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영공(김순) 할아버지 연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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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03-11 18:43 조회1,479회 댓글2건본문
문영공(김순) 할아버지 연보
1258(고종 45)∼1321(충숙왕 8). 고려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귀후(歸厚). 방경(方慶)의 막내아들이다.
1) 선계
공의 이름은 순(恂)이고, 자는 귀후(歸厚)이며, 가계가 신라왕(新羅王) 김부(金傅 : 敬順王)에서 나왔다. □□□□□□□□□□□□□□□□□□□공은 김부의 10세손으로 안동부(安東府)가 곧 그 고향이다. 증조 민성(敏成)은 좌복야 행장야서승 겸 직사관(左僕射 行掌冶署丞 兼 直史館)에 추봉되었고, 조부 효인(孝印)은 중서령 행정의대부 병부상서 한림학사 충사관수찬관 지제고(中書令 行正議大夫 兵部尙書 翰林學士 充史館修撰官 知制誥)에 추봉되었으며, 아버지 방경(方慶)은 선수중봉대부 판고려군도원수 추충정난정원공신 광정대부 삼중대광 판도첨의사사 전리사사 상장군 상락군개국공 식읍 1,000호 실봉 300호(宣授中奉大夫 判高麗軍都元帥 推忠靖難定遠功臣 匡靖大夫 三重大匡 判都僉議司事 典理司事 上將軍 上洛郡開國公 食邑一千戶 實封三百戶)로 선충협모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충렬공(宣忠協謀定難靖國功臣 壁上三韓 三重大匡 忠烈公)으로 추증되었다. 어머니 박씨는 중서사인 지제고(中書舍人 知制誥) 익정(益旌)의 딸로 음평군부인(陰平郡夫人)에 봉해졌다.
2) 어머니 음평군부인(陰平郡夫人) 박씨(朴氏)
충렬공 전취 박씨(前娶 朴氏)는 1258년 막내아들 김순(1258~1321)을 낳고 얼마후에 돌아가시고, 손씨를 재취로 맞아들여 딸을 낳아(1260년대), 후에 채의(=채홍철, 1262~1340)에게 출가시킨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1300년 충렬공 묘지명, 이진 찬>
---전취 박씨(前娶 朴氏)는 공(公)보다 먼저 돌아가시어 또다시 손씨(孫氏)를 재취(再娶)하여 딸 한 분을 나셨는데 그 따님은 통례문지후(通禮門 候) 채의(蔡宜)에게로 출가(出嫁)하였다.
3)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썼다.
공은 글씨를 잘 써서 여러 비문(碑文)을 베껴 썼다. 나이 15세쯤[志學]에(1272년쯤) 문음(門蔭)으로 벼슬하여 장생서승(掌牲署丞)이 되고, 뒤에 별장(別將)으로 바뀌면서 어견룡행수(御牽龍行首)가 되었다.
4) 중찬(中贊) 문경공(文敬公) 허공(許珙)의 둘째 딸과 혼인하다.
***(1녀-정책, 2녀-백이정, 3녀-별리가불화, 장남-영돈 1285년생)
<1332년 김순처허씨 묘지명, 이제현 찬>
부인의 성은 허씨(許氏)이고, 중찬(中贊) 문경공(文敬公) 허공(許珙)의 둘째 딸이다. 1265년(을축년 : 원종 6)에 태어났다. 조부는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수(遂)이며, 증보부는 예빈소경(禮賓少卿) 경(京)이다. 어머니는 윤씨(尹氏)이며, 정당문학(政堂文學) 문평공(文平公) 극민(克敏)의 딸이다. 형제인 충선왕비인 순비 허씨는 묘지명이 있다.
부인은 삼가고 신중하여 문경공이 사랑하였다. (부인의 어머니인) 윤씨의 장사(葬事)날이 을축(乙丑)일이 부인의 출생한 해(을축년 : 원종 6, 1265)에 해당한다고 하여, 사람들이 날짜를 점쳐 바꾸자 하였다. 문경공은 “내 딸은 반드시 복을 누릴 것이니 꺼릴 것 없다.”고 하였다. 좋은 사위를 택하여 처로 삼게 했다. 죽은 상락군(上洛郡) 문영공(文英公) 김순(金恂)이다. 김씨와 허씨는 모두 대족(大族)이다. 사치스러움과 부유함이 서로 높았는데, 부인은 예법으로 스스로를 지켜, 사람들이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문영공이 만년에 노래 잘하는 기생을 좋아하였으나, 투기하는 기색이 없었다.
