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렴사공파 죽헌공파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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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5-02-24 22:40 조회1,647회 댓글3건본문
西紀2004(甲申)年
安東金氏 按廉使公의 後裔
竹軒公派 五百餘年의 世居地
忠北曾坪郡曾坪邑南下里三寶山
신라 김씨 시조(始祖)가 생긴 유래
삼국사기에 이르되 신라 제4왕(탈해 이사금) 9년(서기65년 3월) 어느 날 밤에 왕이 금성(지금의 경주) 서쪽 시림(始林) 사이를 거니는데 어디선가 닭 우는 소리가 들려 동이 틀 무렵에 호공이라는 신하를 보내서 살펴보게 하니 갑자기 금빛 찬란한 작은 상자가 나뭇가지에 달려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하도 기이하여 호공은 급히 달려와 이 사실을 고하자 왕께서는 급한 마음에 즉시 가지고와서 뚜껑을 열어보니 예쁜 어린아이가 그 속에 있었는데 용모가 비범하고 기이한 현상이라 왕이 기뻐하며 모든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 어찌 하늘이 도와서 아들을 주심이 아니겠는가?” 하고 잘 거두어 기르니 차차 성장함에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 그래서 이름을 알지(아기라는 뜻)라 부로고 금 상자에서 나왔다하여 성을 김씨라고 하고 흰 닭의 이상한 증세가 있었다하여 시림을 고쳐 계림이라고 하고 국호도 계림이라 하여 태자 강조(康造)의 딸로서 처를 삼게 하니 이분이 곧 마정부인이다. 알지공의 7세손 (미추)에 이르러 제 12왕 첨해왕 (昔氏)의 대를 이어 즉위하니 이가 바로 신라 13대왕 미추왕이다 이때부터 김씨가 나라를 갖게 된 시초였다.
신라는 박씨가 10왕 석씨가 8왕 김씨가 38왕 (626년)을 지냈다.
신라 마지막 56대 경순왕은 고려 태조에게 나라를 양위하고 그의 장녀 낙랑공주와 혼인케 하여 (관광순화 위국공신 상주국낙락왕정승)을 제수하니 위계가 태자의 윗자리였다.
경순왕의 넷째 아들인 은열공(대안군)은 5남을 두셨는데 3남인 숙승(叔承)공의 벼슬은 공부시랑 평장사이고 처음으로 본관을 안동이라 창시 개명을 하여 안동김씨의 시조가 되신 분이다. 그래서 신라김씨 (본관이 없는 김씨)는 김알지공 으로부터 경순왕 넷째아들 은열공 까지를 말한다.
경순왕은 나라를 양위하고 자손들에게 각기 창씨개명을 하여 살도록 했다가 개명을 한 김씨들은 숙승공은 안동김씨로 김선평장군은 신안동 김씨시조로 권행(권행)은 안동귄씨로 또 장길(장길)은 인동장씨 시조로 경순왕의 셋째아들은 경주 김씨로 손자들을 각각 의성, 수원, 평해, 순천, 강릉, 언양, 삼보, 안산, 완산, 광산, 용국 김씨 또는 수성 최씨 등으로 파성 되었다. 이 외에도 많고 없어진 성도 있다. 자손이 무하는 경우도 있고 옛날에 역적으로 몰리면 성씨를 개명하여 숨어 살았다고 한다. (김씨성의 종류는 약 500개)
子; 일긍 (日兢)
일긍공 (日兢)
일긍공은 경순왕의 증손이요 우리 안동김씨 중시조인 충열공의 5대조가 되시고 벼슬은 금자광록대부 상서우복사 삼한공신 태사대광이시다.
子; 이청 (利請)
이청공 (利請)
안동태수를 지냈으며 상락군에 봉해졌다
여지승람 본부 인물기에 의하면 대대로 명망이 높은 집안이어서 안동으로 적(籍)을 받음이 공으로부터 비롯하였다, 라고 되어있다
子; 의화 (義和)
의화공 (義和)
충열공의 증조부이시며 위화시주부에 추봉되었고 또 예부시랑이었다고 하나 사호(司戶)벼슬이었는데 증직(贈職)되어 검교군기감으로 되었으니 충열공의 귀(貴)로 인해서 추가됨
子; 민성 (敏成)
민성공 (敏成)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직사관 겸 장야서령을 지내셨으며 증직은 은청광록 대부상서 우복사 이니 소자인 충열공의 귀(귀)로 인함
子; 孝恭 孝印 孝候 孝綬 孝組
효인공 (孝印)
고려 희종 4년에 문과에 급제 정의대부 병부상서 한림학사 지제고의 벼슬을 지내시고 충열공 귀(貴)로 인하여 금자광록대부 삼한 벽상공신 삼중대광 수문관 대학사 팜이 병부어사 태사중서령으로 추증 되었다.
