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독립운동 列傳] Ⅱ-1. 김재봉·강달영·차금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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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02-04 16:24 조회1,901회 댓글3건본문
[다시 쓰는 독립운동 列傳] Ⅱ-1. 김재봉·강달영·차금봉 | |
[경향신문] 2005-01-09 18:07 |
![]() ![]() ◇‘사회주의’ 그 매력적인 이데올로기=3·1운동을 통한 조선독립이 실패로 돌아가자 국내 지식인들은 민족주의에 대한 사상적 회의에 빠졌다. 그러던 중 1917년 10월 일어난 러시아혁명의 물결은 급격히 조선에 스며들면서 사회주의 사상은 지식인들에게 민족해방운동의 또 하나의 이념적 무기로 자리잡았다. 팽배한 사회주의의 이념적 토양 위에 25년 4월17일 조선공산당이 탄생했다. 조공은 조선독립을 지원하기 위해 국제공산당 코민테른이 주최한 모스크바회의에 참석중인 김재봉을 책임비서로 선택했다. 안동김씨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난 김재봉은 안동의 풍산 오미마을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부호의 종손이었다.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기득권자가 왜 그토록 험난한 가시밭길을 택했을까. 독립기념관 김희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고자 하는 선각자의 소명의식은 60여년이 흐른 지금도 우리시대 지식인들이 본받아야 할 덕목”이라고 평가한다. 안동에서 한학을 공부한 뒤 상경, 신사상을 습득한 김재봉은 강습소를 열어 농민·노동자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만주일보 기자로 활동하던 중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에 연루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반일투쟁의 일환으로 시작한 계몽운동이 조국독립에 직접적인 동력이 되지 못한다는 한계에 봉착했고, 새로운 사상적 돌파구가 필요하던 찰나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 빠르게 공감대를 얻어 가던 사회주의에 매료됐다. 만인평등을 지향하는 ‘새로운 사회’를 갈구하게 된 것이다. 모스크바회의 참석차 러시아에 머물던 1년반 동안 사회주의를 체화한 그는 조공의 적자(嫡子)로 돌아온다. ◇‘제국주의 타도가 곧 조선독립’=노동자·농민·학생을 지도할 중앙조직의 필요성에 따라 1차 조공은 결성됐다. 조공의 당면목표는 조선독립. 당시 현실에선 일제는 곧 부르주아요, 식민지 조선은 프롤레타리아였다. 따라서 공산주의 모토인 계급해방을 위해선 일본제국의 전복이 선행돼야 했고 이는 곧 조선독립을 의미했다. 그러나 25년 11월 국경도시 신의주에서 발생한 폭행사건을 수사중인 일본경찰에게 조공의 실체가 발각됐다. 이때 집행부 대부분이 검거되면서 당은 와해 위기에 처했다. 가까스로 검거의 그물망을 빠져나온 김재봉은 경남 진주에서 조선일보 지국을 경영하던 강달영에게 책임비서 자리를 급히 넘겨준 뒤 1주일 후 전격 체포됐다. 조국독립을 향한 뜨거운 여망은 차디찬 독방 속에서 애끓는 통한으로 얼어붙었다. 인텔리겐차 김재봉이 중앙무대에서 활동한 반면 2차 조공 책임비서에 전격 기용된 강달영은 지방을 근거로 한 노동자·농민운동의 혁명가였다. 3·1운동 이후 경남 일대에선 폭발적으로 시위운동이 번져나갔고 그 기폭제가 된 진주시위운동의 주동자가 바로 그였다. 성균관대 임경석 교수는 “강달영은 3·1운동 가담 혐의로 옥고를 치르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였고 서울 무산자동맹회(22년), 백정신분해방운동(23년)을 주도하는 등 대중과 밀착해 민족운동을 펼쳤다”고 설명했다. 강달영은 1차 조공 시절과 달리 민족주의 진영과의 공조에 힘썼지만 뜻을 채 펼치기도 전에 좌절되고 말았다. 26년 6·10만세 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또 다시 수감된 것. 옥중 모진 고문 속에 정신질환으로 병감에 수용되곤 했던 그는 결국 해방을 3년 앞둔 채 미치광이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마지막 조공의 책임비서는 서울 화천동에서 빈민의 아들로 태어난 차금봉이었다. 당시 중외일보는 “그의 삶이 곧 노동운동사”라고 기록하고 있다. 차금봉은 3·1운동 당시 노동계급의 선봉에서 노동자 시위와 파업을 지도했고 민족해방운동의 큰 줄기인 노동공제회, 노농총동맹, 신간회, 조선공산당에 몸 담았다. 그의 행적은 곧 20년대 민족해방운동사가 되는 셈이다. 재건과 동시에 무너진 3차 조공 이후 4차 조공도 일제의 탄압 앞에서 채 5개월이 못돼 공중분해됐다. 차금봉은 도쿄로 피신했으나 현지에서 체포돼 갖은 고문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옥중에서 눈을 감았다. ◇그들은 정말 ‘빨갱이’였을까=해방 후 60년 동안 역사로부터 외면당해온 좌파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에 대해 이제라도 정당한 재평가 작업이 뒤따라야 할 시점이다. 