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金方慶 주간]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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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2-06 06:34 조회1,525회 댓글0건본문
[충렬공 金方慶 주간] ③
고려사 제104권 열전제17권 김방경열전에 실려있는 일본원정 기록을 그대로 퍼서 소개합니다.
충렬공 할아버지께서 일본원정을 준비하고 일본 규슈지방 일대를 공략하는 내용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충렬공 할아버지의 일본원정 루트를 따라 여행할 기회가 올까요?
15년(원종)에 황제는 일본을 정벌코자 글을 보내 김방경과 홍다구에게 전함을 만드는 것을 감독하게 하였다. 이 전함 건조를 중국 남방에서 하는 방식대로 진행한다면 비용이 많이 들 뿐더러 장차 제 기한 내에 완공하기가 어려울 것이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근심하게 되었다.
그런데 김방경은 동남도 도독사(東南道都督使)로 되어 먼저 전라도에 가서 사람을 파견하여 중서성(원나라의)의 공문을 받아다가 우리 나라에서 만드는 방식대로 전선들을 건조하게 독려하였다.
이 해에 원종이 죽고 충렬왕이 즉위하였다. 김방경은 홍다구와 더불어 단신으로 와서 위로의 인사를 드리고 합포로 돌아왔다. 거기서 도원수 홀돈(忽敦) 및 부원수 홍다구, 유복형(劉復亨)과 함께 전함을 검열하였다.
김방경은 중군을 통솔하고 (즉 중군사로 되고) 박지량(朴之亮), 김흔은 지병마사(知兵馬事)로, 임개(任愷)는 부사(副使)로 되었으며
추밀원 부사 김선(金侁)은 좌군사(左軍使)로, 위득유(韋得儒)는 지병마사로, 손세정(孫世貞)은 부사로 되었으며,
상장군 김문비(金文庇)는 우군사로, 나우(羅佑), 박보(朴保)는 지병마사로, 반부(潘阜)는 부사로 되었는데 이를 3익군(三翼軍)이라고 일컬었다. 그런데 김흔은 곧 김수(綬)이다.
그리하여 몽고군 및 한군(漢軍-한족 출신 군대) 2만 5천 명, 우리 나라의 군대 8천 명, 초공(梢工-키잡이), 인해(引海-해상 안내자), 수수(水手-뱃군)를 합하여 6천7백 명과 전함 9백여 척을 거느리고 합포에 머물러 있으면서 여진군이 오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여진군이 제 기한에 도착하지 못하였으므로 곧 출발하여 대마도(對馬島)에 들어가 싸워서 쳐 죽인 수효가 대단히 많았다.
일기도에 이르니 왜군이 해안에 진을 치고 있었다. 박지량과 김방경의 사위인 조변이 그들을 쫓으니 왜인들이 항복하기를 요청하다가 나중에는 와서 싸웠다. 홍다구와 박지량, 조변이 1천여 명을 쳐 죽였다.
그리고 삼랑포(三郞浦)에 배를 남겨 두고 길을 갈라서 진격하여 적군을 죽인 것이 아주 많았다.
왜군이 돌격해 와서 중군을 치게 되자 장검(長劒)이 바로 좌우에서 번득였으나 김방경은 심어 놓은 나무마냥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으며 도리어 효시(嚆矢-전투 신호 용 화살)를 하나 뽑아 쏘고 소리를 높여 크게 외치니 왜군들이 놀라 기가 죽어서 그만 달아났다.
박지량, 김흔, 조변, 이당공(李唐公), 김천록(金天祿), 신혁(申奕) 등이 힘써 싸우니 왜군이 대패하고 엎드러진 시체가 삼을 베어 눕힌 듯이 많았다.
홀돈이 말하기를 “몽고 사람들이 비록 전투에 익숙하다 하지마는 어찌 이보다 더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여러 군들이 왜군과 싸워서 날이 저물어서야 전투를 중지하였다.
김방경이 홀돈, 홍다구더러 말하기를 “병법에 군대가 천 리나 되는 먼 곳에까지 나아가서 싸우게 되면 격하는 기세가 꺾을 수 없으리만큼 강하다고 한다. 지금 우리 군사들이 수적으로는 적지마는 벌써 적의 지경에 들어섰으니 사람들이 제가끔 힘써 싸우게 되었으니 이것은 곧 맹명(孟明)이 배를 불사르고 회음(淮陰-한신)에서 강을 등지고 진을 친 격이다. 그러니 다시 싸우도록 하자!”라고 하니
홀돈이 말하기를 “병법에 ‘적은 수효의 군사들이 강하게 덤비다가는 결국 많은 수효의 군사들에게 붙잡히게 된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피로하고 부족한 것이 많은 군대들을 몰아서 날로 많아지는 적군과 싸우게 한다는 것은 완전한 계책이라고 할 수 없으니 군대를 돌이켜 돌아가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하였다.
