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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신문사에 제공할 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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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03-01 12:03 조회1,359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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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27일(일) 11시에 여주터미널 2층 봉황부페에서 조선중기의 문장가인 우암(寓庵) 김주(金澍)의 문집 국역본인 <국역 우암김주문집> 출판기념회가 여주문화원과 안동김씨 안렴사공파종회, 문단공종회(김주 후손 종중) 공동 주관으로 18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이날 출판기념회에는 전국의 김주 후손과 안동김씨 인사들이 대거 참석하였고, 여주지역 향토사학계에서도 많이 참석하여 여주의 역사인물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우암 김주 선생의 문집국역 발간을 축하하였다.


김주의 고조부 김환(金丸)이 청원 오창에서 여주 흥천면 귀백리에 이거하여 1442년 문과급제후 승문원 판교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후 후손들이 550년 가까이 대대로 세거해 내려와 귀백리와 율극리 일원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김주의 묘소도 귀백리 선영에 있다.


이번에 국역간행된 우암집에 보면, 김주는 22세때인 1533년 가을에 여주로 와서 선영에 성분하고 나서, 모재 김안국을 이호촌(梨湖村)에서 배알하니 모재는 깊이 공경하고 중하게 여겨서 이별에 즈음하여 눈으로 전송하면서, "이 사람의 문장은 마땅히 괴애 김수온과 점필재 김종직의 사이에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고 한다.


우암 김주 선생은 30세때인 1541년 이후 여러차례 한강가 동호 독서당에서 사가독서를 하게 되는데, 퇴계 이황, 하서 김인후, 금호 임형수 등과 많은 교분을 쌓았으며, 당시 정유길, 민기, 심수경, 이량, 이이, 임수 등 여러 사람들과 함께 문장양망으로 선발되어 당시 8문장(八文章)이라 불리었다. 경학에도 출중하여 특정한 경전에 전공을 지닌 문신을 일컫는 전경문신에 여러번 뽑히었으며, 정유길과 함께 문형(文衡)에 천거되기도 하였다.


우암 김주 선생은 당시 8문장의 한 사람으로 꼽혔던 만큼 많은 작품을 남겨서 시문집(詩文集)으로 가전(家傳)되어 오던 것이 7책이 있었다고 하는데, 왜란과 호란을 겪는 와중에서 대부분 유실되었다고 한다. 1789년 후손 김래, 김득현 등이 문집 초간본 <우암유집> 7권1책을 간행하었고, 1934년 후손 김문연, 김주연 등이 중간본 <우암집> 6권3책을 간행하여 현재 규장각,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번에 한문을 모르는 세대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후손가에서 2년여에 걸친 작업끝에 고려대 한문학교 심경호 교수의 역주로 국역하여 간행한 것이다.


우리 여주 지역에는 역사적으로 출중한 문인들이 많이 배출되고 흔적을 남기었는데 고려시대의 대문호 백운거사 이규보, 목은 이색, 척약재 김구용을 비롯하여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번에 <국역 우암김주문집>이 간행됨으로써 우암 김주 선생도 여주의 역사적 인물로 새롭게 조명하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후손가에서도 지난 2월에 우암집 원본과 광국지경록, 안동김씨 족보 등을 여주향토사료관에 기증하는 등 여주향토문화 발전에도 적극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어 앞으로의 활동이 주목되고 있다.

  




댓글목록

김주회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주회
작성일

  여주의 지역신문인 여주신문사에 제공하고자 합니다.
잘못된 부분은 교정하여 주시고
추가할 내용을 알려 주시면
보완하겠습니다.

김주회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주회
작성일

  발용 형님!
행사 전체장면 나오는 멋진 사진 하나 첨부해 주세요

솔내님의 댓글

profile_image 솔내
작성일

  김주의 묘소도 귀백리 선영에 있다--- 선영하에 있다. 라고 해야 좋을 듯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