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렴사공파 소개자료 (연습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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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02-26 22:34 조회1,474회 댓글0건본문
7.파내 주요 조상님 소개
貞簡公(정간공) 金永煦(김영후) --- 안렴사공의 祖父
김영후 ? 김천 부자 설단
정간공(김영후)의 아버지 문영공(김순)의 장지와 백형 김영돈의 거처가 개성인 점과 정간공께서 고위관직에 계시어 개성 어딘가에 거주하셨을 것이므로 정간공과 증영삼사사공(김천)의 묘도 개성 인근 어딘가에 있다가 실전된 상태로 추정되고, 기록도 전무하여 알 수 없는 실정이다.
1962년 정간공의 후손인 안렴사공파, 익원공파, 서운관정공파 3파에서 합력하여 충북 청원군 오창면 모정리에 있는 안렴사공(김사렴) 묘역 좌하에 정간공과 증영삼사사공 설단을 조성하였다가, 1993년에 중수하고, 1996년 묘역 좌상으로 이설하였다가, 2000년 수해로 인하여 다시 정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김순 묘지명 (1321년 민지 찬)>
---영돈(永暾)의 문중(門中)에서 이미 장지를 덕수현 마산(德水縣 馬山)위에 ---
김순의 묘지명은 1942년(임오)에 경기도 개풍군 임계면 가정리 마산의 동쪽 기슭에서 발견. *발견경위 : 익원공파 세보
<김영돈 묘지명 (1348년 안진 찬)>
---공은 일찍이 덕수현(德水縣) 동쪽의 강과 산이 아름다운 곳에 별장(野莊)을 지었는데,--- 덕수현 앙동산(德水縣 仰洞山)에 장례지내고, ---
김영돈 묘지명은 조선순조8년 (1808, 술진)에 발견. *발견경위 : 없음
<1996년 이설전 설단>
<김영후-김천 설단. 안렴사공 묘역 좌상>
<김영후-김천 설단>
<김영후-김천 설단>
<김영후-김천 설단 전경>
<김영후-김천 선세사적>
정간공 연보
<정간공 설단 묘비>
<정간공 설단 묘비>
○1292(충렬왕18)∼1361(공민왕10). 고려 말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호는 균헌(筠軒). 국헌(菊軒)<급암시급, 척약재학음집>. 온재(穩齊)<화해사전>. 할아버지는 방경(方慶), 아버지는 중대광 상락군 판삼사사(重大匡上洛君判三司事) 순(恂)이다.
○문영공(김순)과 제평군부인 양천허씨(허공의 따님) 사이에서 4남(영돈, 영휘, 사순, 영후) 3녀(정책, 백이정, 별리가불화에게 출가)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이제현, 이달존, 박충좌, 민종유, 김영돈, 안목 등과 함께 백상당문인 24인의 한 사람으로 둘째매형 백이정의 문인이다. <1860 화해사전 제자서술>
○(28세) 문영공(김순)께서 乙未(=1319년)년에 또 선친(=김방경) 산소에 성묘차 가시는데 왕께서 季子(계자=막내아들) 永煦를 시켜 모시고 배행케 하였으니 왕께서도 공(=김순)의 행차를 극진히 배려한 때문이다. <1321 민지찬 김순묘지명>
○(30세) 永煦는 사헌부 지평으로 있었다. <1321 민지찬 김순묘지명>
○(34세) 1325년(충숙왕12) 7월 산원(散員) 장세(張世)가 소윤(少尹) 임준경(林俊卿)의 말을 빼앗은 사건이 일어나자 지평으로서 장령 김원식(金元軾)과 함께 총신(寵臣)의 비호를 물리치고 치죄(治罪)를 청하였다.
○(36세) 1327년(충숙왕14) 4월에 상주목사가 되어 객관(상주 상산관)을 완성하고 또 本館의 서편에 별도로 小館을 세우니 이제는 비록 사신이나 손님이 많이 오더라도 유숙하는데 여유가 있게 되어 읍인들도 안심하게 되었다. <안축의 근재집 상주객관중영기>, <김종직의 점필재집 풍영루중수기>
1327년(충숙왕14, 정묘) 12월 1일 아침, 법주사 자정국존이 입적하기 직전 서기를 방장실로 불러 主上에게 올릴 편지를 써서 직인과 함께 봉하고 상주목사인 김영후에게 부탁하여 전달하게 하고, 해가 포시에 이를 무렵 조용히 앉아 입적하였다. <1342 이숙기찬 전원발서 법주사자정국존비문>
○(41세) 1332년 永煦는 봉선대부 자섬사사이다. <1332 이제현찬 김순처허씨 묘지명>
○(48세) 1339년(충숙왕복위8) 4월 삼사우윤(三司右尹)으로 원나라에 가서 부처의 화상을 바쳤으며, 충혜왕이 자신을 헐뜯던 신청(申靑)을 이문소(理問所)에 가두고 그의 죄상을 행성(行省)에서 기록하여 김영후(金永煦)에게 주어서 중서성에 제출하게 하였다.