5) (22세)1279년 과거급제로 아버지에게 큰 기쁨을 드리다.
관직은 비록 동반(東班, 文班)에서 시작하여 서반(西班, 武班)에 이르렀지만 그 뜻은 학문[文學]에 두지 않은 적이 없었다. 대개 부친이 비록 양조(兩朝)의 장상(將相)이라는 극히 높은 지위에 올랐으나 다만 과거[桂籍]에 오르지 못했음을 한스럽게 여겨, 아들이 조업(祖業)을 회복하게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공은 이로 말미암아 힘써 공부하고 게으르지 않아서 지원(至元) 16년 기묘년(충렬왕 5, 1279, 22세)의 과거[春場]에 응시하여 단번에 2등[副元]으로 합격하였다. 그 해에 처음 섭낭장(攝郞將)에 임명되었다가 뒤에 국학직강(國學直講)으로 바뀌었으니, 이는 공이 아버지가 가진 분(憤)을 푼 것이다.
이로부터 선공(先公)은 막내아들에게 은혜를 더 하여 늘 곁에서 떠나지 않도록 하였고, 상국(上國 : 元)에 하정사(賀正使)로 갈 때에도 따라가게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단지 일본(日本)을 정벌하는 배[東征船]에는 따라 오르지 못하게 하였으니 종군하면서 위험한 일에 빠지지 않도록 한 것이었다. 공은 이 때에 임금을 호종하였는데, 명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전함(戰艦)에 오르니 자못 호위하고 구원한 공로가 있었다. 이 일은 공이 다만 충효를 오로지 하면서 분발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은 것이다.
6) (25-26세) 전중시사, 상주판관, 전법좌랑 등
임오년(충렬왕 8, 1282, 25세)에 전중시사(殿中侍史)로 옮기고, 이듬해에(26세) 상주판관(尙州判官)이 되어 나갔는데, 잘 다스렸으므로 일년이 못 되어 들어와 전법좌랑 □지통례문사 고공정랑(典法佐郞 □知通禮門事 考功正郞)이 되었다.
7) (29세) 고향 증조부 묘 참배시 태백산(太白山)에 제고(祭告)
병술년(충렬왕 12, 1286, 29세)에 남녘 지방으로 사명(使命)을 받들어 내려가면서 선공을 모시고 고향에 있는 조상의 묘에 참배하였다.
<1300년 충렬공 묘지명, 이진 찬>
---병술(丙戌=1286)년에는 조부(祖父=김민성)께서 애육(愛育)해 주신 은혜(恩惠)를 생각하여 휴가(休暇)를 얻어 성묘(省墓)하실 때 왕(王)이 막내아들(季子) 고공정랑(考功正郞) 순(恂=문영공)을 보내서 태백산(太白山)에 제고(祭告)하니 호위(護衛)하는 공경(公卿)들이 떠나는 길에 장막(帳幕)쳤다.
아마 분영(墳瑩)에 참배(參拜)하고 돌아오는 길에 향당(鄕黨)의 친구들을 위해 칠 팔일을 머무는데 부로(父老)들에게 말하기를 '가을 일철이 등장(登場)하여 인력(人力)이 부족(不足)한데 어찌 내가 오래 머물러 방해가 되게 하리오!'하고 가마를 명하여 돌아왔다.
8) (31세) 비서소윤, 세자(훗날 충선왕) 사부
무자년(충렬왕 14, 1288, 31세)에 비서소윤 지통례문사(秘書少尹 知通禮門事)에 임명되고, 그 해에 임금의 명으로 공을 세자부 행리별감(世子府 行李別監)으로 삼아 사부(師傅)의 직책을 맡겼다.
댓글목록
김주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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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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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최근 발용 형님께서 많이 소개하고 있는 묘지명 자료를 저본으로 하여, 문영공(김순) 할아버지 연보 비슷하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덕분에 내용이 아주 충실해 졌습니다.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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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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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대부님, 연보 정리 감사합니다.
옛 서적들에서 연보 정리해 놓은 것 보면서 우리도 이 작업이 시급하다는 생각을 늘 해 봅니다.