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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께서 전함조선한 장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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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02-02-08 20:13 조회1,50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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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께서 여몽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할때 고려측에서는 모든 병선을 제조공급하였습니다.

역사스페설에서도 방영된 바가 있지만, 이때 만든 전함이 거북선의 원조일 것이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때의 전함 건조 장소로 전해지고 있는 곳이 있어 여기에 소개합니다.

충렬공께서 戰艦 造船한 곳

부안 진서면 검모포

진서면의 검모포

김방경(1212~1300)은 고려 후기의 명장이고 충신이다.

시호는 충렬이고 자는 본연이며 안동인으로 어려서부터 뜻을 학문에 두어 소년시절에

급제하였으나 서북면병마판관으로 있을 때 몽고군의 침입을 막아 싸운 이래 상장군이

되었으며 진도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치고 삼별초의 난을 평정하고 여몽동정연합군의

고려군 사령관으로 용맹을 떨친 충신이다. 홍다구로부터 수차에 걸친 모함을 받고

혹독한 고문을 받기도 하고 귀양까지 갔었으나 나라에 충성을 하는 일에는 변함이

없었는데 자기 조국을 배반하고 그 조국을 괴롭힌 홍다구와 나라를 위하여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충성을 다한 김방경장군,

한번쯤 비교하여봄도 뜻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원나라 세조(쿠비라이)의 빗발치는 독촉과 강압에 의하여 일본정벌의 준비를 마친

고려 조정은 1274년에 대장군 나유를 원나라에 보내어 준비가 완료되였음을 보고하는데

나유장군이 원의 중서성(최고의 의정기관)에 서면으로 제출한 보고의 내용에

변산과 나주의 천관산에서 함선을 건조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금년 정월3일에 대선 300척을 타조하라는 조지(원의명령)를 복명하와 곧 그 조치를

행하여 추밀원부사 허공을 전주도 변산에 좌복야 홍녹주를 나주도 천관산에 보내어

재목을 준비하도록 하고 또 시중 김방경으로 도독을 삼아 관하 원장을 다 정련하고

소용되는 공장과 물자를 아울러 안팎에 준비토록 재촉하였나이다.정월 15일에 이르러

모두 모여 16일부터 일을 시작하여 5월 그믐에 이르러 일을 마치니 배는 대소를 아울려

900척을 완조하였고 합용의 물자도 원활히 비축하였으므로 삼품관의 능숙한 자로 하여금

회박을 분관케 하여 이미 금주(지금의 김해)로 향하였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제상국은

잘 부주하소서]

 

 이 때가 1274년 원종15년인데 6월에 원종이 죽고 원나라에 반 볼모상태로 가 있던

세자 심이 돌아와 즉위하니 이분이 충렬왕이다. 그러니까 여몽이 동정연합군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일본을 침공한 것은 충렬왕 즉위 초전인 1724년 10월초이며 전라도

변산과 나주에서 건조된 수송함선이 김해에 집결하여 있다가 합포(지금의마산)에서

 나유장군의 원나라 중서성에 보고한 내용에 의하면 1274년 정월3일에 원나라로부터

대선 300척을 건조하라는 명령을 받은 고려는 즉시 보안현의 변산과 나주 천관산에

조선소를 설치하고 각기 책임자를 임명하여 정월 16일부터 일을 시작하여 900척에

이르는 큰 선단으로 불과 넉달만에 완조한 것이다. 일본을 향해 출전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김방경 장군을 감독으로 삼아 고려군의 장병들을 조련시키고 그에 따른

공장,수수,역부등을 빈틈없이 동원 시켰으며 완성된 900척의 전함은 배를 능숙하게

잘 부리는 삼품관들로 하여금 운항관리하게 하였다는 것이다.그 러면 이와 같은

대규모의 전함들은 어떤 이유로 변산에서 건조하였으며 변산의 어디에 조선소를

설치하고 배를 건조하였을까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자.

조선소를 구체적으로 어디에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그 정확한 장소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당시의 모든 여건이나 정황으로 보아 보안현의 검모포(지금의곰소앞바다)에 있었던

검모포진영(수군의 기지)이 있었던 지금의 부안군 진서면 진서리 곰소 동편의

구진마을이었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검모진포은 서해의 서남연안을 지키는 수군의 요충지로 수군의 진영이 되었다.

 동국여지승람34권 부안현의 관망조에 검모포진영의 기록이 보인다.

"현의 남쪽 51리에 있다.수군 만호1명이다"라 하였다.

검모진영은 구진마을에 있었다.이에 대하여는 다음에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하겠다.

검모포진영이 있었던 구진마을이 당시 배를 만든 조선소였을 것으로 추정하는데는

이를 뒷 받침하는 몇 가지의 근거가 있다.

 

첫째.당시 변산은 행정적으로도 보안현에 속해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고려사 57권 지리 보안현 조에도 명확하다.

(...별호를 낭주:浪州)라고 한다.변산이 있고 (위도가 있다).라 하였다

 

둘째, 변산반도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 지형적인 여건으로 보아 조선소를 설치하기에

검모진포만한 곳이 없다. 고창의 선운산 자락과 변산자락 사이에 넓고 길다란

만을 이루어 항시 잔잔한 물결과 깊은수심,그리고 널찍한 뻘판이 있다.

 

셋째,수군의 진영이 있는 곳이어서 함선을 건조하는 장소로는 직접적으로

관계가 깊으며 관에서 하는 일을 추진하기에도 매우 편리하였을 것이다.

 

솔내 김영환 solnae@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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