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돈묘지명(金永暾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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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5-03-06 08:14 조회1,498회 댓글5건본문
김영돈묘지명(金永暾墓誌銘)
묘지명은 『안동김씨대동보(安東金氏大同譜)』(1980)에 수록되어 있다. 묘지명 찬자는 안진(安震)이며, 1348년(충목왕 4)에 작성되었다.
묘지명의 주인공인 김영돈(金永暾 : 1285~1348)은 자는 휘곡(暉谷)이며, 안동 사람이다. 아버지는 김방경(金方慶), 어머니는 양천(陽川) 허씨(許氏)로 공(珙)의 딸이다. 본관은 안동이다. 『고려사』에는 김영돈(金永旽)으로 기록되어 있다.
묘지명에 따르면 김영돈은 1305년(충렬왕 31)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 생활을 시작하였다. 1340년(충혜왕 1) 과거시험을 주관하여 이공수(李公遂) 등 12명을 선발하였다. 또한 충목왕때 좌정승(左政丞)으로 정치도감을 중심으로 한 개혁정치에 참여하였다가, 벼슬에서 은퇴하였다.
부인 신씨(申氏)는 여강(汝岡)의 딸로 이천군(利川郡)에 봉해졌다. 2녀 1남을 낳았다. 장녀는 오원경(吳元敬)에게, 둘째 딸은 윤식(尹湜)에게 각각 시집갔다. 아들 신(縝)은 유보발(柳甫發)의 딸과 결혼하였다.
시대 고려
연대 1348년(충목왕4년)
유형/재질 묘지명·묵서명 / 돌
문화재지정 미지정
크기 미상
출토지 미상
소재지 (한국)-현존하지 않음
서체 미상
찬자/서자/각자 안진(安震) / 미상 / 미상
<判讀文>
有高麗國推忠秉義翊贊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上洛府院君金公墓誌銘(幷序)
公諱永暾字暉谷其先出自新羅王金傅□□□□□□□□王中世以婚姻故徙居安東都護府其府今福州牧也至十三代孫判都僉議司事□□□□諱方慶會上國東征日本□□□助官軍水戰有功天子授中奉大夫管高麗軍都元帥推忠靖難定遠功臣□□□□□季諱恂位至判三司寶文閣大提學上洛君是爲公考公幼持氣節其學□□□□□□□大德乙巳等第自福源宮□□□□爲嘉順府丞延祐丙辰從忠肅王朝京師請爲嘉禮及尙公主冊公一等功臣賜田民祿券再遷掖庭內謁者監出知陜州事□□威惠邑居載寧民至今歌其德秩滿除?府散郞徙民部尋復?府爲直郞遷監察□□□□全羅□巡郡縣輒恕罵曰民有困窮惠撫廉謹得以稗王化其守令□職□以□蘇復□□典校副令移典法摠郞後至元戊寅判事小府己卯改宗簿副令使朝京師留都□□後入朝就從負?庚辰襲位□都僉議評理是秋□□遂遷□□□使掌春試官得李公秀等十二人其禁□嚴肅士林稱爲□□至正辛巳以推誠秉義翊贊功臣上洛府院君□職□?□□□□公出□合□南民積弊意治盡祛猶理亂絲□□□□□□□□?宴饗?獵皆徹不□□近自□至明年□解□□鎭上□□內酒諭勉故復留一年丙戌僉議贊成事右文館大提學典春秋?事□月朝京師天子召□不□□無帝嘉其忠直掌□百□得□□旨得整理公東還□□□□?國王□□□整理都監訴寃枉者一日無慮千餘□□□公爲左政丞□是擇官員與之根刷通洗衆寃口折是非而折欺枉權勢怨謗悉叢公身帝遣使賜御酒御衣耆老歎其未曾有也旣而衆怒難□公□見斥七月□壁上三韓三重大匡上洛府院君功臣號如故遂?跡杜門不復與整理其□未寃者□王者起公以?吾胸公嘗築野莊德水縣東有江山之好每往輒留旬月若將遺世其□淸濁抑强扶弱衆未嘗忘也至戊子七月戊申?疾卒春秋六十四移殯城中私第朝士大夫皆痛惜相吊?陽川許氏都僉議中贊諱珙之女公姿端廉果斷不以內外尊顯自多衣不爲華食不兼味至於貨財不求不殖待族親甚睦雖飯寢之際苟聞其至必則乎前喜□□不至□若士夫汚?嬌飾根脚必對面唾罵故一時名宦者深惡焉夫人申氏版圖仕郞汝岡之女封利川郡生二女一男長女適通禮門判官吳元敬先公卒次適三司判官尹湜男縝掌服直長娶右代言柳甫發之女公嘗與予言吾晩生一子將復其□業八月丙戌葬德水仰洞山贈謚文肅予旣遇公知米書其米其銘曰
身?而長 性直而□ □處廟堂 萬民所望 遭國老召 敷奏天子 聿降□旨
?之整理 疾視豪權 根刷違愆 天不假年 泰山其顚 刻時德行 共耀無境
積善之慶 子孫昌盛
至正八年八月 日」
勅授將仕郞匡靖大夫檢校僉(?)議?理藝文?大提學知春秋?事安山君 安震 撰
〔출전:『安東金氏大同譜』(1980)〕
<해독문>
원 고려국[有元 高麗國] 추충병의익찬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상락부원군(推忠秉義翊贊功臣 壁上三韓 三重大匡 上洛府院君) 김공(金公) 묘지명 및 서문
공의 이름은 영돈(永暾)이고, 자는 휘곡(暉谷)이며, 그 선대는 신라왕(新羅王) 김부(金傅 : 敬順王)로부터 나왔다. □□□□□□□□왕(王)이 중세에 혼인하였기 때문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로 옮겨 거주하게 되었는데, 그 부(府)는 지금의 복주목(福州牧)이다. 13대손인 판도첨의사사(判都僉議司事) □□□□ 방경(方慶)이 상국(上國 : 元)이 일본을 정벌할 때에 □□□ 관군을 도와 수전(水戰)에 공이 있었으므로, 천자가 중봉대부 관고려군도원수 추충정난정원공신(中奉大夫 管高麗軍都元帥 推忠靖難定遠功臣)을 제수하였다. □□□□□ 막내인 순(恂)은 벼슬이 판삼사 보문각대제학 상락군(判三司 寶文閣大提學 上洛君)에 이르렀는데, 바로 공의 아버지가 된다.
