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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의 우리 선조님---마르코 폴로와 김방경, 김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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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01-27 00:24 조회1,675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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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 미지의 세계에 대한 영감의 원천

---김호동 /서울대 교수


이탈리아의 항구도시 베네치아에서 출생한 마르코 폴로가 동방으로 떠난 것은 15살 되던 해인 1269년의 일이었다.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동방무역을 하기 위해 떠난 아버지로부터는 아무 소식도 없었고, 어려서 홀어머니마저 여읜 그는 정상적인 교육도 받지 못한 채 고아처럼 자랐다. 그러던 그에게 갑자기 아버지와 숙부가 나타났고 동방의 ‘대칸’을 만나러 간다는 그들의 손에 이끌리어 무작정 길을 나서게 된 것이다.


우리는 그의 동방여행이 이처럼 애초부터 어떤 목적을 갖고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보다 수십년 앞서서 동방을 다녀왔던 카르피니루브룩과 같은 기독교 선교사들은 서구세계에 새로운 위협으로 등장한 몽골인들을 정탐하거나 선교할 목적으로 갔었기 때문에 그들이 관찰하는 대상이나 관점도 그것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고, 이러한 사실은 그들이 남긴 기록을 통해서 잘 드러나고 있다. 아직도 소년기의 때를 완전히 벗지 못한 마르코는 어떤 확고한 이념으로 무장되지 않은 채 아버지를 따라서 길을 나선 것이다. 따라서 그는 새로운 민족과 풍토와 문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우리에게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마르코 폴로는 수년에 걸친 힘든 여정을 거쳐 1274년 경 드디어 ‘칸의 도시’ 즉 캄발룩-현재의 북경-에 도착했다. 그로부터 17년동안 그는 대칸 쿠빌라이를 모시며 중국의 여러 곳을 다녔고, 마침내 귀환길에 올라 인도양과 페르시아를 거쳐 1295년 고향 베네치아로 돌아오게 되었다. 출발한 해로부터 계산해 보면 26년에 걸친 대장정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뒤 그는 베네치아와 제노바 사이에 벌어진 해전에 참가했다가 포로로 잡혔고, 감옥에서 우연히 만난 루스티켈로라는 이름의 작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구술함으로써,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는 [동방견문록]이 탄생한 것이다.


유럽에서는 [성경] 다음가는 베스트셀러라는 말이 있듯이 [동방견문록]은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읽혀졌고 인류의 고전 가운데 하나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처럼 유명한 [동방견문록]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통념에는 두 가지의 잘못된 부분이 있다. 하나는 그것을 ‘견문록’ 혹은 ‘여행기’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동방’ 혹은 ‘동양’에 대한 기록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마르코 폴로의 기록은 ‘여행기’도 아니고 ‘동방’에 관한 기록도 아니다.


그가 살던 시대에는 아직도 ‘동양’과 ‘서양’이라는 이분법적 세계관이 잉태되지 않았었다. 유럽인들의 사고 속에 ‘서양=유럽, 동양=비유럽’ 이라는 등식이 자리잡게 되는 것은 빨라도 16세기 이후의 일이었다. 마르코 폴로의 글 속에 보이는 ‘동방’은 그저 방위상의 개념일 뿐이지 문화적인 개념은 아니었다. 그러한 그의 글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아니 본래의 의미를 왜곡시킨 것은 후세의 유럽인들이었다. 그들은 마르코 폴로를 콜럼버스, 바스코 다 가마, 코르테즈로 이어지는 서구문명의 발전의 선구로 이해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마르코 폴로의 글에서는 흔히 ‘여행기’라고 부를 만한 중요한 요소들을 결여하고 있다. 즉 여행자 자신의 경험, 누구를 만나고 어디에서 무슨 일을 당하고 무엇을 느끼고 하는 등의 개인적인 소회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반면에 어떤 도시를 묘사할 때면 그곳 주민들의 종교, 언어, 풍습, 화폐, 통치자, 특산물 등등이 거의 같은 패턴으로 나열된다. 그의 글이 때로 지루한 느낌을 주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각 지역과 관련된 흥미로운 일화나 설화 등이 그러한 단조로움을 깨뜨리며 그의 글에 생동감을 되살려 준다. 그는 자신이 직접 가보지 않은 곳들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일본에 대한 상세한 설명, 남양군도의 독특한 풍습들, 아프리카 동부 해안에 관한 이야기, 러시아와 북방 초원에 사는 주민들에 관한 묘사 등이 그러하다.


이렇게 볼때 마르코 폴로의 글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중세의 유럽인이 동양을 다녀온 뒤 남긴 여행기’는 결코 아니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세계의 서술 Description of the World’이라는 책의 원제목이 말해주듯이 그것은 ‘세계 여러 곳에 대한 체계적인 서술’이다. 그야말로 ‘암흑’의 중세라는 긴 터널 속에 있던 유럽인들이 당시 외부세계에 대해 갖고 있던 지식과 정보는 거의 제로에 가까웠기 때문에,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씌여진 일종의 ‘편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편람’ 속에는 그때까지 유럽인들이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놀라운 세계가 펼쳐져 있었고, 그것은 그후 수세기를 두고 수많은 사람들의 상상과 모험의 원천이 되었던 것이다.


콜럼버스가 산타마리아호를 타고 출항할 때 그의 손에는 [동방견문록]의 초판 인쇄본이 들려져 있었다. 그는 ‘인도’를 찾아 나섰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인도는 오늘날의 인도가 아니라 마르코 폴로의 인도, 즉 몽골제국의 대칸인 쿠빌라이가 다스리는 ‘세 개의 인도-중인도, 소인도, 대인도’ 였던 것이다. 콜럼버스가 남긴 [항해록]그가 대칸의 나라 ‘키타이’ 혹은 ‘카타이-오늘날의 북중국’ 부근의 해안에 도착했다고 믿었으며, 하이티 섬을 마르코 폴로의 글에 나오는 치팡구라고 확신했음을 입증하고 있다. 콜럼버스만 ‘키타이’를 찾아나선 것이 아니었다. 해로가 아니라 육로를 통해 모험과 순례의 길을 떠난 사람들도 있었다. 16세기에 들어와 오도릭이나 마테오 리치와 같은 제주이트 선교사들이 그러했다. 또한 마르코 폴로의 글에서 영감을 받은 18세기 영국의 유명한 시인 코울리지는 ‘쿠블라 칸’ 이라는 시에서 대칸이 거쳐하는 여름궁전 ‘재너두’의 아름다움을 묘사하기도 했다.


이처럼 마르코 폴로의 글은 ‘유럽의 근대’를 잉태시킨 자양분을 끊임없이 공급해 주었다. 비록 그 자신의 원래 의도와는 달리 왜곡되어 이해되고 전달된 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그의 글은 수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미지의 세계로 뻗어가게 하는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문명의 충돌과 종교의 대립이 날로 격화되어 가는 오늘, 우리는 피부색과 풍습과 신념의 차이를 ‘우열’의 기준으로 판단하지 말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탐구와 이해의 대상으로 받아들였던 마르코 폴로의 지혜를 배워야 할 것이다.



<중국내 이동경로>

---카슈가르---야르칸드---허텐---롭---둔황---란저우---상두---베이징---시안---청두---파간(?태국), 


베이징---양저우---항저우---취안저우---다낭(베트남)---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항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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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코폴로의 동방 견문록, 잘 읽었습니다.

솔내님의 댓글

profile_image 솔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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