공은 성품이 엄하고 굳세며 글씨를 잘 쓰고 문장력이 뛰어났다.
일찍이 영열공 금의(琴儀)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그 명성이 사림(士林)에서 으뜸이었고 소년등과하여 필적이 뛰나 경북 청하 보광사 전남 영암의 도갑사 전남 강진의 월남사에 남아있는 비문이 왕명으로 쓴 비문으로서 현재 남아 전해지고 있다.
子; 방경 지경 현경
충열공 (方慶) 중시조 (中始祖)
방경공은 고려 강종 원년에 태어 나셨다.
방경공의 어머님이 임신하였을 때 여러 번 운하(雲霞)를 먹는 꿈을 꾸고서 이웃 사람들에게 “구름기운이 항상 입과 코에 풍겨 있으니 어린애는 반듯이 신선 중에 인물일 것이다.”라고 하셨다고 한다.
출생하여 조부 민성공 집에서 자라고 글을 배웠는데 고종왕 때 16세의 소년으로 양온사동정에 선임되고 산원(散員)이 된 후 감찰어사가 되고 추밀원 부사들을 거쳐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기도 했다 공은 고려군 도원수로서 진도를 함락시키고 탐라로 들어온 적을 쳐서 완전히 평정하였다 대마도를 정벌하고 해적을 방비토록 해놓고 일본 본토를 향하던 중 풍랑으로 되돌아 왔다 충열공은 추충 정난정원공신에 삼중대광 첨의중찬 판전이사사 세자사로 치사하고 상락군 개국공에 봉해졌다 충선왕 때 벽상 삼한 삼중대광으로 추증 되었고 시호는 충열공이시다. 왕명으로 신도비를 세웠다.
子; 선(?) 흔(?) 순(恂) 윤. 순
순 (恂) 문영공
충열공의 셋째 아드님이시다 서기 1258년 고종 45년에 탄생하시어 충렬왕 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낭장(郞將)에서 學士直講에 전직하셨으며 충열공이 일본을 정벌할 때 따라가고자 하였으나 충열공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니 몰래 배에 올라가서 아버지를 도와 큰 공을 세우니 사선에서 부친을 도운 일은 효성이 지극하기가 하늘에 닿았다고 주위 사람들의 칭찬이 많았으며 그 후 殿中侍御史가 되셨다. 같은 해 다시 우승지 삼사좌사(三司左使)에 등용되셨다.
1312 중대광 상락백에 봉해졌으며 1321년에는 판삼사사(判三司事) 벼슬을 하셨고 시호(諡號)는 문영공(文英公)이시다 묘소는 안양시 관양동에 모셔져 있다.
子; 영돈(永暾) 영휘(永揮) 사순(思順) 영후(永煦)
영후 (永煦) 정간공 (貞簡公)
문영공의 넷째 아드님이시고 삼사우윤(三事右尹) 이며 원나라에서 충혜왕을 시중한 공로로 추성 보절 동덕 익찬공신으로 삼사좌사가 되셨다 충혜왕이 원나라에 잡혀갈 때 백관이 모두 도망가는데 공만이 홀로 목숨을 걸고 호위하였다. 다음해 충목왕이 즉위하자 제조정방 좌승지 우정승 예문관 대제학 복창부원군에 봉해졌고 원나라에 다녀와서는 상락후에 봉해졌다 시호는 정간공이다.
子; 천(?)
천 (?) 영삼사사공
충열공의 증손이며 정간공의 장자이시다.
고려조 봉익대부 부지밀직사사 상호군을 지냈고 원조(元朝)에서 승무랑자 승고경첩을 선수(宣授)하였다 또 후일에는 이조(李朝)에서 보국숭록대부 영삼사사의 증직(贈職)을 내리고 상락군 (上洛君)에 봉했다.