김영후는 그 매부 별가불화(別哥不花)가 당시 원나라 평장사(平章事)였으며 왕에게는 양이형제(兩姨兄第)의 관계가 있는 까닭에 왕이 김영후에게 초 1백 정(錠)과 능직 비단 15필, 모시 30필을 주어 보냈다.
○(50세) 1341년(충혜왕복위2) 6월 조적의 난으로 왕이 원도(元都)에 갔을 때 간신들이 변란을 꾸몄으나, 삼사우사로서 왕을 시종한 공으로 정승 채하중, 상락(上洛)부원군 김영돈(金永旽), 언양군 김륜(金倫), 김해군 이제현, 성산군 이조년, 첨의평리 한종유 등과 1등 공신으로 봉해져 벽상에 그들의 화상을 그리게 하고 그 부모와 처는 세 등급을 올려 작위를 주고 아들 한 명에게 7품직을 제수받고, 아들이 없으면 조카나 생질에게 대신 줄 것이며 사위는 8품 직을 주고 토지 1백 결(結)과 노비 10명을 받았다.
또한 영창군(永昌君) 김승택(金承澤) 등은 2등 공신으로 정하며 부모와 처는 세 등급을 올려 작위를 주고 아들 한 명에게 8품 직을 제수받고, 아들이 없으면 그 대신 사위에게 9품 직을 제수하고 토지 70결과 노비 5명을 받았다.
○(51세) 이듬해에는 심양왕 고(瀋陽王暠)의 모반에 참가하지 않고 원나라에서 충혜왕을 시종한 공으로 추성보절동덕익찬공신(推誠保節同德翊贊功臣)의 호를 받고, 삼사좌사(三司左使)로 임명되었다.
○(52세) 1343년(충혜왕 계미후4) 봄 2월 갑진일에 왕이 용사(勇士)들을 거느리고 씨름을 구경하다가 밤에 좌우사 낭중 김영후와 같이 북궁(北宮)에서 술을 마시었는데 김영후가 취하여 누우니 왕이 곁에 있던 사람들을 시켜 그를 부축하여 말 위에 올려 앉히고 마부를 불러 이르기를 “네 주인 낭중이 자기 타던 말을 나에게 선사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이튿날 김영후가 이내 그 말을 왕에게 바쳤다.
1343년 11월 원나라의 자정원사(資政院使) 고용보(高龍普) 등이 충혜왕을 잡아갈 때 시종한 백관들이 모두 도망갔으나 홀로 김영후만은 왕을 호위하고 있으면서 1장 8척의 창을 맞았다.
1343년(충혜왕4)에 征東省郞으로 있었다. <안축의 근재집중 상주객관중영기>
○(53세) 1344년 10월 충목왕이 즉위하자 찬성사가 되고, 이듬해 정월 정방이 부활하였을 때 찬성사로서 제조관(提調官)이 되었다. 12월에는 좌정승으로 원나라에 가서 방물(方物)을 바쳤으며 우정승에 승진되었다.
○(55세) 1346년 5월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61세) 1352년(공민왕1 임진) 8월 복창부원군(福昌府院君)에 봉해지고 기미일에 서연(書筵)을 열고 김해 부원군 이제현(李齊賢), 한양 부원군 한종유(韓宗愈), 전 찬성사 허백(許伯)과 김자(金資), 안산군 안진(安震), 영창군 김승택(金承澤), 밀직부사 안목(安牧), 전리 판서 백문보(白文寶) 등이 날을 바꾸어 시독(侍讀)하면서, 서연(書筵)에 입시하여 변정도감(辨整都監)을 파할 것을 주장하였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을 칭탁하고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공(=김방경)의 손자 추성 보리동덕 익찬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복창부원군(=영후)의 집에 공의 행장이 비장되어 있었으나, 해가 도래되어 종이가 떨어지고 먹빛이 변해져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써서 그 근본을 잊지 않게 했다 <1350 안진발 김방경행장>
○(65세) 1356년(공민왕5, 병신년) 2월 갑술일에 원나라에서 왕에게 친인보의선력봉국창혜정원(親仁保義宣力奉國彰惠靖遠)이라는 공신호를 내린 것에 사은(謝恩)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뒤 상락후(上洛侯)에 봉해졌다.
