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金方慶 주간] 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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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2-08 01:01 조회1,614회 댓글0건본문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여묭연합군의 일본정벌] 당시 일본의 집권정권인 카마쿠라 막부 관련 내용이 있어 그대로 퍼서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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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마쿠라 시대(謙倉時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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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氏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는, 1192년 조정으로부터 정이대장군에 임명되고, 카마쿠라에 막부를 설치하여 무사정권을 수립했다. 카마쿠라 막부는 이후 약 140년간 지속되는데, 이 기간을 카마쿠라 시대라고 한다. 이 때부터 일본에서는 명치유신이 일어날 때까지 700여년간 무사들에 의한 군사독재정치가 지속된다.
카마쿠라막부의 성립은 종래의 귀족정권에 대해 무사가 독자적 정권을 가지게 됨을 의미하며, 이는 장군과 그 부하(고케닌=御家人이라고 함)가 토지를 매개로 맺은 주종관계를 그 기초로 하고 있으며, 막부는 그중 유력한 자를 슈우고(守護)·지토오(地頭)로 임명하여 전국적 지배를 실시했다.
하지만, 정권의 구조 자체에는 고대적 성격이 남아 있었고, 쿄오토에는 천황과 귀족들의 정부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카마쿠라 막부는 봉건제도 형성의 한 단계로 보는 것이 온당하다. 즉, 카마쿠라 시대는 公·武 2중정권의 시대였던 것이다.
요리토모가 죽자, 그의 처인 마사코(政子)의 친정인 호오죠(北條)씨가 실권을 장악하게 되고, 싯켄(執權) 정치를 하게 된다.
13세기 후반, 두 차례에 걸친 여·원 연합군의 일본원정(1274, 1281)은 정치, 경제, 사회의 전반에 걸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두 번 모두 태풍의 덕택으로 여·원 연합군을 물리치긴 했지만, 약소 고케닌들의 재정적 부담이 가중되어 불만이 누적, 막부의 세력을 따르지 않게 되고 막부의 세력은 현격히 약화되었다. 이 틈을 노려 고다이고 천황은, 카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킨다.
4. 카마쿠라 막부와 몽고침입
1268년 몽고는 고려를 통해서, 일본에게도 종속할 것을 요구하는 국서를 전달하였다. 그러나 집권 호쿠죠오도키무네(北條時宗)는 몽고의 그러한 요구에 응하지 않고, 몽고군이 공격해 올지 모른다고 판단해서 큐우슈우(九州)의 방비를 견고히 하였다.
몽고는 고려에 배, 무기, 군사 등의 준비를 강요하였고, 1274년 10월 3일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 3만 3천여명이 900여척의 군선을 타고 합포(=경남 마산)를 출발하여 일본으로 출진하였다. 몽고군은 5일에는 쓰시마(對馬)를, 14일에는 이키(壹岐)섬을 점령하였고, 19일에는 하카타(博多)까지 침공하여 다음 날인 20일에는 큐우슈우에 상륙하였다.
일본군도 분전했으나 몽고군의 화기사용과 집단전법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였고 사상자가 속출하여 다자이후(大宰府)로 후퇴하였다. 밤이 되자 몽고군은 공격을 중지하고 그들의 배로 철수하였다.
그런데 그 날밤 갑자기 태풍이 불어 닥쳐 하카타만에 정박 중이던 몽고의 군선이 거의 침몰되고 병사들이 많은 피해를 입어 철군하였다. 이 때 익사한 몽고군은 1만 3천 5백명 정도라고 한다.(文永の役)
다음 해인 1275년 쿠빌라이는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종속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집권 토키무네는 그 사신의 목을 베었다. 이어 1279년에 다시 사신을 보내 왔으나 역시 참수하였다. 뿐만 아니라 몽고군의 재 침입에 대비하여 하카타만(博多灣)에 방루를 쌓고 전쟁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쿠빌라이는 자신의 요구에 응하지 않는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정수일본행중서성(政收日本行中書省)이라는 별도의 기구까지 설치하여 일본 정복을 준비하였다.
