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김 응하장군 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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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2-02-18 23:40 조회2,307회 댓글0건본문
장군 김응하의 자는 경의니 안동인이다 장군은 키가
팔척이 넘고 용모 풍채가 준수하며 기상 의기가 당당호당하며
매사에 관대하고 몇 말술을 마셔도 취해 쓰러지는 일이없었다
장군은 이십오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조 훙서후로 여색을 삼가하니
백사 이 항복이 처음 보고 아주 기특히 여겨 경원판관으로 추천하여
임명되었다 그후 선천군수 겸 조방장으로 영전하여 재주있는 사람들의
앞길을 열어줌을 급선무로 하고 효성과 우애와 용맹이 있는 건장한 사람은
다 불러 크게 신임하니 군민이 감격의 눈물로 즐기며 모두 장군의 뜻을
따라 죽도록 일 할것을 다짐하였다 장군은 일찍이 오랑캐 땅의 날래고
사나운 준마를 타고 다녔는데 그는 말 위에서 투구와 활전대와 동개를 앞
에 던져놓고 뛰어내려 집어가지고 다시 뛰어 탈만큼 용맹하고 민첩 하였
으나 성품은 관후해서 남을 공손히 대접하며 선비를 예로써 사랑하며 일을
신속히 처리함이 마치 물이 흐르듯 조금도 지체함이 없었다 장군은 당시에
저명한 인사들과 교유하였는데 영변의 이 계방과 이 명달 철산의 정기남
정사검 백 붕경 임동검과 곽산의 탁송민과 성천의 황이충 나 여취 등 수백
명은 아주 다정한 사이었다 광해군에 명나라는 후금을 치기 위해서 우리
나라에 구원병을 청해 왔다 이보다 먼저 만주 흥경에서 일어난 후금은
요동지방까지 세력을 떨치니 이에 명나라에서는 이를 회복하려고 우리
나라에 구원을 청했고 우리는 임진왜란 때 입은 의리를 생각하여 강 홍입
을 대장으로 일만 삼천명의 군사가 출전하게 되었다 이때 장군은 좌영장으
로 강홍립의 휘하에서 출정하게 되었고 그때 아우 응해가 함께 가고자 하
였으나 장군은 【우리 형제가 함게 죽는다면 아무런 이로움이 없을것이
다】하며 힘써 만류한 다음 가족들과 작별하고 군수의 인신을 꼭 봉함하여
아전에게 주며 말하기르를【내 반듯이 전사할지 모르니 이 직인을 차고 가
서는 안되겠다 나라를 위하여 한번 죽는 것은 떳떳한 이치다】하고 광해군
십년 무오에 출정하였다 도원수 강홍입은 군사를 거느리고 의주에서 머물
다가 창성에 이르러 그대로 겨울이 지나도 떠나지 않고 섣달 그믐날이 임
박하였다 광해군십일년 기미 정월에 명나라 경략 유정으로부터 빨리 오라
는 독촉이 왔고 이월 이십사일을 기해 두 나라 군사가 경마전에 모이기로
하였다 이에 장군이 거느리는 좌영군이 먼저 그곳에 도착하니 명나라 군사
는 벌써 와서 있었다 유정은 장군에게【기일보다 늦었으며 지금 도원수는
편안한가?】하고 묻자 장군은 【보병들은 빨리 달려오지 못하여 뒤떨어졌
으나 도원수가 거느린 대군은 곧 도착 할 것입니다】고 대답하였다 유도독
은 장군의 말이 유창하고 거느리는 군용이 엄숙히 정제되었음을 보고 크
게 감탄하며 [조선에도 이와 같이 뛰어난 인물이 있었구나!]고 말했다 그
날 해가 저물 무렵에 강홍립이 군사를 거느리고 도착하자 유정은 밤에 그
를 불러 함께 출전할 계략을 상의하니 강홍립은 군량의 사정과 적지의 형
세 등을 들어 쾌히 응하지 아니하자 유도독은 성을 내며【조선에서 인물등
용이 어찌해서 눈앞에 있는 영웅을 두고 어린 아이 같은 사람을 사령관으
로 맡겼는가?】고 하였다 그런데 강홍립에 대해서는【함부로 후금의 비위