○(70세) 1361년(공민왕10 신축) 5월 임술일에 상락후(相洛侯) 김영후(金永煦)가 나이 70세로 죽었는데, 정간(貞簡)이란 시호를 받았다.
○상당군부인 청주한씨(父한보, 祖한강, 曾祖한광윤) 와의 사이에서 2남(김천, 김장)을 낳았다. <안동김씨 족보>
○그의 성품은 엄격하고 굳세고 침착하고 신중하였으며 일가 친척과 옛친지들 가운데 군색한 자가 있으면 모두 구제하여 주었다.
그 손자들인 김사안(士安), 김사형(士衡)의 나이 20세를 넘었는데, 어떤 사람이 김영후더러 말하기를 “왜 그들을 위하여 관직을 얻어 주지 않는가?”라고 하니 “자제가 과연 현명하다면 국가에서 스스로 선발해서 쓸 것이며 만일 현명하지 못하다면 관직을 주어서 얻게 하더라고 그것을 유지해 나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그의 아들 김천은 관직이 밀직부사에까지 이르렀다.
정간공 관련 시문
<급암시집 (민사평)>
及菴先生詩集卷之二
律詩
大叔菊軒公 新構野莊 與吾壽春莊隔江相望 六月 一日 予適來吾莊 聞公亦到新莊欲謁 而風作浪湧 不可禁當 不勝鬱鬱 因成?絶句二首 拜呈左右 金永煦
百頃平湖侶鏡光 /백경평호려경광
漁村兩岸正相望 /어촌양안정상망
晩風吹浪忽難渡 /만풍취랑홀난도
幾恨無回謁渭陽 /○한무회○위양
樓臺巳見白蓮社 /누대사견백련사
風浪未過靑草湖 /풍랑미과청초호
此是坦師當日句 /차시탄사당일구 禪坦
朗吟空復飮村 /낭음공부음촌고
⇒번역 :
급암시집(及菴詩集) 1370年刊
소장처 성암고서 박물관장본(4-529. 보물 708호)을 촬영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소장
성명 민사평(閔思平) 생년 1295년(고려 충렬왕 21) 몰년 1359년(공민왕 8)
저자의 시문은 末年의 작품을 제외하고 모두 散佚되었는데, 외손 金九容(初名은 齊閔)이 遺詩 약간 편을 간수하였다가 1360년에 편찬하고 李齊賢ㆍ白文寶ㆍ李穡의 序를 받았다. 그 후 김구용이 成均館에 재직하면서 遺稿를 繕寫하였고, 마침 저자의 문인 李?가 경상도 안렴사로 부임하게 되자 金九容의 繕寫本을 板下本으로 하여 李穡ㆍ李仁復의 跋을 받아 1370년 5권 1책으로 간행하였다.《초간본》 이 본은 현재 誠庵古書博物館에 소장되어 있으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에 위의 원본을 촬영한 마이크로필름이 소장되어 있다. 또한 1990년 6월에 간행된 韓國書誌學會의 「書誌學報」 창간호에 성암고서 박물관 소장본을 영인한 영인본이 수록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370年刊 초간본으로 성암고서 박물관 소장본을 촬영한 정신문화연구원 마이크로필름본이다.
기사전거 : 序(李齊賢ㆍ白文寶ㆍ李穡 撰)ㆍ跋(李穡ㆍ李仁復 撰) 등에 의함
<척약재학음집 (김구용)>
樓上次韻奉呈菊軒相國 /루상차운봉정국헌상국
春風無限客中愁 /춘풍무한객중수
散盡賢侯半日留 /산진현후반일류
却恨不如樓下水 /각한불여루하수
溶溶(삼수변)樣樣向西流 /용용양양향서류
누각 위에서 차운하여 국헌상국께 받들어 드리다.
봄바람에 나그네의 수심이 끝이 없는데
어진 수령들이 다 흩어진후 한나절을 머무네
도리어 누각아래 물만도 못함을 한탄하나니
도도하게 출렁대며 서쪽으로 흐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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