子; 사겸(士謙) 사렴(士廉) 사안(士安) 사형(士衡)
식 (湜) 조봉대부행 이조좌랑 (朝奉大夫 行 吏曹佐郞)
안렴사공의 둘째 아드님으로서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조봉대부 행 이조좌랑을 지내시다가 퇴은(退隱)하여 진천 문백면 막동에서 문학으로 종평생 하셨다.
공은 아버지의 유명(有名) 대로 열려 불경이부 충신불사이군이라는 고사(古祠)대로였다 그 자손들도 조부의 유명과 부친의 유명에 따라 돌아가신 뒤에 그대로 평총을 하고 표석도 세우지 않았다 그 뒤 많은 세월동안 병난과 혼란한 시대상으로 공의 묘소도 알 길이 없었다.
자형 (自荊) 사직서령공 (1415-1473) 수;58세
식의 둘째 아들이며 안렴사공의 손자인 자형은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직서령에 벼슬을 받았으나 조부의 유명으로 그리고 대대로 내려가는 가훈으로 충효 두 글자를 가슴에 새기고 불사(不仕)은거하여 진천 백락면에서 경독(耕讀) 문학하였고 임종때 그 자손들도 역시 유지를 받들어 사직서령공도자기 분묘를 평총(平塚)으로 하도록 일렀고 조상님들께서 이루어 놓으신 가문 명예를 떨어뜨리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 때문에 지금도 공의 묘소를 알 길이 없어 증평읍 남하리 삼보산에 설단하여 향사를 올리고 있다.
子; 규(?) 욱(旭)
규 (?) 죽헌공 (1461-1530) 수; 69세
안렴사공의 증손이시며 사직서령공 자형의 장남이시다 호는 죽헌돈녕부 참봉공이시며 처음으로 죽리에 낙향하신 할아버님이시다. 그래서 증평 죽리 안동김씨를 죽헌공파라고 한다 공은 어릴 때부터 천성아 충직하고 선조님의 유명에 따라 벼슬을 버리고 죽리에 은거하여 청경우동(淸耕雨讀) 하며 서당을 세워 글을 가르치고 시문 의례로 여생을 보냈다
子; 윤손 (胤孫)
윤손 (胤孫) 훈도교수공 (1485-1558) 수; 73세
안렴사공의 현손(고손)이시며 죽헌공의 아드님이시다 벼슬을 교수공이시며 머리가 총명하고 온후하시며 선조들의 가훈을 잘 지키고 익혔으며 오직 학동들의 글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시다가 73세로 졸하시니 제자들이 수백명이 되고 출사한 제자들이고 많이 있다고 한다.
子; 근 (瑾)
근 (瑾) 경능 참봉공 (1504-1587) 수; 83세
죽헌공의 손자이시며 윤손공의 아드님이시다 벼슬은 참봉이시고 천성이 인후하시고 근검하였고 가족에게는 관대하고 친절하였다 공은 예의를 승상하시어 고명했고 주민들에게 높이 추앙 받았으며 불사은거(不仕隱居)하여 농경야독으로 시문을 즐기시며 종 평생 하셨다.
子; 세양(世良) 세공
세양 (世良) 장사랑공 (1530-1587) 수; 57세
죽헌공의 증손이며 참봉공의 장남이시다 벼슬은 장사랑이다.
공은 선조의 유명에 따라 벼슬길을 마다하고 고향에 내려와서 농경 문학을 하시면서 다복한 가정을 만들며 종친들에게 친절을 베풀었다고 한다.
子; 탁 (鐸)
탁(鐸) 학생공 (1555-1593) 수;38 세
학생공 탁은 장사랑공의 아드님이시며 의금부 도사공의 조부이시다 농사에만 전념하여 부농을 이루는데 많은 노력을 하셨고 자손교육에 열성을 다하면서 대대로 내려오는 가훈인 효충 두 글자를 잊지 않고 예절바른 가문을 만드는데 심혈을 경주하셨다고 한다.