를 건드리지 말라】는 왕의 밀지를 받았다고도 하고 혹은 군량을 구실삼아
서 마음대로 지체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좌영장인 장군은 강홍립의 뜻을 불
고하고 오천명의 보병으로 적진을 향했다 명나라 군사와 함께 심하를 지나
서 청나라 군사를 만나 여기서 큰 싸움이 벌어졌는데 청나라 장수 영아아
대는 삼만의 복병으로 갑자기 달려드니 명나라 군사가 패하여 흫어지자
응하장군은 강홍립에게 사람을 보내 구원을 청했는데도 홍립은 이에 응하
지 않았다 할수 없이 장군은 좌영군만으로 혈전을 전개하다가 보니 무수
한 적을 죽였으나 화약도 화살도 떨어져가고 세찬 북풍으로 모래와 돌이
날아오니 우리 군사도 일부가 문란해졌으나 군사들은 적의 날카로운 창칼
앞에 잘 싸워 한사람도 헛되게 죽지 않았다 대세가 이렇게 되자 장군은
큰 버드나무를 의지해서 활을쏘았다 이때 장군의 지인인 철현이란 군사만
이 남아서 갑옷 속에 간직한 삼백개의 화살을 하나씩 뽑아 주었다 하나 하
나의 화살은 그대로 적중하였으나 다떨어지자 장군은 긴 칼을 뽑아 닥치
는 적을 쳐죽였으며 수십개의 창을 맞아 상처를 입고 기운이 다하여 버드
나무를 의지하고 죽었으나 그 손에는 칼자루를 쥐고 노기찬 눈을 부릅뜨
고 산 사람 처럼 서 있으니 적이 가까이 오지 못했다 이때가 광해십일년 기
미사월사일이었다 싸움이 끝나자 청장 영아아대는 는 감탄함을 마지못했
고 명나라 유격장 교일기는[조선 군사는 날카롭고 그 장수는 용맹스럽다]
고 칭찬했으며 청국 사람들은 장군이 전사한 버드나무 밑을 지나면서[유
하장군의 싸움은 무서웠다]하고[좋은 사내여! 다른 날 다시 태어나거던 우
리가 얻기원한다]고 말했다 조정에서는 그에게 영의정을 추증하고 시호
를 충무라고 내렸으며 사당을 짓고 의주에 충혼비를 세우고 명나라 조정에
서도 요동백을 추증하고 백금 만여양을 하사하여 장군의 가정을 돌보게 하
였다 . (이 사기는 해동명장전에서 발취 전기하였음)
팔척이 넘고 용모 풍채가 준수하며 기상 의기가 당당호당하며
매사에 관대하고 몇 말술을 마셔도 취해 쓰러지는 일이없었다
장군은 이십오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조 훙서후로 여색을 삼가하니
백사 이 항복이 처음 보고 아주 기특히 여겨 경원판관으로 추천하여
임명되었다 그후 선천군수 겸 조방장으로 영전하여 재주있는 사람들의
앞길을 열어줌을 급선무로 하고 효성과 우애와 용맹이 있는 건장한 사람은
다 불러 크게 신임하니 군민이 감격의 눈물로 즐기며 모두 장군의 뜻을
따라 죽도록 일 할것을 다짐하였다 장군은 일찍이 오랑캐 땅의 날래고
사나운 준마를 타고 다녔는데 그는 말 위에서 투구와 활전대와 동개를 앞
에 던져놓고 뛰어내려 집어가지고 다시 뛰어 탈만큼 용맹하고 민첩 하였
으나 성품은 관후해서 남을 공손히 대접하며 선비를 예로써 사랑하며 일을
신속히 처리함이 마치 물이 흐르듯 조금도 지체함이 없었다 장군은 당시에
저명한 인사들과 교유하였는데 영변의 이 계방과 이 명달 철산의 정기남
정사검 백 붕경 임동검과 곽산의 탁송민과 성천의 황이충 나 여취 등 수백
명은 아주 다정한 사이었다 광해군에 명나라는 후금을 치기 위해서 우리
나라에 구원병을 청해 왔다 이보다 먼저 만주 흥경에서 일어난 후금은
요동지방까지 세력을 떨치니 이에 명나라에서는 이를 회복하려고 우리
나라에 구원을 청했고 우리는 임진왜란 때 입은 의리를 생각하여 강 홍입
을 대장으로 일만 삼천명의 군사가 출전하게 되었다 이때 장군은 좌영장으
로 강홍립의 휘하에서 출정하게 되었고 그때 아우 응해가 함께 가고자 하
