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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연수와 하담 김시양선조님 영해 유배지 탐방>(4)-원구리 서재골 하담선조 유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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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5-02-01 22:26 조회1,596회 댓글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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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로 가는 길은 이러했다.

영덕에서 울진방향(7번 도로)으로 약 10분가량 가면 사거리--창수(좌측)방면(918번 도로)--5분 거리 후 도로 좌측으로 원구1리.


  마을 중앙에 있는 회관에 도착하니 두 분(南應時-83세, 南正烋-72세) 어른께서 나오신다. 곧 내게로 오셔서 수인사를 나눈다. 방문 목적을 말하자 두 분은 백암 온천으로 출발하려던 마을 행사 출발시간을 늦추시고 우리 차에 타시며 말씀을 잇는다. 하담 김시양님께서 이곳에 왔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그 유배가옥이 구체적으로 어디인지, 관련한 전언 등은 없다고 한다. 다만 광해군때 서성(주1)이 유배왔던 곳이 있는데 일명 서재골(서성 즉 ‘徐씨 宰相이 살던 곳’이란 뜻)이라 불린다고 한다. 이곳에 얼마 전 서성의 후손들이 답사와서 확인하기도 했다 한다. 아마도 이곳에 서성이 먼저 유배왔다가(당시 개성유수. 1614--1616년경으로 추정. 59세) 후에 원주로 이배되었고, 그 다음에 김시양이 그 집으로 유배 왔을 것(1616년. 36세)이라고 말씀하신다.

 유배지(서재골)는 마을에서 창수방향으로 약 1Km를 가니 우측으로 낮은 구릉같은 것이 벋어 나오며 곧 좌측으로 북향을 하고 있는 널찍한 터가 나온다. 지금은 모두 논과 밭으로 되어 있지만 옛날에는 산 밑으로 작은 마을이 있었고 그 앞으로 낮은 산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평지작업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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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구리의 서재골. 하담 선조님 유배집터 추정지. 산 아래가 집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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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재골 앞의 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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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재골 입구의 언덕>

 

 이곳을 유배왔던 인사는 조선조에 약 49명이 있는데 광해군때 이명준, 진선, 서성, 김시양 등이 다녀갔다고 한다(영덕문화 제10집. 1999년 영덕문화원 간). 몇 장의 사진을 찍고 두 분 어른을 기다리고 있는 전세버스로 모셔 드렸다. 너무도 기뻤다. 잃어버렸던 선조님의 묘소라도 찾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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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증해 주신 분들. 좌로부터-남정휴님, 필자, 남응시님>

 

  이어 하담 선조께서 제자로 삼으시고 학문을 가르쳤다고 하는 대은 권경(權璟. 1604-1666)의 종가댁(권 박씨 거주)을 찾아 괴시 2리, 일명 관어대로 향했다. 원구리에서 대진 해수욕장을 향해 불과 5분 여를 가니 고색이 짙은 기와집으로만 된 큰 동네가 나온다. 괴시1리이다. 큰 해설판도 있다. 모든 가옥이 민속자료, 문화재 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이 마을에서 가정(稼亭) 이곡(穀)선생과 목은(牧隱) 이색(穡)선생이 출생하셨다고 한다. 함창이씨, 수안김씨, 영해신씨, 영양남씨 등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 왔는데 지금은 영양남씨만이 살고 있다고 한다. 길옆에 <가정목은 양선생 휴허비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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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시1리 영양남씨 와가 집성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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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 이곡선생과 목은 이색선생 유허비각>

 

이곳에서 불과 1Km를 가니 괴시2리가 나온다. 그런데 이곳에서 나는 또 하나의 놀라운 발견을 했다.  (계속)



주 : 서성(徐?)  (디지털 한국학 자료)

1558(명종 13)∼1631(인조 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현기(玄紀), 호는 약봉(藥峯).

대제학 서거정(徐居正)의 현손으로, 해(?)의 아들이다. 이이(李珥)·송익필(宋翼弼)의 문인이다.

1586년(선조 19)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권지성균학유(權知成均學諭)가 되었다.

이어 인천부교수(仁川府敎授)·검열·대교(待敎)·봉교(奉敎)·전적을 거쳐, 감찰과 예조좌랑을 지냈다. 병조좌랑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다가 호소사(號召使)  황정욱(黃廷彧)의 요청으로 그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함경도로 길을 바꾸었다가 국경인(鞠景仁)에 의하여 임해군(臨海君)·순화군(順和君)·황정욱 등과 함께 결박되어 가토(加藤淸正)에게 가게 되었으나 탈출하였다.

왕의 명령으로 행재소에 이르러 지평·병조정랑·직강(直講)을 역임하고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을 접대하였다. 다시 지평과 직강을 거쳐 삼남지역(三南地域)에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민정을 살피고 돌아온 뒤 전수(戰守)의 계책을 아뢰었다. 이로 인하여 제용감정(濟用監正)으로 승진하고, 경상감사에 발탁되었으나 대간의 반대로 내섬시정(內贍寺正)으로 바뀌었다.

그뒤 경상우도감사로 내려가 삼가(三嘉)  악견산성(嶽堅山城)을 수리하고 민심을 진정시켰다. 이어 동부승지·병조참의·비변사유사당상(備邊司有司堂上)·승문원부제조(承文院副提調)를 겸하였다. 다시 병조참의·도승지·황해감사·함경감사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있다가 평안감사로 나아가 당시 평양의 아전들의 환심을 얻었다.

이어 도승지가 되어 경연에서 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을 신구(伸救)하고, 성혼(成渾)과 정철(鄭澈)을 헐뜯는 정인홍(鄭仁弘) 일파를 배척하다가 왕의 미움을 받았다.

이어 판윤(判尹)으로 비변사와 훈련도감의 제조를 겸하고, 형조판서·병조판서·지중추부사를 거쳐 함경감사로 나갔다. 다시 호조판서로 지의금부사를 겸하다가 경기감사가 되고, 그뒤 우참찬을 거쳐 개성유수가 되었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어 단양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영해와 원주 등지로 옮겨지는 등 11년간이나 귀양살이를 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방환되었다.

이어 형조판서·대사헌·경연성균관사를 겸하고,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호종하고 판중추부사·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도 왕을 강화도까지 호종하였고,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격하였다.

학문을 즐겨 이인기(李麟奇)·이호민(李好閔)·이귀(李貴) 등과 남지기로회(南池耆老會)를 조직하여 역학(易學)을 토론하였고, 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대구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약봉집 藥峯集》이 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댓글목록

김발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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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손에 땀이 날 정도로 흥미롭게 읽고 있습니다. 수백년 전의 역사도 찾고자 하는 노력만 있으면 찾을 수 있다는 교훈을 주고 계십니다. 저도 요즘 게을리 했던 일들을 다시 시작해야 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정중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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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겨울 나그네가 되셔서 동해안 바닷가 마을의 역사를 깨우쳐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따뜻한 곳에서 편안히 볼수 있어.....

김주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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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선조님 유배지 찾아 남동해안을 돌고 돌아서..... 드디어 경상북도 영덕 하고도 영해 땅!!!
사진도 아주 상쾌합니다. 시원합니다.
---또 하나의 놀라운 발견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김영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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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또하나의 놀라운 발견.....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