공은 어려서부터 기개와 절도가 있었고, 그 학문은 □□□□□□□ 하였다. 대덕(大德) 을사년(충렬왕 31, 1305)에 과거에 급제하여 복원궁(福源宮)□□□□을 거쳐 가순부승(嘉順府丞)이 되었다. 연우(延祐) 병진년(충숙왕 3, 1316)에는 충숙왕(忠肅王)을 수행하여 원의 서울에 들어가서 가례(嘉禮)를 청하여 공주(公主 : ?國長公主)를 맞이하게 되었다. 공은 일등공신(一等功臣)으로 책봉되고 토지와 노비와 녹권(錄券)을 하사받았다. 다시 액정내알자감(掖庭內謁者監)으로 옮기고, 지합주사(知陜州事)로 나갔는데 □□ 위엄이 있고 은혜로우니 고을이 편안해 하였으며,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그 덕을 노래하고 있다. 임기가 차자 언부산랑(?府散郞)에 제수되었다가 민부(民部)로 옮기고, 얼마 뒤 다시 언부직랑(?府直郞)이 되었다. 감찰(監察)□□로 옮기고, □□전라(全羅)□가 되어 군현을 다니며 살피다가 문득 노하여 꾸짖으며, “백성들이 곤궁하게 되면 은혜로이 보살펴 주어 염치가 있고 삼가게 하여 왕화(王化)를 얻게 하여야 하니, 수령은 □직책으로 □ 다시 소생시켜야 한다.”고 말하였다. □□ 전교부령(典校副令)이 되었다가 전법총랑(典法摠郞)으로 옮겼다.
후지원(後至元) 무인년(충숙왕 복위7, 1338)에 소부판사(小府判事)가 되고, 기묘년(충숙왕 복위8, 1339)에는 종부부령(宗簿副令)으로 바뀌었으며, 사신으로 원의 서울에 들어가 도(都)□□에 머무르다가 뒤에 (충혜왕이) 원의 조정에 들어올 때 수행하였다. 경진년(충혜왕 1, 1340)에 임금이 즉위하자 □ 도첨의평리(都僉議評理)가 되고, 이 해 가을 □□에 마침내 □□□사(使)로 옮겼다. 과거시험을 주관하는 관리가 되어 이공수(李公遂) 등 12명을 뽑았는데, 그 금□(禁□)가 엄숙하니 사림(士林)들이 칭찬하여 □□라고 하였다.
지정(至正) 신사년(충혜왕 복위2, 1341)에 추성병의익찬공신 상락부원군(推誠秉義翊贊功臣 上洛府院君)으로 □직(職)□연(?)□□□□, 공은 (지방으로) 나가 □합(合)□ 남쪽의 백성에게 쌓여 있는 폐단을 모두 다 없애는 데 뜻을 두니, 마치 엉킨 실을 푸는 것과 같았다. □□□□□□□□ 음식과 잔치와 사냥을 모두 물리치고 □□하지 않았다. 근래에 □부터 이듬해에 이르기까지 □해(解)□□진(鎭)하여 임금이 내주(內酒)를 □□(하사하고?) 부지런하게 설득하였으므로 1년을 다시 머물렀다.
병술년(충목왕 2, 1346)에 첨의찬성사 우문관대제학 전춘추관사(僉議贊成事 右文館大提學 典春秋館事)가 되고, □월에 원의 서울로 갔다. 천자가 불러 □ 불(不)□□무(無)하니, 황제가 그 충직함을 가상하게 여겨 □백(百)□를 맡아 □□지(旨)를 정리하였다. 공이 고려로 돌아와 □□□□ 임금에게 아뢰니, □□□정리도감(整理都監)에 억울하거나 잘못된 일을 호소하는 사람이 하루에도 무려 천여 명이나 되었다.