였으나 장군은 【우리 형제가 함게 죽는다면 아무런 이로움이 없을것이
다】하며 힘써 만류한 다음 가족들과 작별하고 군수의 인신을 꼭 봉함하여
아전에게 주며 말하기르를【내 반듯이 전사할지 모르니 이 직인을 차고 가
서는 안되겠다 나라를 위하여 한번 죽는 것은 떳떳한 이치다】하고 광해군
십년 무오에 출정하였다 도원수 강홍입은 군사를 거느리고 의주에서 머물
다가 창성에 이르러 그대로 겨울이 지나도 떠나지 않고 섣달 그믐날이 임
박하였다 광해군십일년 기미 정월에 명나라 경략 유정으로부터 빨리 오라
는 독촉이 왔고 이월 이십사일을 기해 두 나라 군사가 경마전에 모이기로
하였다 이에 장군이 거느리는 좌영군이 먼저 그곳에 도착하니 명나라 군사
는 벌써 와서 있었다 유정은 장군에게【기일보다 늦었으며 지금 도원수는
편안한가?】하고 묻자 장군은 【보병들은 빨리 달려오지 못하여 뒤떨어졌
으나 도원수가 거느린 대군은 곧 도착 할 것입니다】고 대답하였다 유도독
은 장군의 말이 유창하고 거느리는 군용이 엄숙히 정제되었음을 보고 크
게 감탄하며 [조선에도 이와 같이 뛰어난 인물이 있었구나!]고 말했다 그
날 해가 저물 무렵에 강홍립이 군사를 거느리고 도착하자 유정은 밤에 그
를 불러 함께 출전할 계략을 상의하니 강홍립은 군량의 사정과 적지의 형
세 등을 들어 쾌히 응하지 아니하자 유도독은 성을 내며【조선에서 인물등
용이 어찌해서 눈앞에 있는 영웅을 두고 어린 아이 같은 사람을 사령관으
로 맡겼는가?】고 하였다 그런데 강홍립에 대해서는【함부로 후금의 비위
를 건드리지 말라】는 왕의 밀지를 받았다고도 하고 혹은 군량을 구실삼아
서 마음대로 지체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좌영장인 장군은 강홍립의 뜻을 불
고하고 오천명의 보병으로 적진을 향했다 명나라 군사와 함께 심하를 지나
서 청나라 군사를 만나 여기서 큰 싸움이 벌어졌는데 청나라 장수 영아아
대는 삼만의 복병으로 갑자기 달려드니 명나라 군사가 패하여 흫어지자
응하장군은 강홍립에게 사람을 보내 구원을 청했는데도 홍립은 이에 응하
지 않았다 할수 없이 장군은 좌영군만으로 혈전을 전개하다가 보니 무수
한 적을 죽였으나 화약도 화살도 떨어져가고 세찬 북풍으로 모래와 돌이
날아오니 우리 군사도 일부가 문란해졌으나 군사들은 적의 날카로운 창칼
앞에 잘 싸워 한사람도 헛되게 죽지 않았다 대세가 이렇게 되자 장군은
큰 버드나무를 의지해서 활을쏘았다 이때 장군의 지인인 철현이란 군사만
이 남아서 갑옷 속에 간직한 삼백개의 화살을 하나씩 뽑아 주었다 하나 하
나의 화살은 그대로 적중하였으나 다떨어지자 장군은 긴 칼을 뽑아 닥치
는 적을 쳐죽였으며 수십개의 창을 맞아 상처를 입고 기운이 다하여 버드
나무를 의지하고 죽었으나 그 손에는 칼자루를 쥐고 노기찬 눈을 부릅뜨
고 산 사람 처럼 서 있으니 적이 가까이 오지 못했다 이때가 광해십일년 기
미사월사일이었다 싸움이 끝나자 청장 영아아대는 는 감탄함을 마지못했
고 명나라 유격장 교일기는[조선 군사는 날카롭고 그 장수는 용맹스럽다]
고 칭찬했으며 청국 사람들은 장군이 전사한 버드나무 밑을 지나면서[유
하장군의 싸움은 무서웠다]하고[좋은 사내여! 다른 날 다시 태어나거던 우
리가 얻기원한다]고 말했다 조정에서는 그에게 영의정을 추증하고 시호
를 충무라고 내렸으며 사당을 짓고 의주에 충혼비를 세우고 명나라 조정에
서도 요동백을 추증하고 백금 만여양을 하사하여 장군의 가정을 돌보게 하
였다 . (이 사기는 해동명장전에서 발취 전기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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