송나라를 복속시키고, 전 중국을 정복한 몽고는, 1281년 5월 3일 재차 일본 원정에 나섰다.
병력은 1차 침공 때의 5배로 남송병 10만여명, 군선 3천 5백척을 강남군으로 편성하고, 몽고/한인/고려 군사 4만과 군선 9백척을 동로군으로 편성하였다.
1차 침공 때와 마찬가지로 쓰시마와 이키섬을 함락시키고 하카타항으로 진격하였으나, 일본측이 해안 수비를 강화하고 완강히 대항하였기 때문에 상륙에 실패하였다.
밤이 되자 일본군은 작은 배를 타고 와서, 몽고군의 배에 접근하여 횃불을 던져 배를 불태웠다. 몽고군도 이 작전에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일단 강남군과 합류하기 위해 철수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강남군은 당초 이키섬에서 동로군과 합류할 예정이었으나 이를 변경하여 히라도(平戶)로 향하였다. 이로 인해 양 군은 7월에야 합류할 수 있었으며, 총공격을 눈앞에 두고 키타큐우슈 일대에 불어닥친 태풍으로 인해 몽고군은 철수하였다. (弘安の役)
몽고는 이 이후에도 제 3차 원정 계획을 세웠지만, 고려, 중국, 베트남 등에서 몽고에 대한 저항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자, 결국 일본침략을 포기하게 되었다.
몽고의 일본원정 실패의 원인은, 몽고군이 다른 나라의 군인과 섞인 혼성군으로 이루어 졌고, 고려의 민중과 군대가 몽고에 저항하고 있었고, 시기적으로 태풍시즌을 택해 패전을 자초하였다.
일본에서는 이 태풍을「신(神)」이 가져다 준「바람(風)」이라 하여「카미카제(神風)」라고 한다. 또한 신이 수호해 주는 나라라고 자긍심을 부추겨 신국사상(神國思想)이 이때부터 팽배해 졌다.
5. 카마쿠라막부의 붕괴
몽고군과의 두 번에 걸친 전쟁에서 막부는 몽고군의 침입을 간신히 방어할 수 있었지만, 서국(西國)의 어가인(御家人)들은, 이 이후에도 키타큐우슈우(北九州)연안에서의 방비를 계속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경제적인 부담만 늘어날 뿐이었다.
게다가, 어가인의 역할에 대해. 막부는 은상의 토지를 줄 수 없는 형편에 있어서, 막부에 대한 어가인의 불만은 차츰 강해졌다. 또한 어가인 집에서는 영지를 형제들에게 나누어 상속하였기 때문에 상속 때마다 영지가 세분화되었다.
게다가 상업의 발달로 지출이 늘어나면서 생활고가 한층 가중되었다. 어가인들 사이에는 토지를 매입하거나 매도하는 자가 늘어나면서, 막부를 지탱하던 어가인 제도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한편, 유력한 어가인 중에는 지두(地頭) 등과 결탁하여 세력을 강화하는 자가 나타났다. 또 호꾸죠오씨(北條氏)일족사이에서도, 세력다툼이 일어났고, 천황과 일부 공가(公家)는 무력으로 막부를 넘어뜨릴 계획을 세워 기회만을 엿보기도 하고, 정면으로 반발하여 실패하기도 하여 천황이 오키(隱岐)로 유배되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이런 국정의 혼란 속에서 카와찌(河內=지금의 大阪)의 쿠스노끼마사시게(楠木正成)를 비롯한 각지의 무사들이 천황 편에 가담하여 잇달아서 봉기하였다. 막부는 아시카가타카우지(足利尊氏) 등을 대장으로 해서 대군을 보내어 정복하게 했다.
그러나 전부터 막부에 불만을 갖고 있던 타카우지는 갑자기 천황 측에 가담해 막부 측을 공격하였다. 그 때까지 사정을 살피고 있던 무사들이 잇달아서 천황 측에 가담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닛타요시사다(新田義貞)가 일족을 거느리고 카마쿠라를 공격하여 1333년 호쿠죠타카토키(北條高時)에게 자살을 명하므로 해서 카마쿠라 막부는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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