행하였는데 이 초간본은 보물 제100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884년(고종21) 17세손 相元이 문집을 개간하고, 1964년 영천에서 문집이 개간되었으며, 1997년 그의 시문집을 연구한 논문 서적인 <척약재 김구용의 문학세계>(성범중, 울산대 출판)이 출간되었다.
1600년대 중반 경북 예천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고조부 김방경과 함께 배향되었으나 현재는 훼철되었고, 현재 전북 남원의 <용장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小易若齋 學吟集, 牧隱集, 惺수詩話, 警修堂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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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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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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