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매료시킨 시인 천상병(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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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2-02-04 05:54 조회1,875회 댓글0건본문
천상의 시인 천상병의 「귀천」
1993년 4월28일 천상의 시인 천상병은 귀천하였습니다.
다음날 조선일보 박해현 기자가 쓴 기사를 그대로 올립니다.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靈魂의 빈터에,
새 날이와, 새가 울고 꽃잎 필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 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情感에 그득찬 季節,
슬픔과 기쁨의 週日,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새』중에서)
--28일 타계한 시인 천상병씨는 기행으로 점철된 일생동안 천상의 시인으로 불렸다. 코흘리개들에게나
붙어다닐 「천진난만」이라는 표지가 천씨의 이름앞에 따라다닐 정도로 그의 시혼은 동심의 세계에 뿌리
를 두고 있었다.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은 데다가 삐뚤어진 입을 꽉물고
있는 그의 표정에는 현실 저너머를 향한 몽상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생전에 말끝마다 『괜찮다. 다 괜찮다』고 소리쳤다. 선그라스를 처음 껴보고는 며칠동안 특유의
컥컥거리는 「까치 웃음」과 함께 『참 좋다, 참 좋다』가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또 80년대 말에야 처
음으로 집에 전화를 놓은 뒤에는 친구들이 전화를 걸 것이라며 하루종일 전화기 옆에 붙어있었다.
--브람스 교향곡 4번을 들으며 많이 울기도 했던 서울대 상대 재학시절 이미 그의 인생항로는 돈이 안되
는 시와 예술로 나있었다. 그러나 그의 맑은 내면에는 지난 67년 동백림사건에 연루돼 「남산」에서 받
은 고문의 후유증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그 일이후 아이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매일
막걸리 두되로 세끼 식사를 대신했던 그의 삶에서 시와 술은 세속의 현실을 버텨 나갈 수 있도록 만드는
영혼의 도취를 의미했다. 시와 술이 있기 때문에 그는 현실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었다.
--술 때문에 시인 천씨는 생전에 「유고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하다. 지난 71년 돈 한푼없이 굶주린 배
를 움켜쥐고 서울의 밤거리를 떠돌다가 영양실조로 쓸어진 그는 행려병자로 몰려 서울 응암동 시립정신
병원에 수용됐다. 병명은 「알콜에 의한 정신 황폐증」. 몇 개월이 지나도 그에게 술값을 뜯긴(?) 문인이
없었다. 문우들은 입을 모아 『불쌍한 사람 . . .』이라며 그가 외롭게 세상을 떳다고 단정할 수 밖에 없었
다. 결국 그의 시편들을 모아 유고 시집 「새」가 출간됐지만 그 이듬해 정신병원 침대에 앉아 킬킬거리
는 그가 발견됐다.
--그해 부인 목순옥씨를 평생의 반려자로 맞았다. 하루 2천원씩의 용돈을 부인한테 받아 맥주 1병만 마시
고 남은 돈은 꼬박꼬박 저축했다. 늙어서 부인을 데리고 여행을 다닐 계획이었다. 말년에 그는 부인이 꾸
려 나가는 인사동의 찻집 「歸天(귀천)」(지금도 인사동에 있음)에 앉아 은행통장에 1백만원 이상이 들
었다고 손님들에게 자랑했다. 지난해 10월 유고 시집으로 간행된 「새」의 출간 2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
에서 그는 『米壽(미수, 88세)까지는 살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그는 일정을 앞당겨 「귀천」
의 길에 올랐다. 그를 사랑하는 시인들은 말한다. 이승을 떠난 그가 대표작 「새」에서 노래한 것처럼 전
생에는 좋은 일도 있었고, 나쁜일도 있었다면서 낡은 목청을 뽑고 있으리라고.
1993년 4월28일 천상의 시인 천상병은 귀천하였습니다.
다음날 조선일보 박해현 기자가 쓴 기사를 그대로 올립니다.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靈魂의 빈터에,
새 날이와, 새가 울고 꽃잎 필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 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情感에 그득찬 季節,
슬픔과 기쁨의 週日,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새』중에서)
--28일 타계한 시인 천상병씨는 기행으로 점철된 일생동안 천상의 시인으로 불렸다. 코흘리개들에게나
붙어다닐 「천진난만」이라는 표지가 천씨의 이름앞에 따라다닐 정도로 그의 시혼은 동심의 세계에 뿌리
를 두고 있었다.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은 데다가 삐뚤어진 입을 꽉물고
있는 그의 표정에는 현실 저너머를 향한 몽상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생전에 말끝마다 『괜찮다. 다 괜찮다』고 소리쳤다. 선그라스를 처음 껴보고는 며칠동안 특유의
컥컥거리는 「까치 웃음」과 함께 『참 좋다, 참 좋다』가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또 80년대 말에야 처
음으로 집에 전화를 놓은 뒤에는 친구들이 전화를 걸 것이라며 하루종일 전화기 옆에 붙어있었다.
--브람스 교향곡 4번을 들으며 많이 울기도 했던 서울대 상대 재학시절 이미 그의 인생항로는 돈이 안되
는 시와 예술로 나있었다. 그러나 그의 맑은 내면에는 지난 67년 동백림사건에 연루돼 「남산」에서 받
은 고문의 후유증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그 일이후 아이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매일
막걸리 두되로 세끼 식사를 대신했던 그의 삶에서 시와 술은 세속의 현실을 버텨 나갈 수 있도록 만드는
영혼의 도취를 의미했다. 시와 술이 있기 때문에 그는 현실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었다.
--술 때문에 시인 천씨는 생전에 「유고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하다. 지난 71년 돈 한푼없이 굶주린 배
를 움켜쥐고 서울의 밤거리를 떠돌다가 영양실조로 쓸어진 그는 행려병자로 몰려 서울 응암동 시립정신
병원에 수용됐다. 병명은 「알콜에 의한 정신 황폐증」. 몇 개월이 지나도 그에게 술값을 뜯긴(?) 문인이
없었다. 문우들은 입을 모아 『불쌍한 사람 . . .』이라며 그가 외롭게 세상을 떳다고 단정할 수 밖에 없었
다. 결국 그의 시편들을 모아 유고 시집 「새」가 출간됐지만 그 이듬해 정신병원 침대에 앉아 킬킬거리
는 그가 발견됐다.
--그해 부인 목순옥씨를 평생의 반려자로 맞았다. 하루 2천원씩의 용돈을 부인한테 받아 맥주 1병만 마시
고 남은 돈은 꼬박꼬박 저축했다. 늙어서 부인을 데리고 여행을 다닐 계획이었다. 말년에 그는 부인이 꾸
려 나가는 인사동의 찻집 「歸天(귀천)」(지금도 인사동에 있음)에 앉아 은행통장에 1백만원 이상이 들
었다고 손님들에게 자랑했다. 지난해 10월 유고 시집으로 간행된 「새」의 출간 2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
에서 그는 『米壽(미수, 88세)까지는 살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그는 일정을 앞당겨 「귀천」
의 길에 올랐다. 그를 사랑하는 시인들은 말한다. 이승을 떠난 그가 대표작 「새」에서 노래한 것처럼 전
생에는 좋은 일도 있었고, 나쁜일도 있었다면서 낡은 목청을 뽑고 있으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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