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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담 김시양 선조님의 유배길을 따라서-임자일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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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5-02-13 17:23 조회1,555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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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초 4일.  양사(兩司)의 합계(合啓)에 말하기를,

「김시언(金時言-金時讓의 初名)이 전에 주서(注書)였을 때, 역적 진(?)의 변고가 생겼을 시초에 삼사(三司)의 고변설(告變說)이 있었는데, 충청도 경시관(京試官-조선조 때 3년마다 각도에서 시험을 볼 때 서울에서 보내는 시험관)이 되어 <신시군여구수(臣視君如仇讐-신하가 임금보기를 원수 같이 하다)>라는 논제를 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의 사자(士子) 들이 이제까지 매우 한탄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증광문과 초시(增廣文科 初試)를 무안현(務安縣)에서 시험을 열었는데 또 상시관(上試官)으로 가서 참석하여 <사로멸유(四老滅劉)>라는 논제를 내어 유생(儒生)들이  “이 제(題)는 당대의 일에 가까운데 어째서 냈습니까”고 물어 말하자,

 대답하기를,   “우연히 나온 것이니  무슨 거리낄 것이 있느냐?”고 하였습니다.  유생들이 두 세 번을 다시 고쳐주기를 청하였고,  결국 포위망을 뚫고 나가려는 상황에까지 이르러서야 고쳐졌는데, 또 <당태종 명사직서(唐太宗命史直書)>로 논제를 내었습니다. 

 유생들이 또 고칠 것을 청했으나 끝내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유생들은 중장(中場- 初試와 覆試에는 初場, 中場, 終場의 세 번의 과목시험이 있었음)의 날에 모두 호소하며 말하기를,  “우리들은 초장(初場)에 진실로 지으려고 해도 제(題)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비록 상등(上等)의 글이 있다해도, 원컨대 시관(試官)은 오로지 헤아려 취하지 마시고, 시관(試官)은 과차(科次-주1) 역시 높은 등급은 감히 나올 수가 없으니 다만 차등(次等)이 나올 뿐입니다. 운운”하였습니다.

 무릇 사로멸유(四老滅劉)라는 것은 두목(杜牧- 803~852 晩唐의 시인. 자는 牧之, 호는 樊川)이 <제상산사효묘(題商山四皓廟)>라는 시에 말하기를,

呂氏强梁嗣子柔  여씨(呂氏)는 굳세고 태자는 연약하니

我於天性豈恩?  우리 천성(天性)에 어찌 은혜가 되기도 하고 원수도 되는가

南軍不袒左邊袖  남군(南軍)은 왼쪽 옷 어깨를 벗지 않았고

四老安劉是滅劉  네 노인은 유(劉)씨를 안정시켰지만 이는 유(劉)씨를 멸한 것이네 주2)



주1) 과차(科次) : 과거시험 성적. 二上, 二中, 二下, 三上, 三中, 三下, 次上, 次中, 次下의 9등급이 있었는데 三下

이상만 급제로 함


주2)  : 漢의 呂皇后는 강인하였으나 太子는 연약하였다. 高祖는 태자를 폐하고 戚夫人의 아들 趙王을 세우려 하였다. 漢의 서울에는 南北軍이 주둔했는데 南軍은 궁성문안을 장악하고, 北軍은 서울문안을 장악하였다. 呂后는 張良을 시켜 商山四皓老人을 태자와 가까이 하게 하여 四老때문에 태자를 바꾸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高后가 죽자 呂祿이 趙王을 上將軍으로 삼고, 呂産은 呂王을 相國으로 삼아 권력을 잡고 劉氏를 위협하려하니 太尉 周勃이 承相 平과 朱虛侯 章과 공모하여 여러 呂氏를 죽이고 代王을 영입하여 세우니. 이가 孝文皇帝였다. 주발이 呂氏를 칠 때 北軍에 들어가 軍中에서 말하기를

     “呂氏를 위한다면 오른쪽 어깨를 벗고 劉氏를 위한다면 왼쪽 어깨를 벗으라”

     고 하였는데 北軍은 모두 왼쪽 어깨를 벗었으나, 南軍은 그러하지를 않았다. 이에 章은 周勃의 천명군사를 끌고 未央宮을 열고 呂産을 죽였다. 이 古事에서 四老는 결국 劉氏인 태자를 보호하지 못하고 멸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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