그래야만 반쪽자리에 불과했던 독립운동사가 온전한 제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동양공과대학 최규진 교수는 “어떤 사회주의자라도 계급해방과 민족해방을 분리해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당시 사회주의 운동은 혁명운동이라기보다는 계몽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을 들어 “김재봉·강달영·차금봉과 같은 초기 공산주의자들은 일명 ‘좌파 민족주의자’로 볼 수 있다”고 조심스레 규정했다. 국민대 사학과 장석흥 교수는 “1차 조공 핵심인물인 김단야, 권오설 등이 일제에 노출이 덜 된 강달영을 적임자로 ‘찍었던’ 것이지 강비서는 공산주의 이론도 잘 몰랐던 인물”이라고 지적했다. 강비서와 차비서가 민족주의자들과의 연대를 모색한 것에서 볼 수 있듯 당시 사회주의 운동의 궁극적 목표는 이념이 아닌 조국독립에 있었던 것이다. 이들 세 사람의 또 다른 공통점은 하나같이 해방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등졌다는 데 있다. 북한정권과 연결고리가 없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달영만이 3·1운동의 업적만 인정받아 1968년 추서됐을 뿐 김재봉, 차금봉은 서훈이 보류된 상태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빛’을 보지 못한 이들이 비정한 역사를 향해 항변하고자 한 진실은 무엇일까. 〈심희정기자 heejung@kyunghyang.com〉 - 차금봉·김재봉 후손들 : “가난과의 싸움 가장 힘들어” ![]() 조선공산당 2기 책임비서 차금봉의 1남1녀중 막내딸 차윤순 할머니(76). 1929년 3월 차금봉이 고문에 못이겨 생을 놓아 버렸을 때 할머니는 생후 갓 5달의 간난아기에 불과했다. 23살에 과부가 된 어머니처럼 할머니 역시 외아들이 7살이 되던 해 지아비를 잃었다. “용산 철도국 직원이던 아버지가 나라찾기 운동하다 붙잡혀 옥사한지 3년만에 할아버지가 화병으로 돌아가시자 할머니와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우리를 키우셨지.” 할머니는 “당시 두려웠던 것은 빨갱이라는 손가락질과 돌팔매가 아니라 지독한 가난과의 싸움이었다”고 털어놨다. 그래도 할머니는 얼굴도 알수 없는 아버지가 자랑스럽다. “생전에 김구 선생의 운구행렬을 함께 지켜보던 어머니가 ‘너희 아버지도 저랬단다. 수많은 이들이 목 놓아 울며 운구행렬을 따라갔다’고 그러시더라고.” 그는 “우리 불쌍한 아버지 ‘개죽음’ 좀 씻어주시오”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김재봉의 증손자 김윤씨(71)는 일가가 안동 부호였던 관계로 가난한 삶은 살지않았지만 증조부의 좌익활동으로 행동반경이 좁을 수 밖에 없었다. 김씨를 비롯한 4형제가 공직을 피하고 의도적으로 기술분야를 택했다. 김씨는 “34년간 한국전력에 근무하면서 해외출장으로 ‘피해’만 다녔다면 말 다한 것 아니냐”며 “증조부에 대해 귀 막고, 입 막은 채 쥐죽은 듯 살았다”고 고백했다. 달라진 사회분위기에 그는 안동출신 사회주의운동가인 김남수, 이준태의 후손들과 함께 ‘광안회’라는 소모임을 만들어 증조부 복권을 위해 애쓰고 있다. 한편 강달영의 후손은 그의 출신지인 진주에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철저히 숨어살고 있다는 것. 공산당원이었다는 이유로 진주 강씨 족보에서도 삭제된 상태다. 독립기념관의 김형목 연구원은 “1980년대부터 후손과 접촉을 시도했지만 여전히 세상 밖으로 나오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귀띔했다. 〈심희정기자〉 |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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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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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에 중요한 내용이 실렸군요.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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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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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봉씨는 우리 안김인가요. 후김인가요?
김주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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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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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에 사시는 일가님들께 여쭈어 보려 합니다.
결과가 나오는 데로 답글을 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