그러던 중에 유복형이 유시(流矢-날아 오는 화살)에 맞아서 먼저 배에 올라가게 되어 드디어 군사들을 이끌고 귀환하게 되었다.
때마침 밤에 세찬 비바람을 만나서 전함들이 바위와 언덕에 부딪쳐 많이 파손, 침몰되었으며 김선은 물에 빠져 죽었다.
합포에 도착하여 포로들과 노획한 군기, 병장들을 황제와 왕에게 바쳤다.
왕은 추밀 부사 장일(張鎰)을 보내 그들을 위로하고 김방경에게 명령하여 먼저 개경으로 돌아오도록 하였으며 그에게 상주국(上柱國)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의 관직을 주었다.
원년(충렬왕)에 관제를 고치게 되자 그를 첨의 중찬 상장군 판전리 감찰사사(判典理監察司事)로 임명하였다.
2년에 원나라에 가서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왕이 중서성에 편지를 보내기를
“나의 신하 김방경은 귀국의 명령을 받들어 진도와 탐라를 공격하여 반적들을 격파하였으며 일본을 정벌할 때에는 전함들을 수리, 건조하며 군사 위력을 떨침에 있어서도 참으로 그 공로가 많았다. 그러므로 호두 금패(虎頭金牌)를 주어서 일후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격려가 되게 하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김방경이 폐백을 올리는 예식을 끝내고 궁전으로 올라갔는데 이때 망송유주(亡宋幼主)가 김방경의 뒤에 왔는데 두 사람이 유주의 소매를 붙잡고 인도하였다. 황제가 유주를 황태자의 아랫자리에 앉게 하였다.
예식을 맡은 관리가 김방경과 송나라의 여러 신하들의 좌석 차례를 결정해 줄 것을 청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고려는 의리를 아는 나라요, 송나라는 반항하다가 힘이 모자라게 되어서야 항복한 나라이니 어찌 똑같이 취급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송나라의 복왕(福王)은 유주의 조부 항렬이며 또 나이도 늙었으니 김재상(방경)의 윗자리에 앉히고 그 밖의 사람들은 모두 김방경의 아랫자리에 앉히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김재상은 군공이 있으니 호두 금패를 주도록 하라!”고 하였다. 동쪽 나라(고려) 사람으로서 금부(金符)를 차게 된 것은 김방경으로부터 시작하였다.
귀국 후 다시 김방경을 중찬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은 10근을 주었다.
6년 가을에 왕에게 글을 올리어 정계에서 은퇴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왕은 승지 정가신(鄭可臣)을 보내 잘 타일러 다시 정사를 보게 하였다. 겨울에 또다시 연로 퇴직을 청하였으므로
왕이 말하기를
“그대는 나이가 늙었지마는 세운바 훈공과 업적은 보통 사람에 비할 바 아니니 어찌 경솔하게 벼슬살이를 그만두게 허락할 수 있겠는가? 또 지금 황제가 일본 정벌의 명령을 내리었으니 우리 나라에서도 응당 황제에게 말하여 원수를 두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니 아무런 훈공도 업적도 없는 자를 황제에게 요청할 수도 없지 않은가?”라고 하면서 마침내 허락하지를 아니하였다.
그후 또다시 글을 올려 퇴관하려 했으나 역시 허락하지 않고 우승지 조인규(趙仁規)를 보내 중서성에다 글을 보내 이르기를
“나의 신하인 김방경은 마음을 다하여 자기 직무를 충실히 집행하였고 귀국의 명령이 있을 때마다 근면하게 일하여 조금도 해이한 적이 없었다. 또 진도, 탐라, 일본을 정벌할 때에는 관군을 따라서 토벌에 참가하여 여러 번 승리하여 공을 세웠기 때문에 황제가 직접 호두 금패를 주어서 그 공적을 장려하고 위로하여 주었다.
지금 다시 정군(正軍) 만 명, 수수(水手-뱃군) 1만5천 명을 관할, 인솔하고 일본 정벌에로 떠나는데 만약 그가 군사 지휘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호령이 잘 되지 못하며, 또 혹시 실수를 초래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김방경이 나이는 비록 많으나 장한 마음만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어서 다시금 힘을 다하여 황제의 은혜에 보답할까 하고 있으니 황제께 잘 아뢰어 원수부의 성원으로 참가케 하여 사업할 수 있게 하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황제는 글을 보내 김방경에게 중선 대부, 관령 고려국 도원수(中善大夫管領高麗國都元帥)의 관직을 주었다. 이때 김방경은 신년 축하 차로 원나라에 가 있었는데 황제는 대명전(大明殿)에 나와 앉아서 축하를 받았다. 4품 이상 인원들은 전상(殿上)에 올라가 연회에 참가할 수 있었는데 김방경도 역시 이에 참여하였다.