子; 명용(命龍)
명용 (命龍) 생원공 (1575-1678) 수; 78세
생원공은 의금부 도사공의 부친이시며 벼슬은 성균 생원이시다. 공은 선조의 유명에 따라 벼슬에 나가지 않고 농경야독 하셨고, 성품은 온후하시고 협동심이 강하셨다고 한다. 평생 학문을 즐겨 하셨고 자손들에게 예절교육을 강조하시어 예절바른 가정을 만드는데 성심을 다하셨다고 한다.
子; 오(旿)
오 (旿) 의금부 도사공 (1601-1678) 수; 78세
의금부 도사공은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마음이 온후하고 검소하였으며 남을 잘 돕는 협동심이 강하였다. 그리고 천성인 효행심이 강하고 벗을 사귀는 데는 의리와 신념으로 교우했고 이웃사람들의 찬사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오공은 주공과 함께 서당동 글방에 다니면서 형제간 의가 어찌나 좋은지 남들이 부러워했고 오공은 말년에 시문학을 즐겼고 명필대가로 명성이 높았다 한다.
子; 성정 성호 성율 성여 성우 성무 성하
주 (주) 생원공 (1606-1681) 수; 76세
생원공께서는 어려서부터 타고난 재주가 많으셨고 성격이 어질고 후덕하시며 행동이 청백함과 근검하시어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보셨고 많은 사람들의 칭송이 끊일 새가 없었다고 한다. 남을 돕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으셨고 의리와 신념이 강하여 이웃에 본보기가 되셨으며 가정에서는 효를 근본으로 자녀교육을 하였으며 몸소 실천함으로서 상사를 당하여 시묘살이를 하셨다. 선조님께서는 광해조에는 정사가 어지러워 과거에 불을 하였고 인조반정후 1627 정묘년에 성균 생원시에 합격하시고 1681 신유년에 노환으로 돌아가시니 향년 76세이시다
子; 성진(성진) 성문(성문) 성교(성교)
三寶山 : 이 곳은 先祖님의 靈魂이 고이 잠드신 瑞氣가 서려있는 靈山입니다. 또한 三寶山은 炭酸水의 根源地이며 산골이 출토되고 金이 生産되기도한 三寶의 名山이기도 합니다.
敬慕齋 : 2000年 (庚辰) 8月 30日 竣工 建坪 : 60坪
이 곳은 安東金氏 竹軒公派 先祖님 8代 9位를 모시고 每年 陰 10月 1日에 祭享을 올리는 祠堂입니다.
案內文 2004년(甲申)년 竪立
齋室 全景
諱 : 自荊 墓 : 失傳 設壇 曾坪君 曾坪邑 南下里 三寶山
諡號 : 社稷署令 (從 5 品) 配 : 東萊鄭氏 恭人 合?
1415(乙未) - 1473(癸巳) 壽 : 58歲
號 : 竹軒 諱 : ? 墓 : 曾坪邑 德祥里 獐封
諡號 : 敦寧府 參奉 (從 9 品) 配 : 東萊鄭氏 孺人 合?
1461(辛巳) - 1530(庚辰) 壽 : 69歲
字 : 詞彦 諱 : 胤孫 墓 : 三寶山
諡號 : 敎授官 (從 6 品) 配 : 晋州柳氏 順興安氏 宜人 三合?
1485(乙巳) - 1558(戊午) 壽 : 74歲
字 : 可獻 諱 : 謹 墓 : 三寶山
諡號 : 敬陵 參奉 (從 9 品) 配 : 吉州金氏 孺人 合?
1504(甲子) - 1587(丁亥) 壽 : 84歲
字 : 顯信 諱 : 世良 墓 : 三寶山
諡號 : 將仕郞 (正 9 品) 配 : 文化柳氏 孺人 合?
1530(庚寅) - 1587(丁亥) 壽 : 57歲
字 : 警仲 諱 : 鐸 墓 : 三寶山
學生公
댓글목록
김발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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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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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주회 아우님! 편람집 모임 때 주셨던 남하리 자료입니다. 남하리에서 넘어온 자료그대로를 워드화 및 스캔하였습니다.
잘못된 부분 및 지원 안되는 한자는 재 편집시에 고려하시기 바랍니다. 타이핑하다가 꾀가나서 상당부분 스캔하였습니다.
한글화일(HWP) 필요하시면 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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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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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좋은 자료를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태도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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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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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노고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