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의 우리 선조님 18---김시헌, 김정일, 김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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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01-18 09:26 조회1,573회 댓글3건본문
■ 디지털한국학
김시헌(金時獻)
1560(명종 15)∼1613(광해군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자징(子徵), 호는 애헌(艾軒).
고려의 명장 방경(方慶)의 후손으로, 임진왜란 때 원주목사로서 왜장과 싸우다 전사한 제갑(悌甲)의 아들이다.
1588년(선조 21) 소과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같은해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검열(檢閱)·이조좌랑·정언(正言)을 거쳐 1595년 사간·전한(典翰)·시강관(侍講官)·사인(舍人)이 되고, 이듬해 집의(執義)·사간 등을 거쳐, 1597년 승정원동부승지·우부승지·충청도관찰사·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이때 소모관(召募官)으로 충청도에 파견되었다. 이어 병조참의·우승지·좌승지를 거쳐 복수사(復讐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신립(申砬)이 전사한 탄금대(彈琴臺)를 돌아보고 임진왜란 뒤 민심을 수습하는 데 힘썼다.
1603년 동지사행(冬至使行)에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순천군수를 거쳐 병조참의·좌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607년 양양부사로 나갔다가 병조참판에 올랐다. 선조가 죽자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로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611년 예조참판을 거쳐 도승지가 되었다. 그는 어려서 등과하였으며, 역학(易學)에 밝아 일대(一代)의 명류(名流)로 이름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그의 아버지 제갑이 적에게 죽음을 당하자 호남·영남 지방의 복수별장(復讐別將)이 되어 나갔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燃藜室記述. 〈李章熙〉
■ 디지털한국학
김정일(金鼎一)
1562(명종 17)∼1609(광해군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의중(儀仲).
아버지는 용양위호군(龍#양45衛護軍) 양(壤)이다.
1588년(선조 21)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9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성균관학유가 되었다. 곧, 전적이 되고 여러 차례 공조좌랑·세자시강원사서 겸 기주관을 지냈다.
1601년 지평에 이어 형조·예조정랑을 역임한 뒤 순검어사로 두번이나 용만(龍灣)에 갔으며, 경차관으로 경기지역에 나아가 민정을 살폈다.
1604년 어사로 충청도에 나가 천재로 입은 농작물 피해상황을 돌아본 뒤, 임천군수 이신의(李愼儀), 서천군수 성계선(成啓善), 연기현감 신경락(申景洛), 이산현감 송영조(宋榮祚), 보은현감 송해(宋垓), 서산군수 임취정(林就正) 등을 중앙에 보고하고 선정을 치하하였다.
이듬해 공주판관으로 좌천되었으나 성심껏 직무를 수행하여, 공주를 떠난 뒤에도 관리와 백성들이 그를 추모하였다.
1608년 호조정랑·함경도도사가 되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趙啓纘〉
■ 디지털한국학
김시양(金時讓)
1581(선조 14)∼1643(인조 2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초명은 시언(時言), 자는 자중(子仲), 호는 하담(荷潭). 아버지는 비안현감 인갑(仁甲)이다.
1605년(선조 3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1607년 주서(注書)가 되고 1609년(광해군 1)에 예조좌랑으로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으며, 1610년 동지사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에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가 되었는데, 향시에 출제한 시제가 왕의 실정(失政)을 비유한 것이라 하여 종성에 유배되었다가 1616년 영해(寧海)로 이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예조정랑·병조정랑·수찬·교리를 역임,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는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1625년(인조 3) 응교가 되어 문학을 겸하였고, 이듬해에는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산릉역(山陵役)에 공로가 많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날 징후가 보이자 평안도관찰사 겸 체찰부사에 임명되었고 이어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묘의(廟議)에 따라 도원수와 사도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를 겸하였다.
그러나 왕의 뜻을 어기고 척화를 주장하여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1634년 지중추부사에 서용(敍用)되고 한성판윤을 거쳐 호조판서 겸 동지춘추·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이 되었다가 9월에 재차 도원수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에 강화유수로 나갔다가 병으로 사직하였고, 1636년 청백리에 뽑혀 숭록계(崇祿階)에 올랐으며,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으나 눈병으로 사직하고 향리인 충주로 내려갔다.
1641년 《선조실록》을 개수할 때 대제학 이식(李植)과 총재관(摠裁官) 홍서봉(洪瑞鳳) 등의 추천으로 다시 판중추부사 겸 춘추관사를 제수받았으나 지병인 안질로 실록개수역(實錄改修役)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전적(典籍)과 경사(經史)에 밝았다.
회령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하담파적록 荷潭破寂錄》·《하담집》·《부계기문 ?溪記聞》 등이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燃藜室記述,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李章熙〉
댓글목록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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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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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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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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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용 선생님! 하담문집에 연행기록이 있나요?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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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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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담 선조님의 <연행기>(중국 사신행, 일기체 수필)는 따로 없습니다. 원문인 <충익공 하담선생 유고>에는 별집으로 <荷潭先祖 朝天時贈行帖>이 있는데 이는 공께서 중국 사신 일행의 서장관으로 갈 때 받은 시문들의 합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