황제는 따뜻한 말로 그를 위로하고 좌석을 승상(丞相)의 다음에 잡게 하였으며 진수 성찬을 그에게 주고 또 흰밥과 생선국을 주면서 “고려 사람들은 이런 것을 좋아하지”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사흘 동안 계속 황제의 연회에 참가하였고 귀국하게 되자 활, 화살, 검, 백우갑(白羽甲)을 주었으며, 또 활 천 개, 갑옷 백 벌, 반오(솜옷) 2백 벌을 주어 동정에 나가는 장령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고 이내 동정 조령(東征條令)을 보여 주었다.
승상 안중(安重)은 본래 우리 나라에 유익되는 일을 해 준 일이 있는 자인데 때마침 삭방(朔方-원나라 북방 지방)에 나가고 없었으므로 국가에서 따로 선물을 가져가지 않았다.
김방경이 은우(銀盂-은제 술잔의 일종)와 모시 베를 그 부인에게 보내 주었더니 그 부인이 말하기를 “이것은 김재상이 보내 준 것이 아닌가? 승상이 북쪽으로 가고 난 뒤에는 국가적 선물이라고는 전혀 없었는데 공(김방경)이 아니면 누가 이런 부녀자를 생각해 주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원나라에 선물을 가져가는 사신들이 반드시 국가적 선물들을 가지고 갔다가 혹 나머지가 있게 되면 사신으로 간 자가 대개 자기의 사사용으로 써버리곤 하였는데 김방경이 일찍이 진봉사가 되었을 때에는 이러한 나머지들을 모두 다 도로 국가에 갖다 바치었다.
7년 3월에 군대를 동원하여 일본 정벌을 하게 되었다.
김방경이 먼저 의안군(義安軍)에 도착하여 군사 기자재들을 검열하였고 왕은 합포에 도착하여 대규모로 각 군의 사열을 거행하였다.
김방경이 흔도, 홍다구, 박구(朴球), 김주정(金周鼎) 등과 더불어 출발하여 일본의 세계촌 대명포(世界村 大明浦)에 이르러 통사(通事-통역) 김저(金貯)로 하여금 격(檄-관문서)을 가지고 가서 그들을 타이르게 하였다.
김주정이 먼저 왜군과 전투를 시작하니 제군(諸軍-좌, 우, 중군 등)이 모두 배에서 내리어 왜군과 싸웠는데 낭장 강언(康彦), 강사자(康師子) 등이 전사하였다.
6월에 김방경, 김주정, 박구, 박지량(朴之亮), 형 만호(荊萬戶) 등이 일본군과 접전해서 3백여 명의 목을 베었는데 일본 군사들이 돌격해 왔으므로 관군(몽고군)이 무너지고 홍다구는 말을 내버리고 달아났다.
왕(王) 만호가 다시 측면 공격을 들여 대어 일본군 50여 명의 목을 베니 일본군이 이로 인하여 물러갔으며 홍다구는 겨우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튿날에 또다시 싸웠으나 패전하였고 군사들이 많이 유행병에 걸리어 죽은 자가 3천여 명이나 되었다.
흔도, 홍다구 등은 여러 번 싸워서 승리하지 못했고 도 범문호(范文虎)가 약속한 기한이 넘도록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회군하자고 의논하기를
“황제의 명령은 강남군(江南軍-범문호의 군대)과 동략군(東略軍)이 반드시 이 달 보름까지에는 일기도(一岐島)에서 합세하도록 하였는데 지금 강남군은 도착하지도 않았고 우리 군사들만이 먼저 도착하여 몇 번 싸웠으나 배는 썩고 양식은 다 되어 가니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김방경이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묵묵히 앉아 있기만 하였다.
한 열흘쯤 지난 다음에 다시 먼저 번처럼 논의가 되었는데 김방경이 말하기를
“황제의 명령을 받고 우리는 석 달 동안의 식량을 가지고 떠났는데 지금 아직 한 달 분의 식량이 남아 있으니 남군(강남군)이 오는 것을 기다려 힘을 합쳐 반드시 일본을 격멸하여야 한다”라고 하니 여러 장수들이 감히 또다시 무어라고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얼마 후에 범문호가 만군(蠻軍) 10여만 명을 인솔하고 도착하였는데 선박의 총수는 9천 척이나 되었다.
8월에 폭풍을 만나서 만군은 모두 물에 빠져 죽고 그 시체들이 썰물과 밀물을 따라 포구에 밀려들어 포구가 시체로 가득 찼으므로 시체를 밟고도 걸어갈 수 있을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회군하였다.
9년에 또다시 글을 올리어 퇴관할 것을 요청하였으므로 추청 정난 정원(推忠靖難定遠)공신, 삼중 대광 첨의 중찬, 판전 이사사, 세자 사의 관직을 띠고 치사(致任)하게 하였다. 이어 첨의령(僉議令)을 더 주었으며 또 상락군 개국공(上洛君 開國公), 식읍(食邑) 천 호를 봉하여 실봉(實封) 3백 호를 먹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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