□□□ 공은 좌정승(左政丞)이 되었다. 이에 관원을 가려서 그들과 더불어 끝까지 파고들어 사람들의 원통함을 씻어주고 시비를 가렸으며, 속이거나 잘못된 일을 바로 잡으니, 권세를 가진 자들의 원망과 비방이 모두 공의 몸으로 쏠리게 되었다.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어주(御酒)와 어의(御衣)를 내리니 원로[耆老]들이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고 탄식하였다. 이미 여러 사람의 노여움으로 □ 어렵게 되자 공은 □ 배척당하게 되어, 7월에 벽상삼한 삼중대광 상락부원군(壁上三韓 三重大匡 上洛府院君)이 되고 공신의 호칭은 전과 같았으나, 마침내 종적을 감추고 두문불출하면서 다시는 정리(整理 : 整理都監)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 □ 억울함을 풀지 못한 자들도 □ 임금이 공을 기용함으로써 우리의 가슴을 씻어 주었다.
공은 일찍이 덕수현(德水縣) 동쪽의 강과 산이 아름다운 곳에 별장[野莊]을 지었는데, 매 번 문득 가면 열흘이나 한 달을 머무르니 마치 장차 세상을 버린 것 같았다. 청탁을 □(가려내고?) 강한 것을 누르고 약한 것을 도우니 많은 사람들이 잊지 않았다. 무자년(충목왕 4, 1348) 7월 무신일에 병이 들어 돌아가시니, 춘추가 64세이다. 빈소를 성 안의 공의 집으로 옮겼는데 조정의 사대부들이 모두 슬퍼하고 서로 조문하였다.
어머니는 양천 허씨(陽川 許氏)로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 공(珙)의 딸이다.
공은 생김새가 단정하고 청렴하였으며 과단성이 있었다. 친족과 외족은 지위가 높고 현달하였지만 스스로 거만하지 않고, 옷을 입어도 화려하지 않았다. 음식은 진미를 찾지 않았고, 재물에 이르러서는 구하지도 아니하고 늘리지도 아니하였다. 친족을 대할 때에도 매우 화목하게 하여서, 비록 식사하고 잠자는 사이에라도 구태여 손님이 왔다고 알리면 반드시 앞에 나가 (이름을) 부르면서 반가워하였다. □□부지(不至)□. 만일 사대부의 행실이 나쁘거나 그 잘못을 덮고자 하면 반드시 마주 대하여 침을 뱉고 욕을 하였으므로, 당시의 이름난 벼슬아치들이 깊이 미워하였다.
부인 신씨(申氏)는 판도사랑(版圖仕郞) 여강(汝岡)의 딸로 이천군(利川郡)에 봉해졌으며, 2녀 1남을 낳았다. 장녀는 통례문판관(通禮門判官) 오원경(吳元敬)에게 시집갔으나 공보다 먼저 죽었고, 둘째 딸은 삼사판관(三司判官) 윤식(尹湜)에게 시집갔다. 아들 신(縝)은 장복직장(掌服直長)인데 우대언(右代言) 유보발(柳甫發)의 딸과 결혼하였다. 공이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만년에 아들 하나를 얻었는데 장차 □업(家業?)을 일으킬 만합니다.”라고 하였다.
8월 병술일에 덕수현 앙동산(德水縣 仰洞山)에 장례지내고, 시호를 추증하여 문숙(文肅)이라고 하였다. 내가 이미 공을 만나 보살핌을 받았으므로, 그 행적을 자세하게 적었다.
명(銘)하여 이른다.
풍채는 크고 당당하며, 성품은 곧고 □하였으며,
조정에 □ 들어가니 만민이 우러러보았다.
나라의 원로로 부름을 받고 천자에게 아뢰어 정치를 펴니,
마침내 □지(□旨)가 내려 바로 잡아 다스리게 하였도다.
권세 있는 자가 질시하였으나 어그러진 것을 끝까지 파고들었는데
하늘이 수명을 주지 않으니 태산(泰山)이 뒤집어지도다.
생전의 덕행을 아로새겼으니 함께 끝없이 빛날 것이며
선을 쌓은 보답으로 자손도 창성하리로다.
지정(至正) 8년(충목왕 4, 1348) 8월 일
칙수 장사랑 광정대부 검교첨의참리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勅授 將仕郞 匡靖大夫 檢校僉議?理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事) 안산군(安山君) 안진(安震)이 짓다.
〔출전:『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
댓글목록
김주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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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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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우리가문 역사를 새로 정리하는 좋은 기회입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저는 며칠전 (진천으로) 이사를 해서 컴퓨터가 없습니다.
이달 중순까지 빈몸으로 동가식 서가숙 하면서 지내야 할 듯 합니다.
그래도 우리 사랑방에는 기회 닿는데로 들려가고 있습니다.
김태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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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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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가 많으십니다.시간이 없는 관계로 쉬는날만 짬을 냅니다. 자주 들어 오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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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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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은 홈에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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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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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대부님, 감사합니다. 보물이 연속입니다.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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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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